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성 취약하니 환관 등에 업고 첩보질

[게릴라 칼럼] 명나라 영락제와 첩보기관 '동창'

등록 2015.07.24 08:23수정 2015.07.2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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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최근 논란이 되는 국가정보원 스마트폰 해킹 문제나 지난번에 벌어진 대선개입 문제 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부 사람은 "정보기관의 활동은 국가안보를 위해 부득이한 일이 아닌가?"라면서 국정원에 대한 비판을 의아해 한다. 이런 이들은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이런 것까지 문제 삼다니?"라면서 "옛날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라는 반응을 보일 게다.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을 지닌 이들을 되레 이상하게 볼 듯하다. 만약 옛날 사람들이 지금의 광경을 지켜본다면, 그들은 "아니, '옛날 같으면'이라니! 이런 일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누가 그러더냐?"라고 외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고대로 가면 갈수록 국가기관의 첩보 활동이 국가의 위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군주들이 개인적으로 정보팀을 운영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첩보기관을 보유하는 것은 옛날로 가면 갈수록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원인은 고대 국가의 정치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늘의 대표자'가 백성을 엿듣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옛날 군주들은 하늘의 대표자를 자처했다. 천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신의 대리인을 자처했던 것. 동아시아에서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다. 조선시대까지 군주가 죽으면 종묘(왕립 사당)에 모셔져 국가적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군주의 지위가 신성시됐기 때문이다.

옛날 군주들이 신성성을 인정받은 것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군주와 무당(제사장)의 경계가 불명확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이란 타이틀로 임금 자리에 오른 신라 제2대 남해왕(남해차차웅)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고대에는 미래를 예견하거나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왕이 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전통 때문에,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군주들은 자신에게 신비한 능력이 없더라도 자신이 신의 대리인인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옛날 사회에서는 군주가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게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군주가 신성성을 인정받는 국가에서, 군주가 정보기관을 만들어 관료나 백성들의 뒷조사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군주가 개인적으로 정보팀을 꾸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정보기관을 두는 것은 군주의 신성한 위상과 도저히 부합되지 않았다. 그것은 군주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신의 대리인이 백성들의 말을 엿듣는 것은 신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는 군주가 차라리 신비한 힘을 발휘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그런 군주들이 있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은 무속적인 혹은 직관적인 능력으로 백제군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개구리 통해 백제군 침략을 예견한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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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 ⓒ MBC


선덕여왕 당시, 서라벌에 있는 영묘사라는 사찰에 옥문지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해에는 겨울인데도 이 연못에 개구들이 모여들었다. 개구리들은 사나흘이나 계속해서 울어댔다. 참 해괴한 일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술렁거렸다.

그러자 귀족들이 선덕여왕에게 문의를 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본 것. 구중궁궐에 있는 여왕에게 이런 문의를 한 것은 여왕이 무녀의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왕에게 점괘를 부탁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점괘가 나왔다. 서라벌 근처의 여근곡이란 계곡에 백제 병사들이 숨어 있기 때문에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울어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말을 듣고 신라군 2000명이 출동해보니, 여근곡에 정말로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이들은 신라군에 의해 제압됐다.

이렇게 선덕여왕은 신비한 능력으로 얻어낸 정보에 기초해서 백제군의 서라벌 침투작전을 막아냈다. 500명을 사방에서 포위하는 데 필요한 2000명을 출동시킨 것을 보면, 선덕여왕이 꽤 용한 무녀의 특성을 겸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선덕여왕은 옥문(玉門)이란 이름이 붙은 연못과 여근(女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계곡이 풍기는 성적 상징의 동일성을 기초로,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우는 것과 여근곡에 백제군이 숨어 있는 것을 직관적 감각으로 연관시켰을 수도 있다. 그런 뒤에, 백제군의 숫자가 500명이라는 부분은 신비한 능력으로 알아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비합리적 방식으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옛날에는 무당의 속성을 어느 정도 보유한 인물이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군주가 그런 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게 당연하게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신성한 군주가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백성들의 뒷조사를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무녀가 '할아버지'(신)한테 물어봐서 정보를 얻지 않고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서 정보를 얻어낸다면, 사람들은 "무당이 뭐 저래?"라며 비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무당은 무능한 무속인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사람들은 군주가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을 부자연스런 일로 인식했다. 그것은 군주의 무능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군주가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자면, 은밀하게 정보팀을 꾸리든가 아니면 '청와대' 안에서 눈을 감고 점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법들은 몰라도, 군주가 공식적 첩보기관을 두는 것은 옛날 사회에서는 쉽지 않았다.

물론, 고대 국가가 공식적 정보기관을 두지 못한 것이 꼭 군주의 신성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대로 갈수록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전국적 규모의 정보기관을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 이유는 신성한 군주가 백성들의 뒷조사나 하고 통신수단이나 훔쳐보는 것은 군주의 권위에 맞지 않다는 사회적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명나라판 수양대군' 영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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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중국어판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공식 첩보기관을 둔 군주가 있었다. '명나라판 이방원' 또는 '명나라판 수양대군'이라 할 수 있는 명나라 황제 영락제(사당 명칭은 성조, 재위 1402~1424년)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인류사회에서 등장한 최초 형태의 정보기관을 창설한 주역이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이례적으로 정보기관을 설치한 군주였다.

영락제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주원장을 계승한 사람은 주원장의 장손인 건문제(사당 명칭은 혜종)였다. 주원장의 황태자인 의문태자가 병들어 죽는 바람에 의문태자의 아들인 건문제가 황제가 됐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영락제는 황제가 되는 데 필요한 정통성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영락제는 조카를 몰아내고 제3대 황제가 됐다. 쿠데타로 왕권을 빼앗았다. 안 그래도 정통성이 없었는데, 무력으로 즉위해 그는 더욱 더 정통성이 없는 군주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 같은 사정이 영락제가 정보기관을 창설하게 된 배경이 됐다.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우격다짐으로라도 권력을 유지하자면, 신하와 백성들의 뒷조사를 해서라도 저항세력을 분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1420년에 동창(東廠)이란 정보기관을 창설했다. 이것은 중국 최초였음은 물론이고 인류사적으로도 최초 형태에 속하는 공식 첩보기관이었다. 취약한 정통성으로 인해 신성한 이미지를 갖기 힘들었던 영락제의 정치적 사정이 동창 창설의 직접적 동기가 됐던 것이다.

고대 첩보기관은 '정통성 취약'과 직결

영락제가 첩보기관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환관(내시)들에 대한 장악력이 높았던 것과도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쿠데타를 벌일 때 그는 환관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이런 환관 조직을 기초로 동창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황제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환관들을 친위 세력으로 만든 덕분에 영락제는 첩보기관을 좀 더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 동창은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해서 조선에까지 스파이를 파견하는 국제적 기관으로 성장했다. 명나라(Ming)의 동창은 MCIA(Ming+ CIA)나 다름 없었다.

영락제가 공식 첩보기관을 둔 것은 그가 쿠데타로 집권한 군주라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기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백성과 신하들의 뒷조사를 해야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고대로 가면 갈수록 국가는 첩보기관을 둘 이유는 없었다.

이처럼 과거로 가면 갈수록 국가와 첩보기관의 거리는 멀었다. 국가가 첩보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도 국정원의 국민 사찰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옛날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갖고 요란을 떤다"라고 말할 테지만, 옛날로 가면 갈수록 이것은 큰일 날 일이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국가정보원 #스마트폰 사찰 #정보기관 #선덕여왕 #영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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