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에 더께처럼 앉은 이끼가 더 오래됐을까, 아니면 정겹게 도시락 나눠먹으며 기차를 기다리는 노부부의 나이가 더 많을까? 책 <규슈 올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진이다.
중앙북스 제공
아이가 요즘 탐독하고 있는 건 웬만한 영어 사전 두께인 1000쪽이 넘는 유럽 여행안내서다. 한 달여 전 네덜란드 왕복 항공권을 끊으면서 또 그렇게 사들인 책 중 하나다. 이미 얇은 책 몇 권은 독파한 상태다.
떠나려면 앞으로 석 달 가까이나 남았는데, 사달라고 해도 더 이상 사줄 책이 없다. 해당 지역 관련 여행안내서는 이미 동이 났다. 아내는 슬그머니 책은 됐고, 그 나라에서 제작한 영화나 EBS <세계테마기행> 등 관련 영상을 찾아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이는 책들을 다 읽고 나면 이따금 출판사별로 '품평'을 내놓곤 한다. 언젠가는 시중 여행안내서들 중에는 인터넷 블로그 등에 이미 올라와 있는 자료들을 짜깁기한 것들이 적지 않다면서 그 책을 낸 출판사 서적은 앞으로 사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나물에 그 밥'인 시중의 책들과는 다른 '진짜' 여행안내서를 써보고 싶다는 바람도 이야기했다.
이미 열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경험한 아이에게 시중 여행안내서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여행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최신'이라고 표지에 밝혔으면서도 막상 살펴보면 몇 해 전 정보와 똑같은 사진과 내용이 더러 있다는 게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중국과 같은 경우는 워낙 지리적 환경의 변화가 빨라서인지, 여행안내서가 그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단다. 하긴 책 내용을 철석같이 믿고 시간 계획을 짰다가 외국에서 몇 차례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억울해한 적이 있다.
또, 천편일률적인 내용 구성도 마뜩잖다고 했다. 출판사마다 표지와 디자인만 다를 뿐 나머지는 한 사람이 쓴 것인 양 똑같다고 혹평했다. 아이는 '주요 관광지'를 소개해 놓고 동선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 사람들마다 기호가 다르고, 여행 목적도 각기 다를 텐데, 안 가보면 후회한다며 '핫스폿'(Hot Spot) 운운하는 건 가르쳐준 대로 여행하라는 것밖에 더 되냐는 입장이다.
하긴 우리 가족 안에서도 이번 겨울 네덜란드 여행의 목적이 서로 달라 일정을 짜는 데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내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맥주의 나라'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면적의 절반도 안 되는 두 나라에는 수천 종이나 되는 다양한 맥주가 생산되고 있다. 흔히 물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신다고 알려진 나라들이다. 보름간의 일정 동안 최대한 많은 종류의 맥주를 맛보는 것이 나의 여행 목적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렘브란트와 고흐로 대표되는 미술관들을 샅샅이 뒤져보고 싶어한다. 값비싼 입장료를 감안해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에 한 곳씩 느긋하게 섭렵하자는 쪽이다. 아이의 생각은 또 다르다. 아이에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축구 왕국'이다. 현지에서 축구 경기를 직접 관람했으면 하는 눈치다. 네덜란드 축구팀의 광팬이기도 한 아이는, 현재 벨기에가 FIFA 랭킹 세계 1위로 올라섰다며 떠나기도 전에 흥분해 있는 상태다.
요컨대, 아이의 바람은 '자칭' 소박하다. 사람들의 다양한 기호를 반영한 주제별 여행안내서가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말로는 자유여행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써놓고는, 실제로는 단체 패키지여행 코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꼬집은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여행안내서들이 다녀왔다는 증거라도 남길 양 관광지 앞에서 우르르 사진만 한 장 찍고 부리나케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한국인들의 해외여행 행태를 조장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규슈의 재발견, <규슈 올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