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제석사 해봉스님 열반에 들어

철거 안 된 유일한 사찰... 신도 및 계룡시민 품에 돌려줘야

등록 2015.10.28 18:15수정 2015.10.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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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해봉스님 ⓒ 조성우


계룡산 제석사 해봉(서용준) 스님이 99세의 나이로 지난 14일 오전 9시 30분 부처님 품으로 입적했다. 10월 18일 금산 신안사에서 다비식이 있었으며, 사리 모양도 다종다양하게 53과가 나왔다.

해봉스님은 하루에 새벽 3시부터 도량예불을 시작하여, 5시부터 법당에서 금강경 독송 등 새벽 예불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저녁 예불까지 평생을 흔들림 없이 수행했다. 중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국수만 들었고, 오신채(파(양파), 마늘, 부추, 다래, 흥거(무릇))와 육류는 물론 우유도 들지 않았다.


공양시간도 정해져 있어 이 시간에 공양을 못하면 다음 공양시간까지 공양을 하지 않는 등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계룡산에 입산한 지 70여 년, 제석사에서 40여 년 간 국수만 들며 민간인 통제지역 산 중에서 한평생을 국태민안과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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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다비식을 마치고 귀환 ⓒ 조성우


또한 스님은 한 평생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다. 한 신도는 "4년 전(2012년 12월) 어느 일요일 해봉스님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해 의료진을 부르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신도 중 예비역 간호장교 출신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겼다"며 "입적을 앞두고 당시 그 응급처치를 했던 신도를 찾았을 뿐 어느 의료진도 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달 18일 해봉스님의 유해는 다비식장으로 옮겨졌고 제석사는 몇몇 신도만 남아 있었는데 노루와 멧돼지 가족들이 제석사 마당으로 들어와 밤새 스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밤을 지켰다고 한다.

해봉스님이 입산해 70여 년을 살아온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주장하는 신도읍지로, 이곳에 제석사라는 작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1983년, 3군 본부 이전사업인 '6·20사업'으로 신도안에서 1,136세대 6,381명의 민간인과 130여 종교단체가 철거됐다.

제석사(帝釋寺) 해봉스님은 제석사는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을 기도하는 도량임을 들어 '67세의 늙은 몸으로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며 수많은 고초 끝에 군 당국이 이를 수용, 철거되지 않은 유일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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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각왕전 ⓒ 조성우


보편적으로 사찰의 중심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대웅전이 있지만 제석사는 대웅전이 없고 각왕전(覺王殿)이 있다. 오직 국가의 안녕과 평화통일, 국태민안을 기도하는 기도 도량이다. 각왕전 옆에 있는 소법당(강당)의 현판은 '약로금(躍爐金)'이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내용은 '쇠를 녹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불교의 윤회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현판의 모양이 누에가 허물을 벗고 -번데기-나방으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이 과정을 통과하면 도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소법당(약노금) 앞에는 심은 뽕나무가 아닌 자생 뽕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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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약노금(躍爐金) ⓒ 조성우


각왕전 뒤편으로 산식각의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석굴에 노인과 호랑이 모습이 묘사된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기도를 드린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석굴에 설치돼 있으며 출입문 없이 개방되어 있다.

산신각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해서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보통 산신각에서는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기도가 많이 행해지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조성돼 있다. 불교의 석가모니불보다 높은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토착신앙을 계승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석사의 일주문 뒤에 자리한 작은 비문이 눈길을 끈다.

"네마리의 용은 각자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팔각등은 속세의 중생들 마음에 등불이 되니
어찌 자비를 따르지 않으리오.
연화는 오랜 세월 속에 불교의 상징이었으며
힘찬 호랑이의 모습은 동양의 상징이었다.
'산은 산이요'라는 깊은 뜻을 중생들 마음에
등불 밝혀 부처와 함께 안식하여라."

또한 제석사의 맞은 편 산자락에 계룡산 삼신당이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제석사와 마주 보이는 곳에 위치한 삼신당은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조선을 건국, 왕위에 올랐다는 명당으로 신라시대에는 왕용암, 고려시대에는 수심대, 조선시대에는 삼신당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1925년 정원강이 삼신당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했던 곳으로 1983년 6·20사업에 따라 모든 무속·신흥종교 시설들이 철거되었으나 역사성과 주변 경관 훼손 방지 등을 위해 존치돼 오고 있는 상태다.

이곳은 각종 무속·신흥종교의 요람이었던 신도안의 종교적·향토적·역사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 장소다. 사학계에서는 이곳의 역사적·민속학적 가치를 재조명이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룡일보>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석사 #삼신당 #산신각 #각왕전 #계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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