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한국사) 교과서들.
김종성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역사교육의 획일화가 어떤 피해를 주는지 보여주는 가까운 사례가 있다. 바로, 조선시대 역사교육이다.
조선시대는 유교주의 시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유교는 정계에 진출했거나 정계 진출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사상이었을 뿐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 사상은 아니었다. 유학은 유학자들만의 사상에 불과했다.
민간에는 불교 신앙을 숭배하는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또 한국의 전통적 신앙인 신선교(신선도·선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선교는 인간과 하늘이 하나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이룬 초월적 존재인 신선이나 선녀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신앙이다.
신라 화랑과 고구려 조의선인과 고려시대 재가화상 등이 신선교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마저도 시를 쓰거나 대화할 때마다 툭하면 신선을 언급한 것은 신선교 사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반영한다.
이렇게 유교 이외의 사상이 민간에 퍼져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유교는 조선시대 사상계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를 대표하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자신들이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유학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래서 신선교나 불교는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고대사에 무지했던 '조선 엘리트'유학자들의 배타성은 역사교육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그들은 '유교 위주, 중국 위주, 남성 위주, 농경지대 위주'의 역사관을 신봉했다. '농경지대 위주'라는 것은 농경민족만을 문화민족으로 인정하고 유목민족은 야만족으로 천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유학자들은 역사교육이 다양한 관점으로 시행될 경우에는 자신들이 사회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고 믿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담은 획일적 역사교육이 시행되어야만 자신들이 사회를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를 압박했다. 유교주의 역사교육을 획일적으로 시행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 점은 세조 3년 5월 26일자(양력 1457년 6월 17일자) <세조실록>과 예종 1년 9월 18일자(1469년 10월 22일자) <예종실록> 등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고조선비사><삼성기><삼성밀기>를 포함한 다수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 책들을 몰수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금서를 숨긴 자는 참수형에 처했다. 금서를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구덩이에 매장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유사한 일이 조선에서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