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도 없이 떠난 친구, 이젠 조금 알겠어요

[책 읽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 찬찬히 들여다보기 ②] 학교, 머물고 싶은 공간일 수는 없을까?

등록 2015.11.03 21:24수정 2015.11.0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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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가 고등학교와 무엇이 다른가 하고 물어 봤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의 대답이 참 기발하네요. "수업이 아니라 강의를 하는 곳", "교사가 아니라 교수가 가르치는 곳", "1, 2, 3, 4, 5, 6, 7교시에 보충1, 야자1, 2가 아니라 1, 3, 5 정도 하고 마는 곳", "여름 두 달 겨울 두 달, 방학이 넉 달이나 되는 곳", "야자 없는 곳, 당연히 보충도 없는 곳". 하지만 단연 시선을 모은 대답은, "외출증 없이 교문을 나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고등학교를 다녀 본 사람이면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절감할 거예요. 수업 시간이야 억지로라도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치더라도, 정규수업이 끝났는데도 보충이다 야자다 하며 잡아 놓으면, 몸에 쥐가 나거든요.

그래서 담임선생님한테 집에 빨리 가겠다고 찾아가면 반응이 어떤지 아세요? 차갑고 냉정하고 무정하고 야속하고. '으휴, 그래, 앓느니 죽자!' 하며 가던 발걸음 돌린 경우가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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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담하기 좋은 곳 친구들은 ‘자유’를 누리고 싶을 때 이곳으로 옵니다. 때로는 더욱 혹독한 ‘구속’을 각오하면서요. 걸리면 죽거든요. ⓒ 박진형


꾀병이 아니었는데, 교문 밖으로 나가니 정말 나았어요

사고가 터졌어요. 친구 중 한 명이 아프다고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겨우 선생님한테 조퇴증을 끊어 집에 갔어요. 그런데 그냥 가만히 계실 일이지, 담임이 걱정스러워 집으로 전화를 했나 봐요. 운명의 장난일까, 엄마라도 받았으면 둘러대 주기라도 하셨을 텐데. 하필이면 동생이 받아 "형이요? 안 아파요. 지금 방에서 게임하고 있어요"라고 대형사고를 쳤지 뭡니까.

아, 그렇게 천진난만한 동생의 이실직고가 있던 다음날,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담임한테 불려가서 몹쓸 소리 듣고 벌까지 섰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계속 그러는 거예요. 학교에서는 분명히 아팠다고. 그래서 학교를 나가서 집으로 갔다고. 그랬더니 앓던 병이 싹 다 나았다고. 그 말을 하며 그 친구는 담임한테 더 혼이 났지요. 하지만 친구 표정이 너무 진지했어요. 그래서 알아보고 싶어졌어요. 정말일까? 저 말이 사실일까?

그런데 의외의 사실이 드러난 거예요. 그 친구 하나만 그런 경험을 한 게 아니었어요. 몸이 아파서 조퇴를 하는 경우, 보통은 동네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약 먹고 한숨 자면 괜찮아져요. 아직 젊으니까요. 하지만 같은 경우이지만 특이한 경험을 한 친구도 여럿 있었어요. 바로 학교 밖으로 나가자 앓던 게 싹 낫더라는 거예요. 도대체 이 친구들의 병이 낫게 된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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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병 조퇴 많은 분들이 아픈 척하고 조퇴를 해 본 적이 있대요. 세대 간, 격한 공감대 형성! ⓒ 박민기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

이 문제를 가지고 처음에는 학교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그런데, 아, 한 시간 넘게 훈계 말씀만 듣고 왔어요. 학생이 학교를 싫어하면 어쩌냐시면서, 아, 죽는 줄 알았어요. 갈 곳이 없었어요. 또 훈계 말씀 듣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동아리 선생님한테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그분이 툭 한마디 던지셨어요. 늘 그렇듯이!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주나 보지, 뭐."
"뭐요?"
"한번 찾아봐."

그러고 끝이었어요. 그런데 그 말이 왠지 허투루 들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다, 오, 우리는 중세 농노들이 근대의 부르주아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만든 '농노들의 해방구' 도시를 만나게 되었지요.

중세의 농노들은 영주의 장원에 묶여서 꼼짝도 못했대요. 그러다가 상업이나 수공업을 통해 경제력을 가진 농노들이 영주에게 지대(地代)를 돈으로 바치면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성곽을 쌓고 생활하며 스스로를 '부르주아지', 곧 '성곽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대요. 도시민이 탄생한 거죠.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대요. 어떤 신분이라도 이 도시에서 '1년 1일'을 거주하면 그 사람은 자유를 얻었다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도 중세 농노와 다를 바 없다, 뭐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영주의 통제 아래에 있던 농노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듯이, 우리도 학교에서 그런 기분이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요.

학교 안에서는 끙끙 앓다가도 학교 밖으로 나가면 앓던 병도 싹 낫는다는 사실은, 1천 년 전에 영주의 장원을 나서던 중세 농노가 이미 경험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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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길이 있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 더 깊어졌고 조금 더 넓어졌습니다. 세상을 거꾸로도 보게 되었고요. ⓒ 하지우


서로의 마음이 궁금해져서 책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을 더 가다듬기 위해 책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시내 서점에 가서 몇 권 사고, 인터넷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더 골랐습니다.

김인성의 <청소년 심리학>(2013)은 제목이 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에서 '사회'로 건너가는 중간쯤에서 '친구'와 만나고 있는 게 청소년 시기인지라, 그 친구를 아는 게 소중할 것 같아서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친구'를 읽었고, '친구를 둘러싼 학교'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중세 농노에게 도시가 주는 자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집단적인 것으로 그들이 스스로 획득한 특권이었지만, 교문 밖에만 나가면 앓던 병도 싹 낫는다는 식의 우리의 자유는 '포기'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우리는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생각은, 월담으로 얻은 자유가 포기라면, 자퇴로 얻은 자유도 포기이고, 자살로 얻은 자유도 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지요.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는 친구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깨닫게 되었어요.

사실, 우리는 지난해 사랑하는 친구 하나를 먼저 떠나보냈거든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그래서 우리가 반장으로 선출했던 친구였는데, 흔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훌쩍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떠드는 아이 적어내라는 담임 말씀에 그는 아이들 이름을 적어서 담임에게 건네곤 하였을 뿐인데, 그 일을 놓고, 어느 날부터 우리는 그를 '데스노트'라고 놀렸었지요. '데스노트'는 오바타 다케시의 원작 만화의 제목으로, 노트의 소유자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노트였어요. 그런데, 그는, 자기, 이름을, 데스노트(Death Note)에, 스스로, 적고, 떠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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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잠들어 있는 곳이지요. "미안하다, 친구야!" 친구가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 다시 찾아가서, 이 말밖에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 추관식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우리는 울었습니다

<청소년 심리학>에 나온 이야기인데, 미국의 셀리그만이라는 학자가 이런 실험을 하였대요. 개를 상자에 넣고 전기 충격을 주었을 때, 그 상자로부터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측정하는 실험이었죠.

그런데 어떤 개는 전기충격이 주어져도 도망치기는커녕 상자 안에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더래요. 왜 그럴까 하고 알아보았더니,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전기충격'을 사전에 경험한 개는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더래요. '뭘 해도 소용이 없다'는 무력감, '결과 없는 노력'이 가져다 준 체념이 그 개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맞아요.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전기충격'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어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 '주인공 한스'를 만든 게 바로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전기충격'이었구나 하고 느꼈으니까요.

<청소년 심리학>의 저자 말대로 "인간관계의 기본은 모자관계"이지만, 학교에서 인간관계의 기본은 '교우관계'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친구를 데스노트라고 놀리며 전기충격을 가했고, 그 뒤에서 어른들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지켜만 보신 거예요.

"틀에 박힌 교육은 당연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매력을 잃도록 만들기 마련이다"라는 한스의 말은 그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말입니다. 한스가 좋아하는 것은 낚시였는데 '부모'와 '목사'와 '교사'의 희망대로 그는 다른 것을 포기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신학교에 진학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는 천천히 무너졌고 어느 일요일 강물에 휩쓸려, 다음 날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요. '부모'와 '목사'와 '교사'는 한스에게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전기충격'이 아니었을까요?

한스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사고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친구도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요. 아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왜 친구가 그런 방식으로 교실 문을 열고, 학교 교문을 벗어나서, 저 멀리 떠났는지를. 우리는 헤르만 헤세의 다른 책 '데미안'을 읽으면서, 한스에게도 데미안과 같은 조력자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떠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만약 우리가 그를 좀 더 챙겨 주었더라면 그런 비참한 결과를 그가 과연 맞이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우리가 그 친구에게 '데미안'이지 못한 게 한없이 괴롭고 힘들었어요. 그와 '마지막 밤'을 함께한 친구들도 그래서 더욱 비통해하는 거예요. 아니, 아니, 아니, 우리 학교가, 우리 사회가, 그 친구에게 '데미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몹시 화가 나기도 하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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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없는 자리 친구가 떠난 곳에서도 우리는 잘 먹고 잘 놀며 잘 살고 있습니다. ⓒ 박진형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미안이 친구 싱클레어에게 보낸 '그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알은 스스로 안에서 깨뜨리면 '생명'으로 성장하지만, 밖에서 깨뜨리면 '죽음'일 뿐이에요. 특히,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전기충격'으로 밖에서 깨뜨리면 그냥 죽음이죠, 죽음.

우리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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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은, 사랑해여수 6기! 인사드립니다. 박진형, 김명지, 박민기, 추관식, 하지우 기자입니다. ⓒ 김진우


▲ 살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은, 사랑해여수 6기!  인사드립니다. 박진형, 김명지, 박민기, 추관식, 하지우 기자입니다. ⓒ김진우

(기사 작성 : <사랑해여수 6기> 박진형, 김명지, 박민기, 추관식, 하지우 기자)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우리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입니다. 하지만 학교는 언제부터인가 ‘몹시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되고 말았어요. 핀란드에선가는 말을 안 듣는 자녀에게 부모가 이렇게 말한답니다. “너, 말 안 들으면 학교 안 보낸다.” 그러면 아이는 깜짝 놀라 부모 말을 잘 듣게 된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화(神話)이지요. 하지만 이 신화가 우리 현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면 안 될까요? 스스로 학교를 그만 둔 친구들과 스스로 이 땅을 떠난 친구들한테, 너무 미안해서요.
#사랑해여수6기 #친구 #데스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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