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창 뒤 수녀들 소리에 강렬한 전율 느끼다

[여행 책에 없는 유럽 종단기12] 생폴드방스 수녀원 더 깊게 들여다보기

등록 2015.08.10 16:47수정 2015.08.1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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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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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 수녀원 마당에 가득한 오렌지 나무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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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 도미니코 수녀원 풍경 ⓒ 송주민


다시 생폴드방스 도미니코 수녀원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한겨울에도 연이은 화창함이 당연한 이곳, 오늘도 어김없다. 수녀원 마당은 오렌지 나무로 이루어진 숲. 몽글몽글 탐스럽게 매달린 오렌지가 작은 태양인 것 마냥 주황빛으로 반짝거린다. 이 수녀원에 있던 시절, 저 녀석들에게 매일 물을 주곤 했다는 그녀와 함께 오렌지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한가로운 아침이다.

마당을 지나, 오래된 돌과 이끼로 세워진 수녀원 입구에 선다.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자그마한 성당이 있다. 유럽 대도시의 웅장한 성당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숲길이 가까운 외진 곳, 수녀원에 붙어 있는 성당, 초월자와 만나는 소박한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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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 생폴드방스의 도미니코 수녀원 입구 풍경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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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 수녀원 입구에 있는 성당 ⓒ 송주민


침묵으로 들어서기

안그래도 조용한 곳인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햇살과도 멀어진다. 한 겹 더 소음과 멀어지고 고요 속으로, 침묵으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세속 밖에서 일상을 사는 수녀님들은 제대 뒤 뚫린 곳 말고는 검은 철창으로 둘러싸인 자리에, 하얀 수도복에 검정색 베일을 길게 내려쓰고 앉아 있다.

"그분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가난과 순종과 독신의 삶을 사셨다. 그런데 이 삶은 자기를 온전히 포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이었다. 수도생활은 바로 오롯이 하느님만을 찾기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가난과 독신과 순종으로 예수의 이 자아포기의 삶을 본받는 생활인 것이다."(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 소개 글에서)

이 무지막지한 자유주의 세상에서, 자유가 무엇인지 탐욕이, 방종이 무엇인지도 헷갈린 시대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과 철창을 치고, 돈도 명예도 자신 이름 석 자 마저도 알아주는 이 없이, 진리로 믿는 오직 하나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무엇일까? 함께온 그녀는 "봉헌된 삶"이라고 말했었지.

순간, 사진으로만 봤던 수도자들의 입회식, 발끝부터 이마까지 땅에 대고 엎드려서 자신을 완전히 낮춰버린 채 '절대 순명'을 서약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앞에 앉은 수녀님들도 그렇게 스스로 자아포기의 맹세를 하고 저 자리에 앉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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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 수녀원의 소박한 성당에서. 제대 뒤에 수녀님들의 자리가 있다. ⓒ 송주민


자기 인생을 누군가에게 통째로 내어맡긴다니, 그것도 '신을 의심하는 게' 만연한 시대에 말이야. 이토록 무책임한 삶의 자세가 있을 수 있을까. 신도 세계도 아닌 "오직 나 자신에게만 속한다"던 프랑스 땅의 철학자 사르트르(어제 마을을 둘러볼 때 그의 사진을 봤다)의 말에 전율하던 시절이, 묵직한 자의식을 거대한 실존으로, 그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가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사르트르를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아가 팽창할수록 집착과 불안은 커졌고 주위의 시선에 휘둘렸으며, 획득하려던 존재는 오히려 가냘픈 실낱처럼 가벼워졌다. 나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 했다. 나를 지우고, 부수고, 깨어내고, 흩어버리고, 그리하여 비로소 나타난 변화들."(작년 겨울, 북한산을 오갈 때 쓴 메모 중)

무릎을 꿇다, 자유롭다

얼마간의 적막 속에서 문이 열린다. 주민이자 신자인듯한 중년 여인이 들어온다. 들어옴과 동시에 십자가가 매달린 제대를 바라보며 몸을 낮춘다. 곧이어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꿇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조용히 걸어 자리에 와서 앉는다. 뒤에 들어오는 사람도, 그 뒤도, 또 다음 사람도 계속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다. 여전히 성당 안은 침묵뿐이다.

함께온 그녀는 옆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겨 있다. 고개 숙인 그녀에게서 간혹 느껴지곤 했던, 미사포(미사 전례 때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베일)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강렬한 자유의 기운에 대해 떠올려본다. 그녀는 한가지 붙잡은 끈 말고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이곤 했다. "세상 그 무엇이나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고 '영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자유'"(윤진 수녀)를 지닌 듯한 초연한 눈빛이 궁금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으로부터도. 마치 이런 것.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 그에 의지하여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이 절대적인 존재와의 자발적인 결합은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것에 대한 커다란 자유를 선사한다. 이 하느님께만 나는 최종적으로 책임을 진다. 국가나 교회, 정당이나 회사, 교황이나 그 어떠한 지도자에게도 나는 책임이 없다."(한스 큉,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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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 수녀원, 담벼락 밖에서 바라보다 ⓒ 송주민


제대 뒤에서 수녀님들이 부르는 성가 소리에 침묵이 흩어진다. 그러나 어수선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침묵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짙은 경건함이 자그마한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제대 뒤의 연한 주황색 조명만이 환한 어두운 공간에서, 사방팔방으로 메아리쳐 들려오는 맑은 선율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알 길 없는 침묵으로 이끄는 천상을 향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순간 온몸에 강렬한 전율감마저 밀려오고 있다.

무릎 꿇음이, 버림이, 자아의 포기가 곧 실존의 포기가 아닐 수 있음을, 오히려 해방된 자의식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더 낮추고 비우며 살겠습니다, 나도 제대 앞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는다. 요란스런 신비체험에 대해 그리 믿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다가온 무너짐으로서 자유로워지는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 안으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철창 뒤에서 들려오는 수녀님들의 노랫소리가 땅바닥으로 향한 나에게로 온통 휘감아 흐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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