국제기구 조기 은퇴한 이유, 애인 때문이었다

"책 읽고 쓰기는 애인", 전 WTO 선임 참사관 김의기를 만나다

등록 2015.07.20 13:38수정 2015.07.20 13:3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기위해 국제기구 최고의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아~ 그분이 풀어놓을 산더미 같은 경험과 보석같은 지혜들을 어찌하고 이렇게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는지... ⓒ 이안수


#1


-원산지구분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인가요?
"제가 질문 드려볼게요. 생선의 원산지에 관해서요. 12해리 영해 내에서 고기를 잡으면 어느 국가의 생선입니까?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잡힌 생선의 원산지는 어떻게 될까요? 그럼 공해에서 잡힌 생선은? 어선의 국기는 모두 달라요. 원산지는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나요? 호주에서 태어난 소를 수입해서 한국에서 6개월 키웠습니다. 원산지는? 미국의 대형 도축장에서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한 소를 도축했습니다. 원산지를 어디로 해야 할까요?

미국에서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원두를 수입해서 여러 나라의 원두를 섞어서 블렌딩(혼합)한 다음 로스팅했습니다. 커피의 맛과 향은 커피 종과 생산지뿐만 아니라 블렌딩 비율, 로스팅 방법에 따라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더구나 각 회사의 커피는 코카콜라가 제조 원료를 비밀에 부치는 것처럼 블렌딩 비율을 일급비밀로 부칩니다. 원산지는 어디가 되어야 하나요?"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더구나 원사진표기는 해당 국가의 경제적 이해득실과 소비자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작년 9월 초, 저는 모티프 원에서 24년간의 유럽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한 작가와 대면했습니다.

김의기, 그분은 WCO(세계관세기구)에서 3년, WTO(세계무역기구)에서 19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는 'Eki Kim'으로 알려졌었습니다. 국제기구에 진출해서 뛰어난 전문성을 발휘한 우리나라의 첫 세대였습니다.


김의기씨는 WTO에서 전문직 직원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인 10등급 선임 참사관(senior counselor)으로 원산지와 관세평가분야에서 세계가 인정한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1975년 제18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WCO의 관세평가 담당관 및 제네바 한국대표부 재무관보로 국제기구로 진출한 다음 2013년 WTO 참사관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의 경력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습니다.

-WTO의 정년은 언제입니까?
"1995년 한국대표부 재무관보로 일하다가 WTO에 지원했습니다. 다행히 직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입사 후 5년이 지난 후, 영구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제가 62세가 되는 2015년까지 근무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은퇴 나이가 65세까지 연장되어서 2018년까지 근무할 수 있지요."

-그런데 왜 조기 은퇴를 하신 겁니까?
"제 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요."

-애인이라면?
"책을 읽고 책을 쓰는 것입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수험생 시절에도 입시공부 대신 독서에 빠져 지냈습니다. 덕분에 재수했지요. 이동 중에도, 출장지에서도, 휴가지에서도 스위스의 설산을 내려 보면서 책을 읽었지요. 제게 싫증 나지 않는 애인은 책이더라고요. WTO에서도 독서 모임(Book club)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문화와 문명권이 각기 다른 그 구성원들과 같은 책을 읽고 토론을 하다 보면 각 나라의 인식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저는 치열한 협상으로 보낸 시간을 접고 좀 더 일찍 제 애인과 함께 여생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김의기씨는 너무 일찍 한국을 떠난 첫째 자녀와 유럽에서 태어난 둘째가 한국적응이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아이들과 부인을 스위스에 남겨두고 홀로 귀국하여 그의 애인, 책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분과의 첫 만남에서도 계속될 애인과의 동행에 일에 얼마나 설레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a

모티프원의 서재에서 책에 둘러싸여 행복해하시던 고김의기선생님 ⓒ 이안수


#2

김의기씨와 함께 식사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삶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제게도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국제무대를 누빈 수많은 막후의 일들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먼저 조기 은퇴한 사람으로서 김의기씨의 또 다른 삶이 어떠할지에 대해 그의 의문에 답할 수 있었습니다.

김의기씨는 대화에서 수시로 루소와 파스칼, 위고와 괴테의 문장들을 인용했습니다. 제가 플라톤과 도스토옙스키를 말하면 그 책들을 독서클럽에서 언제 읽었는지를 상기했습니다.

떠난 지 20년이 넘어 돌아온 서울에서 모국어로 글 쓰는 기쁨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파했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떠나 홀로 서울에서 생활하는 모든 외로움을 잊게 하는 환각보다 깊은 기쁨이었습니다.

네 권의 책을 내고 그의 전문성을 나눌 많은 강연 요청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대면한 옛친구들과의 반가운 해후가 몇 번의 만남이 지속하기도 전에 의식과 인식의 차이, 세계관과 가치관의 차이로 대화가 막혀버리는 것을 애석해 하면서도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식사의 자리에서 김의기씨는 음식을 거반 먹지 못했습니다. 한 잔의 술도 못했으며 커피대신 물을 마셨습니다. 그분이 식사자리에 함께하는 것은 오직 대화를 즐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새롭게 한국의 삶에 적응하느라 그렇거니 여겼습니다. 속을 가라앉히는 약을 받아먹으면서도 건강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두어 번 만남 후 다시 만날 날을 은근히 기대한 제게 지인이 근황을 전해주었습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 치료에 들어갔지만, 활동은 계속하고 계세요."

저는 그 암이라는 것이 요즘은 극복단계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상당히 상황이 중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제 한 출판사로부터 쪽지를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 출판사 편집부입니다. 귀하의 게시글에 첨부된 사진의 사용 허락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쪽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김의기 선생님께서 지난 7월 10일 영면하시어, 회사 블로그에 이 소식을 알리고자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좀처럼 자연스럽게 나온 선생님 사진을 구하지 못하여 이곳저곳을 찾던 중 귀하의 블로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책에 둘러싸여 행복해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저희 회사 블로그에도 올리고자 이렇게 쪽지 드립니다. 사진을 사용할 경우, 출처를 분명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검토하신 후 간단한 답신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간단한 쪽지는 제게 슈퍼태풍의 내습보다도 깊은 내상(內傷)을 안겼습니다. 그분이 풀어놓을 산더미 같은 경험과 지혜를 잃은 손해는 그분이 젊은이들을 가슴 들뜨게 할 '글쓰기'에 대해 설레 하시던 표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통과 비애가 제 마음을 채워서 해가 중천인 이 시간도 칠흑 같은 밤입니다.

속이 불편하다며 밥은 한 숟가락도 들지 못한 그분이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적히면 했던 말이 귓가에 선명합니다.

"새 책을 읽으면 새 애인을 만나는 것 같고,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옛 애인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애인의 애인을 잃었습니다.

"부디 하늘에서 창작의 희열을!"

a

WTO에서 답하다 : 국제통상 전문가 김의기?(김의기 저 | 다른세상 | 2012년 01월) "제가 살아온 작은 기록입니다. 읽고 좋아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2014. 9. 7. _ 저자 김의기"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김의기 저 | 다른세상 | 2013년 01월) 이 안에 담긴 불타는 문장들은 제 안에 오래 살면서 저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독자들의 것입니다. 2014. 9. 7. 나는 루소를 읽는다 : 자유와 평등, 다시 시대의 광장에 서다(김의기 저 | 다른세상 | 2014년 01월) 제가 평생을 걸쳐 연구하고 사랑해온 나의 스승, 우리의 스승 루소 연구서입니다. 2014. 9. 7. 별세 당일에 출간되었다는 또다른 독서에세이 '어느 독서광의 더 유쾌한 책 읽기 : 현대문학편(김의기 저 | 다른세상 | 2015년 07월)'가 유작이 되었습니다. ⓒ 이안수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김의기 #WTO 선임 참사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