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도둑에게 쓴 편지내가 어떤 마음으로 파출소에 도난 신고를 했는지 편지로나마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송은미
사연인즉, 남편이 첫째와 놀다가 어떤 여자가 초록색 우산을 가지고 나가려고 하기에 우리 우산 같은데 본인 것이 맞느냐고 물었단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우산이 맞다고 해서 그냥 보냈단다. 남편은 '우리 우산이 따로 꽂혀 있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옆에서 사정을 들은 농협 직원이 우산을 줄 테니 쓰고 가란다. 우리 우산이었으면 그냥 '오늘은 운이 좀 나빴어.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한 셈 치자' 이랬을 텐데... 하필 아끼는 후배가 두고 간 우산이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순간, 농협 입구에 달린 CCTV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CCTV를 보고 싶다고 하자, '확인해서 뭘 어쩌시려고요?' 하는 농협 직원에게서 약간의 귀찮음이 묻어나왔다. 모르겠다, 나는 그 순간 '분노'의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것 같다.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우산 없이 걷는 사람들도 보이는데 뭘. 비슷한 우산도 없는데 신랑이 물어봤을 때 거짓말까지 하다니! 고의성이 다분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얼굴이라도 확인하자!'CCTV를 확인하니 그 여자가 가져간 것이 맞았다. 인출기 앞에 서서 우산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우산꽂이에서 초록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남편이 덧붙인다. 우산을 가져간 그 여자가 내 오른쪽에서 은행 업무를 보았다고 말이다. 은행 내부 CCTV와 고객 정보를 확인하면 우산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은행 측에서는 개인 정보를 함부로 내줄 수 없다며, 파출소에 신고하라고 했다.
순간 고민이 됐다. 남편이 귀중한 점심 시간을 쪼개서 나온 건데, 파출소까지 들르면 점심도 거르고 복귀해야 한다. 첫째도 얼른 집에 가서 점심 먹이고 낮잠 재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순간 귀찮음도 느껴졌다.
'귀중품도 아니고 우산 하나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냥 비슷한 우산 하나 사주고 말까?' 그 순간 도벽이 있었던 어릴 적 친구가 떠올랐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내 방에 있던 저금통과 문화 상품권을 모조리 가져갔던 그 아이. 나는 어린 마음에 무척 속상했지만 언젠가는 뉘우치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그 친구의 도벽은 멈출 줄을 몰랐고, 나는 서서히 친구와 멀어졌다. 우산 도둑이 어려 보였다는 남편의 말을 듣자 어릴 적 친구와 CCTV 속 우산 도둑이 오버랩되었다. 이내 내 안의 숱한 고민은 사라지고, 활활 타오르는 정의감만 남았다. 파출소에 가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근처 파출소에 가서 도난 신고서를 작성했다. 일련의 과정을 글로 쓰다 보니, 우산 도둑을 잡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옆에서 도와주던 경찰관도 '이것은 절도죄다. 법대로 처리해달라고 덧붙여라'고 맞장구를 쳐주니, 정말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신랑에게 '그 여자가 꼭 잡혔으면 좋겠다, 잡히면 세상의 모든 도둑에 대한 경고로 기사나 써볼까 보다' 하고 들떠서 재잘거렸다(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더니, 1년이 지난 지금 도둑들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쓰고 있다!).
며칠 후, 담당 형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우산을 훔친 그 여자가 지금 파출소에 와 있단다. 뭐랄까? 나는 굉장히 기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형사가 '신고를 한 사항은 검찰에 넘어 가게 되었다, 합의서를 쓰면 검사가 정상 참작해 기소유예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고 줄줄 말하는데 머릿속이 띵했다. 내가 이 무슨 엄청난 짓을 한 걸까? 형사가 그 우산 도둑을 바꾸어 준다.
"많이 놀라셨죠?"가소롭게도 내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이다. 절도죄로 신고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위로하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우스웠다. 우산 도둑도 흐느끼면서 자기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후회했다, 잘못했다고 말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랴? 합의서를 쓰고 우산을 돌려받기 위해 경찰서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법정 스님의 일화가 떠올랐다. 법정 스님이 쓰신 <영혼의 모음>이라는 책에 법정 스님께서 아끼던 탁상 시계를 훔쳐간 도둑을 청계천 시계 상가에서 마주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법정 스님은 당황했지만, 곧 도둑을 외면해 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기보다는 흐트러지려는 나를 내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라고 하셨다. 이 부분에 감동해 공책에 옮겨 적기까지 해놓고, 나는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우산 도둑과 통화하고 난 새벽녘에 잠에서 깼는데,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의감에 활활 타오르던 나는, 우산을 훔친 그 도둑에 빙의돼 버렸다. 스무 살이라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얼마나 야속하고 미울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절도죄이지만 초범이고 죄질이 가벼운 편이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으면 신원조회를 해도 그 내용이 뜨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내가 우산을 쓰고 다시 차에 두었더라면, 그 날 산모 수첩을 못찾아 허둥대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한 번 더 우리 우산이 맞는지 확인했더라면, 파출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그랬더라면'을 뒤로 한 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불현듯 박웅현이 쓴 <여덟 단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완벽한 선택이란 없습니다. 옳은 선택은 없는 겁니다. 선택을 하고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나는 이미 절도 신고라는 선택을 해버렸고 그 결과를 받았다. 이 선택에 대한 후회로 괴로워하기보다는, 이 선택이 최선으로 남을 수 있도록 고민하기로 했다. 괴로운 마음과 미안함을 담아 우산 도둑에게 편지를 썼다. 무려 세 장이나 쓴 내 편지를 본 남편이, 자기는 나에게 최대 2장짜리 편지만 받아보았다며 입을 샐쭉거렸다. 편지만 주기 뭣해서 당시 내 인생에 커다란 지침이 된 <여덟 단어> 책도 선물로 주려고 샀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경찰서로 향했다.
만나고 보니, 그냥 평범한 스무 살 여대생이었다. 죄송하다고 계속 말하는 학생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랴? 나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고 사과하고 우산을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게요, 제가 찾아봤는데 우산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제가 돈이 없어서요. 아르바이트비 받고 나서 우산값 계좌 이체 해드리면 안 될까요?"잔잔했던 내 마음에 돌연 깊은 '분노'가 다시 샘솟았다. 진짜로 미안했으면 돈을 꿔서라도 우산을 사 왔겠다며, 진짜 반성하고 있는 거 맞느냐고 잔소리 삼단 콤보를 마구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법정 스님처럼 용서하자고 다짐했기에 꾹 참았다. 우산값을 대신한다 생각하고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라며 여덟 단어 책과 편지를 주고는 경찰서를 나왔다. 나중에 형사로부터 그 학생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그 우산 도둑과 나의 인생에는 하나의 점이 찍혔다. 그 점이 아름다운 별이 될지는 앞으로 각자의 행동과 노력에 달려있겠지. 우산을 훔쳤던 그 학생이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지는 그 학생의 과제다. 우산 하나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 나를 원망하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 일을 계기로 좀 더 현명하고 떳떳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학생의 선택일 뿐, 내가 그 학생의 인생에 개입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 또한 그 일로 참 많은 인생 공부를 했다. 처벌과 정의보다 자비와 용서가 더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단순히 겁을 주려고 했던 신고가 불러온 큰 파장을 경험하고 나니, 앞으로는 어떤 선택을 하든 매사에 좀 더 신중하겠노라 다짐했다.
사실 그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착잡하다. 가끔 파출소에 도난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다 부질 없다. 법정 스님이 왜 그 시계 도둑을 그냥 돌려보내셨는지, 이제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할까? 아이고, 그건 생각하기도 싫다.
1년 전 그 당시, 공부 모임 카페에 내가 겪은 일을 글로 올렸다. 다음은 원래 초록 우산의 주인이었던 후배와 주고 받은 댓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