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간 아들, 한 달 전과 다른 사람이 됐다

매서운 병사로 거듭난 아들,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을 거 같다

등록 2015.08.18 14:01수정 2015.08.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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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수료식이 강당에서 진행되기를 원치 않았던 탓이었다. 군대에 보낸 아들의 모습을 그들이 양성된 훈련소에서 직접 보는 기회는 평생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군인이 된 아들들 역시 강당에서 부모들과 만나기를 원치 않을 터였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메르스로 인해 면회를 비롯한 행사들이 취소되는 바람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랐다.    
 
천만다행으로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만삭으로 낮게 드리운 구름이 차양막(가림막)으로 구실한 아래에서 모두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메르스 때문에 수료식이 취소된 신병들은 휴가를 하루 더 준다고 했지만, 신교대에서 부모들과 만나는 기쁨과는 비교하지 못할 것이었다. 행운이 겹친 것을 기뻐하며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던 부모들 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광경이 등장했다. 심장의 박동 같은 군악대의 북이 울리는가 싶더니 선두소대가 위용을 드러냈다. 선두는 물론 뒤이어  쇄도하는 소대들도 로보캅의 무리처럼 각이 잡혔다. 너무나도 변해버린 아들들의 모습에 부모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군인으로 변신한 아들들이 처음 선보인 것은 군가였다. 소총을 파지하지 않은 손을 절도있게 위아래로 흔들며 부르는 군가는 순식간에 연병장을 압도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아들들의 동작은 강력한 최면술처럼 부모들을 매료시켰다. 멍하게 아들들을 바라보던 나도 어느새 군가를 따라 불렀다. 군가가 끝난 다음 집총제식으로 이어졌다. 집총은 더 한층 탄성을 불렀지만 이어지는 총검술은 환호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아들들이 소총을 찌르고 휘두르며 함성을 토할 때마다 부모들도 탄성을 연발하며 박수를 쳤다.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장대의 공연보다 멋있었고 어떤 특수부대의 시범보다 훌륭해 보였다.
 
통곡의 연병장, 한 달 전과는 달랐다


불과 한 달 전, 연병장은 절망과 통곡이 그득했다. <입영하는 장정들은 연병장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엄마들은 아들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포로처럼 기가 죽은 아들들이 억지로 걸음을 떼어 생활관으로 들어가는 것도 못볼 광경이었다. 작별의 비통이 곳곳에 그득하던 연병장이 지금은 찬탄과 환호가 물결쳤다. 이번에도 엄마들이 눈물을 쏟았지만 기쁨과 믿음에서 우러나온 눈물은 보기 좋았다. 아내 역시 아들에게 계급장를 달아주면서 눈물을 쏟았어도 입소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들도 그때의 서글픔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부모가 계급장을 달아줄 때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던 아들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아들들이 마지막으로 선보인 것은 분열이었다. 소대별로 분열하여 전진하면서 단상의 지휘관들을 향해 <우로봐!>를 외친 아들들이 기다리던 부모들에게 접근했다. 더욱 가열차게 땅을 구르고 팔을 흔들며 행진한 아들들이 부모들에게 경례를 선사하자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아들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대견함을 감추지 않았다. 강인하게 그을린 하나하나의 얼굴에는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군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진하게 배어났다. 신성한 의무의 초입에 들어선 아들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지날 때마다 부모들은 한껏 기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2소대에 포함된 아들이 지나쳤어도 나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후위의 소대들이 진입할 때마다 감동이 배가 되었다. 나는 마지막 아들들이 지나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박수로 격려했다.
 
아들들 가운데는 왜소한 사례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내 아들도 왜소한 편이었지만 어떤 아들은 저렇게 왜소한 몸으로 어떻게 입대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런 아들들이 지나갈 때마다  애틋함과 가련함이 쏟아졌지만 그것은 번지수를 잘못찾은 택배와 다르지 않다. 선천적으로 가혹한 조건이 부여되었어도 끝까지 낙오하지 않은 아들들에게 쏟아질 것은 애틋함과 가련함이 아니라 찬사와 칭찬이다. 첫 번째 담금질을 이겨내고 조국을 지킬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만으르도 칭찬 받을 자격이 넘친다. 그런 아들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손바닥이 박살나도록 박수를 쳐 경의를 표했다.

미리 예약한 펜션으로 데려간 아들은 먹는 것도 전투적이었다. 고기를 굽는 내가 미처 따르지 못할 정도로 잘 먹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신 어머니가 쌈을 싸주자 비로소 속도가 맞춰질 정도였다. 아들이 본래 입이 짧았다는 것과, 삼겹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먹성의 변화는 군인이 된 것 만큼이나 놀라웠다. 하나 밖에 없는 손자가 게걸스럽게 먹는 것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애틋해졌다. 씻기 위해 군복을 벗은 다음 각을 잡고 개던 모습을 바라보던 때도 어머니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기쁨과 애틋함이 교차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이던 아내가 차갑게 식혀둔 캔맥주를 건네자 아들의 눈빛이 번득였다. 간첩을 발견한 것처럼 캔맥주를 바라보던 아들이 빼앗듯 받아들었다. 허겁지겁 뚜껑을 딴 다음 숨도 쉬지 않고 캔을 비운 아들의 표정은 황홀하기조차 했다. 오래도록 마약과 격리되었던 중독자가 마약주사를 맞으면 저럴 것 같았다. 또 하나의 캔을 비우는 손자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다시 복잡해졌다.
   
아들이 각을 잡아 개어 놓은 군복에서 풍기는 냄새는 생소하고 익숙했다.  남자의 냄새인 그것은 군인의 냄새이기도 했다. 아들과 비슷한 계절에 후방의 훈련소에 입소했던 나도 저런 냄새에 찌들었으리라. 그때가 정확히 30년 전인 1985년 8월,  당장 숨을 거두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낡은 선풍기가 처량하게 돌아가던 식당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먹던 삼겹살이 지금 나온다면 식당을 고발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계절 또한 삼겹살을 먹기에 적당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삼겹살과 소주로 포식에 포식을 거듭했다. 제대로 씻지 못한 나머지 산전수전 다 겪었을 식당 아주머니가 코를 싸맬 정도였던 그 냄새가 아들에게서 풍겼다.
   
30분 일찍 아들을 들여보냈다. 당연히 서운했지만 고작 30분을 함께 있어 봤자 무엇하겠는가. 또한 내일 아침에 주특기를 배우기 위해 훈련소를 떠나 교육대로 가야 하는 만큼 일찍 들여보내 준비하는 것이 좋을 터였다. 아들이 들어간 다음 어머니와 아내가 눈물을 비 췄지만 이번에는 슬프거나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아내도 영업하는 가게로 데려다 준 다음 홀로 소주를 비웠다.

아들이 남긴 약간의 고기와 아내가 아들을 먹이기 위해 담근 열무김치와 소박이를 안주 삼아 두 병을 비웠다. 어릿하게 취한 다음 연병장이 떠올랐다. 조국과 의무를 알지 못하던 아들들이 매서운 병사로 거듭난 다음 지르던 함성 속에 아들의 냄새가 오버랩됐다.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아들이 훈련 받은 사단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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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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