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으로는 알 수 없는 특별한 그림자

[사춘기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편지 ③] <누구 그림자일까?>

등록 2015.10.30 11:15수정 2015.10.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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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쨍쨍한 날이면,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은 까만 그림자를 향해 마구 달렸다. 누구 그림자가 제일 크다는 둥, 네 그림자를 밟아서 뭉개버리겠다는 둥, 먼지 풀풀 날리면서 뛰어다녔다. 어떤 날은 자신보다 큰 그림자에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각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그림자가 신기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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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그림자일까> ⓒ 우상숙

우리에겐 언제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다. 밟아도 밟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말이다. 빛의 세계에서 태어난 그림자를 향해 요상한 질문을 던지는 그림책이 있다. <누구 그림자일까?> 세상에 그림자도 모르는 바보가 있나? 이건 우산 그림자지, 책장을 펼치면 엉뚱한 그림자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박쥐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나야 나, 웃고 있었다. 누가 안경 그림자도 모를까봐? 책장을 펼치면, 똬리를 틀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이 보였다. 장화 그림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독 그림자였다.

눈에 익은 그림자 모양과 실제 주인이 번번이 예상을 빗나갔다. 그림자의 정체성을 알아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아무리 빈약한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그림이 없었다. 어? 내가 알고 있던 그림자가 아닌 걸, 까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마지막 책장에는 아홉 개의 동그라미가 있다. 동그란 그림자라면, 사과나 공 말고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야, 우리! 방긋 웃는 그림자의 주인들은 제 각각이었다. 진짜 사과도 있고 무당벌레에, 웅크린 사자며 달팽이, 복어까지 동그란 그림자의 주인이 이렇게나 많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 책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림자의 본질을 알고 있나요?"


사람들의 상투적인 시선에 당찬 의문을 던지는 물음이라니...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기억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동그란 그림자는 공, 이라는 공식이 부지불식간에 세워졌다. 친숙한 생김새와 그림자가 다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는 그림자 주제에, 왜 이리 헷갈리게 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그림자 너 대체 뭐야? 집요한 추궁에 내몰린 그림자는 이런 답을 할런지도.

"나? 환한 빛 속에 있는 당신 곁에 머물지만 따뜻한 눈길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쓸쓸한 존재. 아는 척 하는 당신 덕분에 어두운 옷을 입고 다니지. 당신이 외면한 외로운 그림자, 그게 나야."

그림자의 야무진 항변에 어깨가 축 처지는구나. 그림자의 실체는 헤아리지 않고, 시커먼 그림자의 움직임에만 눈길을 주었다니. 몸이라는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시선은 몸의 실체에게로만 향했다. 그런데 그림자에게도 정체성이 있었다. 눈으로 보는 그대로가 그림자의 전부는 아니다. 뭉뚱그려진 시커먼 형체라고 대충 짐작해서는 안 된다. 어두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림자를 찬찬히 읽어야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림자는 물체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늘이다. 빛이 통과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어둠이 바로 그림자이다. 빛 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사람들은 평생토록 달고 다닌다. 주변을 서성거리는 나를 닮은 어두운 그림자. 늘 뒤에 서 있는 그림자를 제대로 바라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림자를 시커먼 그늘이라고 무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외면 받은 그림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힘을 키워나간다.

힘이 세진 그림자는 위험천만하다. 빛을 차단시켜 주인을 어둠 속으로 가둬버린다. 그림자가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그 주인이 그림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닌다. 그림자가 하는 일이란 어둠을 곳곳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어두운 감정을 쉽게 노출시키고, 과장되게 표현하도록 조정한다. 원래의 주인은 그림자의 조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영리한 그림자의 계략에 속지 않으려면, 먼저 너의 등 뒤부터 살펴보려무나. 그 다음엔 머릿속에 틀어박힌 낡은 인식을 흐르는 강물에 말끔히 씻어버리자. 비겁한 겁쟁이라고 그림자를 향해 손가락질 했던 두 손도 깨끗하게 씻어내자.

이제 그림자를 그림자답게 보기 위해, 내 옆을 맴도는 어둠을 다정하게 쓰다듬어보는 거야.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건, 바로 내가 빛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아름다운 빛의 조각들을 바라보듯이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면 되는 거야. 무엇보다 틈만 나면 굴절을 시도하는 그림자를 따라잡으려면, 생각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어야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란 어쩌면 그림자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낡고 오래된 것들인지도 모른다. 딱딱하게 굳어진 관념으로는 그림자의 모양도 구별할 수 없다. 머릿속에 들어찬 낡은 관념들을 비워내지 않는다면, 그림자의 정체성도 알기 어렵다. 그림자의 짙은 어둠은 늘 우리 곁을 맴돈다. 그 어둠은 쫓아내야 할 불청객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가 짊어져야 할 것들이다.

너는 지금 어두운 그림자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중이다. 그림자 밟기에 즐거웠던 네 걸음에 힘이 빠지고 의구심이 생겨 마냥 즐겁지만은 않겠지. 왜 그런 그림자를 달고 살아야하는지, 밟아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가 두렵겠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어둠의 정체성에 대 혼란이 일어나, 마음속은 폭발하기 직전이다. 무시무시한 어둠의 그림자 앞에서 KO 패를 당한 패배자처럼 느껴진다면.

그렇다면 넌 그림자와 불꽃 튀는 한 판의 설전을 벌이는 중이다. 온 몸에 붉은 상처가 돋아난 후에야 겨우 그림자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법이다. 나를 닮은 나의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림자를 향해 겁 없이 돌진하는 중이다. 사라질 수 없는 빛 속의 어둠에 대해, 근원적으로 짊어져야할 인간의 그림자에 대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자와 실체를 분리할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림자를 받아들일 밖에. 잘 살펴보렴, 네 그림자를. 시커먼 어둠 속에 네 실체가 웅크리고 있단다. 아는 척 지나치지 말고, 다가가 정겹게 바라보렴. 어둡다고 무서워 말고, 어떤 실체를 보더라도 따뜻하게 대하려무나.

낯선 어둠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네 그림자와 함께 뛰어놀 그날이 오리니. 그때까지 한 걸음씩 그림자를 향한 네 걸음을 부지런히 옮기려무나. 네 그림자와 친구가 되는 날, 너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전과는 다른 네 자신의 모습에 감동할 그날이 찾아오기를 기도할게.

누구 그림자일까?

최숙희 지음,
보림, 2000


#그림자 #사춘기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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