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일 중독'으로 몰아가는 기사, 불편한 이유

[헬조선의 경제-1] 긴 노동시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등록 2015.11.02 12:13수정 2015.11.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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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언급 기사 꼬박꼬박 챙겨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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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유튜브 스틸컷. ⓒ MICHAELHICKOXFilms


나는 1989년생 20대 청년이다. 내게 40대는 인간관계를 어찌 맺을지 조금 애매하고 쑥스러운 분들이다. 40대의 막내 1976년생과는 13살 차이가 나서, 삼촌·이모라 부르기에는 섭섭하실 것 같고 형·누나라 부르기에는 내 쪽에서 조금은 민망하다. 반면 40대의 첫째 1967년생 분들과는 22살 차이가 나 아저씨·아주머니라고 부르기에는 섭섭하실 것 같고, 삼촌·이모라 부르기에는 건방져 보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애매함 때문에 어떤 희로애락을 겪는지 늘 궁금하다. 게다가 40대는 1967~76년생이라는 10년의 세월로만 정체성을 규정짓기에는 다양한 면을 지녔다. 세대사회학에 '코호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특정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행동양식을 공유하게 된 연령 집단' 정도를 의미한다. 40대의 경우에는 이 코호트가 40대 안에서도 다양하다.

멀리 보면 민주화 세대인 386세대와 겹치는 코호트가 있고, 또 386 이후 '운동권 끝물'이라 할 수 있는 중간 코호트가 있다. 그 이후 X세대도 있다. 학창시절 이전 세대들과 달리 풍요로움을 누리다가, 20대에 외환위기와 경쟁사회를 온몸으로 맞은 분열적 애환을 겪은 코호트다. 이분들은 그 자체가 딱히 일관된 정체성을 규정짓기가 어려워 'X'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내가 속한 2030이나, 5070보다 훨씬 종잡을 수가 없다. 세대가 언급되는 언론 보도를 보면, 40대는 중간에 낀 입장이라 안타깝게도 자주 소외당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40대를 단독으로 다룬 기사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 부쩍 언론에서 '일 중독'과 40대를 결부 지은 보도들이 나온다.

38선·사오정... 대안없이 40대 '일중독'으로 등 떠밀면 장땡?

"정부, 노동시간 줄여서 노동생산성 늘린다" <전기신문> 10월 16일
"'아빠와 함께' 하루 6분.. '야근 한국' 자화상" <SBS> 10월 19일
"리처드 로저슨 교수 "노동 유연성 높이면 근로시간 줄어들어"" <한국경제> 10월 26일"40대 고소득·자영업 ·남성 일 중독 확률 높아" <MBC> 10월 30일
"근로자 7%가 워커홀릭.. 40대·男·고소득일수록 일 중독" <아시아경제> 10월 31일
"이케아·아바의 스웨덴이 부럽다면.. 6시간 노동제 도입합시다" <조선일보> 10월 31일


주로 보수나 중도 성향으로 알려진 언론이 자주 이런 보도를 하지만,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 진보 성향 언론도 가끔 '노동시간'을 화두 삼는다. '노동시간'이 화두가 된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걸 언론들이 자주 40대를 '노동생산성'과 결부시켜 조명하는 맥락이 뭘까 궁금했다. 또 딱히 언론이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보도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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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유튜브 스틸컷. ⓒ MICHAELHICKOXFilms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 전망 2015' 보고서가 지적하듯, 2014년 한국 임금노동자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057시간으로 세계 3위였다. 예전에 이보다 더 높았을 때는 '살인적' 노동시간이라는 표현도 언론에서 자주 썼다. 그래도 '헤븐조선'의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는 걸까? 참여정부 때 2090시간이었다가 MB정권 때 2100시간을 웃돌더니, 박근혜 정권에서는 꾸준히 내림세다. 임금피크제로 일자리가 쪼개지면, 업무 부담은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훌륭하신 대통령을 몰라봐 참 죄송하지만, 희소식은 그게 끝이다.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고용시장을 유연화'(라 쓰고 '쉬운 해고'라 읽는다)하고, '노동시간 줄여 노동생산성 높인다'는 말들이 쏟아진다. 임금피크제는 이 추세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임금피크제는 고연령·장기근속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해, 아낀 비용으로 청년 일자리를 늘린다는 발상이다. 결국 '일자리 쪼개기'이고, 일자리가 늘면 기업의 노동생산성은 높아진다.

일할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 기업 입장에서는 이득이다. 하지만 기업은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노동자들에게 지출했던 비용을 쪼개서 이득만 취하는 놀부 심보다. 이 상황에서 40대가 너무 야근한다며 '일 중독'으로 모는 언론 보도가 괘씸한 건, 단지 '기분 탓'일까? 언론은 98%는 이야기해도 중요한 2%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직장에는 '38선'(38세쯤 되면 선선히 퇴직을 받아들이기 시작) '사오정'(45세쯤 되면 정년퇴직)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남아있으면 도둑)과 같은 말들이 있다. 재계가 과연 우리 좋아지라고 노동시간 재고를 권장(?)하는 걸까.

지난 9월 중순 임금피크제 도입 등 노동 현안에 대한 노사정(한국노총·한국경영자총협회·정부) 합의 당시,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한국경제신문> 칼럼으로 "논의가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한다면 과욕일까. 바로 생산성 이야기다"라며 본심을 드러낸 바 있다.

노동생산성이란 한 사회가 노동을 투입했을 때, 얼마나 경제 과실을 거두는지 따지는 지표이다. 하지만 한국생산성본부에 따르면, 2013년 OECD 34개국 중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25위에 그쳤다. 노동자가 한 시간을 일해, 평균 29.9 달러만큼의 경제 과실을 생산해낸 거다. OECD 평균 40.5 달러에 못 미치며, 1위 룩셈부르크의 69.9 달러와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룩셈부르크(1622시간)보다 일은 435시간(약 18일) 더 많이 하면서, 생산성은 떨어지는 건 바로 일의 능률을 저해하는 심신의 피로감 때문이다. 잘 알려졌듯, 한국의 산업화와 외환위기 극복은 노동자들의 허리띠를 졸라매 이뤄냈다.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은 지금까지 '관행'처럼 자리잡혔다. 자본에 인간을 끌어다 맞춘 거다. 40대는 이걸 감수하고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서 외환위기 극복에 크게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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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생산성 유튜브 스틸컷. ⓒ JeTeFilms


하지만 후기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40대는 마치 '뒷방 늙은이' 신세처럼 푸대접을 받는 모양새다. 정보화 시대가 됐고, 이제는 기계에 인간을 끌어다 맞추는 식으로는 더는 생산성이 안 나온다. 노동자들의 두뇌 회전이 빨라야 하는데, 신체 피로감은 집중력과 업무 능률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이제는 몸이 안 따라줄 수도 있다.

'40대가 일 중독'? 현실은 안 보이나

이때 재계가 임금피크제를 꺼내든 건 가히 '신의 한 수'다. 곧 죽어도 자신들 지갑은 안 열면서 생산성을 끌어올려 한 몫 챙길 기회다. 게다가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며 기업 이미지를 선전하고, 여당을 향한 표심까지 자극하니 속된 말로 '개이득'이다. 물론 40대가 임금피크제 직접 적용 대상은 아닐망정, '노동시간-노동생산성'이 화두가 되는 시점에서 고연령 노동자 임금은 삭감하고, '40대는 일 좀 그만하라'는 식의 보도가 어떤 의미가 될까.

까놓고 말해, 직장에서 40대의 등 떠밀며 '너네 이제 단물 다 빨아 먹었으니, 책상 빼라'는 식으로까지 들린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모멸감도 느낄 수 있는 상황 같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거 같다. 지난 30일 <연합뉴스>의 "취업자 7%가 일 중독자... 남성·40대·고소득일수록 많아" 기사의 베스트 댓글에서 비슷한 반응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 중독.. 지X하고 있네. 누가 하고 싶어서 합니까? 기자님도 왜 해야 하는지 알 텐데? 안그럼 못 살잖아. 우리 모두 아는 거 아니야?"(감칠**)
"우리나라에서 40대면.. 결혼했지.. 애들 한참 커서 학비 장난 아니게 들지. 집 한 채 대출 끼고 겨우 마련하고 갚아야지.. (아니면 미친 전세값 마련해야지) 회사에선 중간 관리자쯤 돼서 위에서 갈구지..  밑에선 치고 올라오지.. 나 잘리면 처자식 길바닥에 나 앉지..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지."(이**)
"새눌스런(새누리당 같은) 기사네. 일 중독이 아니라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여행도 다니고 쉬고 싶어도 돈 벌려면 어쩔 수 없다"(초*)

<연합뉴스>는 지난 30일 한국노동패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윤자영 연구위원의 논문 <일 중독 측정과 결정 요인>을 바탕으로 기사를 썼다. 그러면서 윤 연구위원의 "자기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 중독과 그로 인한 다양한 폐해를 막기 위해, 우리나라 취업자의 17.9%에 해당하는 60시간 이상의 과도한 노동을 실질적으로 단축하는 정책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을 소개했다.

물론 <연합뉴스>는 기사를 짧게 쓰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논문 초반에서부터 윤 연구위원이 "한국인들이 장시간 노동을 습관이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산업화를 거치고 1997년 이후 생존의 불안이 증폭되면서 강화"됐기 때문이라는 한 줄 정도 더 추가시켜 오해를 피할 생각은 못했던 걸까? 결국 구조적 문제를 환기해주는 게 중요한데, 대부분 개인적 문제로 돌리기 때문에 휴머니즘이란 게 느껴지질 않는다.

<조선일보>의 "이케아·아바의 스웨덴이 부럽다면... 6시간 노동제 도입합시다" 기사는 더 가관이다. 이쪽은 북유럽의 웰빙스런 삶을 소개하며 짧게 일하라고 부추기지만, 북유럽이 그렇게 짧게 일하면서도 잘 먹고 잘사는 이유에 대해서는 덧붙이지 않는다. 부자들에게 팍팍 세금을 매겨 복지가 잘 되는 편이고, 직장을 옮겨도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다시 구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가 뒷받침된다는 설명 같은 것들 말이다.

실질도 없이 언론들이 고용시장 유연화·노동시간 감축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부터 해대니, 벌써 "새눌스런 기사네"라는 반응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퇴근을 감행해 금쪽같은 자식을 부둥켜안고 싶은 건 평균적 40대 직장인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하지만 이분들이 실질적으로 바라는 건 여전히 불명확한 'X'로만 머물러 있다. 나는 질 낮은 일자리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기적 청년이 되고 싶지 않으며, 40대와 소통으로 문제를 풀고 싶다. 그래서 진정으로 잘못 하는 군상들이 누구인지, 2030이 40대와 진정으로 상생할 길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 그러려면 언론이 40대의 목소리를 더 많이 전해줘야 한다.
#헬조선 #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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