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공천할 수 있다면 정당은 필요없다"

[인터뷰] <정당의 발견> 펴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등록 2015.10.08 10:12수정 2016.03.2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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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오마이뉴스] 요즘 진행되는 공천을 보고 있노라면 '정당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정당의 주인은 당원입니까? 아니면 여론조사업체입니까? 아니면 공천을 심사하는 외부전문가들입니까? 이 질문과 관련, <오마이뉴스>가 지난해 10월 8일 보도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정당의 발견> 등의 저자)의 인터뷰 기사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 편집자 말은 2016년 3월 22일에 썼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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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 남소연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줄곧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연구주제로 삼아왔다. 그에게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챔피언"이다. 정당이 현대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최근 펴낸 <정당의 발견> 등 저서와 칼럼을 통해 "좋은 정당이 좋은 정치를 만들고,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설파해왔다.

"좋은 정당 없이, 정당의 대중적 조직화 없이, 이른바 국민 일반의 참여만으로 민주주의가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망상이 아닌가 싶다. 그런 망상은 권력자원, 학력자원, 미디어자원을 많이 가진 엘리트들의 자기 오만일 때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정당의 발견>, 223쪽)

그런 점에서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바라보는 박 학교장의 시선은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이 공천이라는 주요한 자기 기능을 포기했고, 최고의 정치적 결단을 테크놀로지(technology)에 의존했다"라는 이유에서다.

"정당이 필요 없는 공천제를 합의하다니..."

지난 5일 정치발전소 사무실에서 만난 박상훈 학교장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정치발전에는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들이 함부로 시도되고 실천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라며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한국정치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여야 대표가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유선전화 여론조사의 오류를 없애기 위해 이동통신사가 제공하는 가상의 전화번호(임시 안심번호)로 경선후보 여론조사를 실시해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제도다. 과거 한나라당에서도 도입한 바 있고, 중앙선관위에서도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박 학교장은 "안심번호에는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모른다는 기술이 있어서 그 기술을 쓰면 국민이 참여하는 공천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류가 없어진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라며 "공천이라는 최고의 정치적 결단을 테크놀로지에 의존해 해결하는 방식은 위험하다"라고 지적했다.


"정치는 첨단기술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결할 수 없다는 딜레마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다. 테크놀로지로 정치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술전체주의적 정치이지, 민주주의는 아니다."

박 학교장은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실시한다면 그것은 여론조사로 공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라며 "여론조사는 (표본오차 등)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오류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서 더 위험하고 나쁜 제도다"라고 주장했다.

박 학교장은 "오픈 프라이머리는 국민이 현장에 가기라도 하는데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기술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서 오픈 프라이머리보다 훨씬 위험할 수 있다"라며 "기술에는 정치적 편향성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기술의 초당성은 있을 수 없다. 기술에는 정치적 편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인터넷을 활용해 비례대표를 공천한 것이 한국정치를 망친 대표적인 사례다. 인터넷 기술을 이용하면 현장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것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공천처럼 죽고 살기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당은 책임있게 공천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장 중요한 기능을 포기하고, 여야가 정당이 필요 없는 공천제를 합의한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국민참여경선'이라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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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지난 9월 28일 낮 부산 롯데호텔에서 전격적으로 만났다. 추석을 맞아 부산을 찾은 두 대표가 총선과 관련한 오찬회동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새누리당은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주자'는 명분을 내세워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를 강하게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문재인 대표와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2002년 '노무현 바람'을 만들어낸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은 이런 '국민공천' 방식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아 왔다.

하지만 박 학교장은 "당시 민주당 안에서 결정권을 가진 동교동계에 도전하는 신진그룹이 생겼는데 그들은 당원의 신망을 얻어 다수가 되려고 노력하기 보다 조직 자체를 없애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정당 안의 권력자원은 적지만 미디어나 여론에서의 권력자원은 많은 명사들이었다. 그래서 동교동계가 가진 정당 안의 조직자원을 없애면 여론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당과 (당원) 공천권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국민참여경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박 학교장은 자신의 저서 <정당의 발견>에서도 "(국민참여경선제, 완전국민경선 등) 이러한 변화가 계속된다면 결국 당원과 대의원을 포함해 당 조직의 역할이 줄어들게 될텐데, 그럴 경우 정당의 역할은 간헐적으로 선거 시기에만 작동하는, 공직후보 선출을 관리하는 기구에 불과하게 된다"라고 꼬집었다.

"정당 조직의 역할이 줄면 당 밖의 일반시민의 영향력이 커질까? 형식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일반시민이 아니라 동원된 시민과 이들을 동원한 정치엘리트 개개인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선거운동은 정당조직이 아닌 후보 개인의 캠프와 사조직이 주도하고, 당선 뒤에도 정당조직과는 무관하게 개인 통치자 내지 정치 엘리트 개개인으로서 활동하는 경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정당의 발견>, 24-25쪽)

"완전국민경선제를 하고 시민에게 공공정책의 결정권을 돌려준다고 했던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실험은 살펴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결과는 어땠을까? 정당체제가 붕괴되고 포퓰리즘이 심화되고 감세에 따른 재정 붕괴가 이어지고 그 고통은 전기, 수도, 공교육 분야에서 하층의 시민들에게 집중적으로 전가되었다. 공직후보와 정책, 법안을 정당정치의 매개 없이 시민들에게 직접 결정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정당의 가장 큰 역할은 '선택을 구조화하는 것' 즉 '대안을 정의해주는 것'에 있다."(<정당의 발견>, 177쪽)

박 학교장은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신진그룹이 제대로 하려고 했다면 동교동계보다 더 큰 당내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라며 "하지만 그들은 당내 의견구조보다 여론 의견구조에 따라 정치하는 게 유익하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했다.

"정당 안에서 신망을 얻어 공천받고, 의정활동을 잘 조직하면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했는데, 그것을 방기하고 '여론시장에서 더 많이 지지받을 수 있나'에만 열중했다. 그 바람에 조직(정당)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긴 노력을 피하게 됐다. 또 정당의 조직적 기반은 약화되거나 해체됐고, (시민들이 관전만 하는) 청중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가 심화됐다."

"국민이 공천할 수 있다면 정당은 필요 없어"

박 학교장은 "국민공천제, 당원공천제로 나누고 국민공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개념적인 사기행위다"라며 "정당에서 공천하는 것이 국민 의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을 대표할 정당을 조직해서 공공정책의 결정권자나 정부의 운영권자를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현실'이기 때문에 국민이 직접 공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국민들이 직접 공천할 수 없어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 유권자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국민은 (최종적인) 주권자가 되고 싶지 정당이 이리저리 동원하는 소모품이 되고 싶겠나? 정당이 시민들의 의견을 조직화해서 이것을 대표하게 해야 한다. 국민이 공천할 수 있다면 정당은 필요없다."

박 학교장은 "차라리 정당과 선거를 없애고 중앙선관위에 국민여론조사센터를 만들거나 기업들이 주식시장을 열듯 정치주식시장을 열어서 인기가 높거나 주가가 높은 사람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뽑으면 될 것이다"라며 "그게 가능하다면 뭐하러 정당을 만들고 선거하나?"라고 꼬집었다.

"민주주의를 시민의 선호를 반영하고 대표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때의 민주주의는 시장체제처럼 작동해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면 복잡하게 정당정치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시민의 의견을 물어서 결정하는 방식, 즉 여론조사로 대표를 뽑아도 되고, 주식시장을 열어 개별 정치인에 대한 평가와 책임을 물으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경제나 여론조사의 경우 행위자의 선호는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지만, 민주주의 핵심은 '시민의 선호란 정치과정을 거치며 형성'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정당의 발견>, 174쪽)

박 학교장은 "특히 당원을 기득권자로 봄으로써 당원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 한국정치의 담론이 돼 버렸다"라며 "이렇게 당원도 모멸받는 구조 속에서 계파들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한국정치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박 학교장은 "민주화를 했으면 권위주의 정당체제를 민주적 정당정치로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 과정을 힘들게 치르기보다는 여론시장 정치로 전환시키면서 조직적, 대중적, 사회적 기반을 스스로 허물었다"라며 "여론시장에서 '한방에' 무엇을 하려고 함으로써 민주적 정당정치의 전망은 더 나빠졌다"라고 진단했다.

박 학교장은 "정당 안에서 신뢰를 얻고 실력을 인정받아 공직후보로 나가 시민들로부터 최종 평가받는 것이 민주주의다"라며 "정당 안에서 상향적으로 정치가를 길러내는 과정을 만들지 못한 채 매번 제도를 바꾸어 계파나 도당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상을 반복하면 안된다"라고 주문했다.

"전략공천은 하향식이고, 국민공천제는 상향식이라고 하는 것도 말장난이다. 정당 안에서 실력과 신망을 가진 사람이 성장해서 공천받는 것이야말로 상향식이다. 국민이 공천해야 상향식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정당이 왜 있어야 하나? 지금 논의되고 있는 상향식도 아니고 계파나 도당들의 권력투쟁일 뿐이다."

"초선의 패기로 정치가 다 해결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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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최근작 <정당의 발견> ⓒ 구영식

향후 예상되는 여야 물갈이 경쟁과 관련, 박 학교장은 "물갈이를 주장하는 무의식 속에는 '오래 자리잡고 있으면 타락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라며 "냉정하게 말하면 '인간은 늙는다'는 것과 같아서 의미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 자리를 유지하게 한 부작용을 제어하면서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쌓게 된 지혜와 실력을 어떻게 유익하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정치다. 재선되고 3선되면 기득권을 챙긴다? 그것은 인간을 못믿는 사람들의 심리다. 그렇다면 초선의 패기로 정치가 다 해결되는가?"

박 학교장은 "물갈이를 하냐 안하냐가 핵심이 아니라 오랫 경험과 지혜를 조직 안에서 활용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며 "대중적 기반과 책임성을 넓히면서 새로운 엘리트들을 충원하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이어 박 학교장은 "당을 개방적이고 대중적으로 만드는 방법에는 많다"라며 "당원을 교육하고, 동호회를 조직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법률상담도 하고, 당의 생활적 기반을 위해 공제조합도 만들고, 노동기반을 넓히기 위해 지역노조와 협력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라고 일갈했다.

"지난 여름에 독일에 가서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사회 기준으로 보면 기민당은 보수정당이다. 그런데 기민당에는 당원과 비당원이 다 참여할 수 있는 전국적 대중조직이 38개나 있었다. 이 대중조직들을 통해 당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었다. 보수정당조차도 대중적 기반을 위해 대중조직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말로만 '개방한다'고 한다. 이것은 허상이다."

박 학교장은 "지금 재래시장에는 야당이 없다"라고 지적한 뒤, "시민생활과 무관하게 여론시장에만 매개되거나 시민 대중 속에 정당이 없으면 명사정당이나 엘리트 정당이 된다"라며 "민주적 대중정당이란 그런 정당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 속에서 정치적으로 역할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박 학교장은 "그런 성과가 선거에서 실현되는 것이 진정한 상향식이고 그런 것을 국민공천제라고 불러야 한다"라며 "당원, 지지자, 관심층을 폭넓게 조직하는 일은 하지 않고 '공천을 당원이 결정하냐, 국민이 결정하냐'에만 매달리는 것은 허상이다"라고 거듭 지적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박상훈 #정당의 발견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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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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