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나무들

나무에 얽힌 나의 기억

등록 2015.09.18 17:35수정 2015.09.2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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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나 추상적인 감정들이 나무와 연관되어 제 기억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고향 동네 어귀의 큰 느티나무는 이별의 애틋함으로 기억됩니다. 국민학교 4학년, 대처에서의 유학을 위해 홀로 고향을 떠날 때, 그리고 고향을 방문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동구 밖을 나올 때마다 품 너른 느티나무가 저를 마지막으로 환송하며 말했지요.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을 테니 염려 말고 큰물에서 노닐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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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동구 밖, 품 너른 느티나무 ⓒ 이안수


자작나무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에서 들었던 그 꾸짖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숲을 이룬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에 달리 검은 호랑이 눈. 그 부릅뜬 눈의 시선과 대면하면서 영험한 기운을 느끼게 됩니다. 러시아의 습식 사우나 바냐에서도 잎이 달린 자작나무 가지로 온몸을 때리곤 하지요.

감정을 대변하는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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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숲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 ⓒ 이안수


참나무는 외로움을 대변합니다. 가족과 떨어져 미국 미시간주에서 홀로 생활할 때 도시를 벗어나면 주위는 구릉 하나 없는 평원이었으며 그 평원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참나무 숲이었습니다. 한국의 야산이 그립고 그 산의 소나무가 그리웠습니다. 그렇게 그립던 소나무를 만난 것은 방학 때 동부로 여행하면서 대서양에 가까운 매사추세츠주에 당도했을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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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호수 너머의 숲은 온통 참나무입니다. ⓒ 이안수


가문비나무는 두려움입니다. 북미를 자동차 없이 장기간 여행하면서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했습니다. 열차와 버스는 물론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기 다른 교통수단들을 히치하이크하기도 했지요. 캐나다 동북부의 래브라도와 노스퀘벡의 숲을 통과하는 일이 큰일이었습니다. 수많은 호수와 가문비나무숲으로만 이어진 800km쯤의 외길에는 통과차량도 거반 없었기 때문에 히치하이크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날은 저물고 여우는 제 주위에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가문비나무숲 속에는 야생곰을 비롯한 다양한 맹수들이 살고 있습니다. 야영 장비도 없는 상황에서 해가 저문 호수는 블랙홀처럼 검었습니다. 야생에 낙오된 채 홀로 밤을 맞는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준 존재가 검은 거인 가문비나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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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홀로 대면했을 때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일깨워준 검은 거인, 가문비나무 ⓒ 이안수


바오밥나무는 경외심입니다. 처음 바오밥나무와 대면했을 때는 마치 태평양에서 수영하다가 지구 상에 현존하는, 또한 역사상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큰 '흰긴수염고래(대왕고래)'와 마주한 것처럼 경이로웠습니다. 지름이 15m나 되고 둘레가 50m나 되며 6천 년이나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신성을 지니지 않았겠는가. 저는 그날 밤 바오밥나무를 돌고 또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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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이 양팔을 뻗어도 다 감쌀 수 없는 둘레, 거대한 아나콘다가 얽혀있는 것처럼 땅위로 모습을 드러내 뿌리의 근육질. 바오밥나무는 경이로운 존재였습니다. ⓒ 이안수


카멜손트리(camel thorn trees)는 초극(超克)를 일깨웁니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물을 찾아 사막 아래로 수백 미터 뿌리는 뻗는 나무의 의지는 거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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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생존.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경이로운 아름다움입니다. ⓒ 이안수


모티프원의 정원에 꽃보다 나무가 많은 이유는 나무와의 각별한 인연에 대한 예의입니다. 느티나무, 자작나무, 은사시나무...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간직한 채 함께 어울립니다.

하지만, 대자연 숲 속에서의 만나는 나무와 달리 실내에 들어와 책장이 되고 책상이 된 나무는 섹시합니다. 어떤 미인의 얼굴보다도 청초하고 아기의 피부보다 고운 결로 우리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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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조차도 창조적인 나무 ⓒ 이안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안수 시민기자의 <모티프원의 블로그>(www.travelog.co.kr)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무 #느티나무 #바오밥나무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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