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원전 주민 투표, 그 두 달의 기억

기억의 모자이크로 더듬어보는 영덕 원전 유치 주민투표

등록 2015.12.03 20:05수정 2015.12.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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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오전, 영덕군청 3층 드넓은 대강당. 드디어 나는 홀로 남았다. 개표 결과 기자회견은 끝났고 기자들은 기사를 쓰러, 영덕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점심 회식을 위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드디어 홀로 남았다.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주민투표라는 한고비를 이렇게 넘기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는 아니었다. 대신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사실은, 너무너무 겁이 났어요."

두려움

영덕 반핵진영은 진작 두 동강 나 있었다. 그 둘은 끔찍하리만치 서로 으르렁댔다. 권력 앞에 주민들이 찬반으로 갈라지는 것도 아까웠을 마당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환경운동연합으로선 쉽사리 어느 한쪽을 돕겠다고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안타까운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흘러만 갔다. 그나마 양측 중간 성격의 단체인 주민투표 추진위원회가 중재를 자처하고 나섰다. 주민투표를 두 달 남겨놓고서였다. 거기가 전국 탈핵 진영의 하나뿐인 영덕 상륙 지점이었다.

9월 15일 열린 환경운동연합 원자력특별위원회에서는 영덕 이야기가 오갔다. 여러 선배가 주민투표 추진을 돕기 위해 영덕 파견을 결의했다. 특위는 파견 활동가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영덕이 '남의 일'이었던 건 거기까지였다. 이튿날 전화가 걸려왔다. 영덕에 거처를 구해 지내면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후배 활동가들까지 꼭 와줘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환경운동연합은 신입 활동가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사고를 쳐라. 현장에 나가라. 대선배들이 주민들과 교감하며 파괴의 현장을 지켜내 온 영웅담(?)은 매번 동경의 대상이었다. 영덕으로 가겠다고 했다. 영덕에 이웃한 포항의 환경운동가인 내게도 마음의 빚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덕처럼 상황이 나쁜 현장에 뛰어든다는 결심의 무게를 처음엔 온전히 가늠하지 못했다. 전국의 다른 활동가들의 업무 기준을 신입인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도 스스로 했다. 소설가 김애란이 '진지함'이라고 읽어낸 그 두려움을, 서툰 용기로 덮어버리지 않았던 건 두고두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 작은 다행들이 전국에서 영덕으로, 수백 번 겹쳐졌던 덕분에 주민투표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은 다행, 그러나 커다란 불행

그런데도 상황은 너무 나쁘기만 했다. 영덕에는 2004년 부안 주민투표 때와 같은 경험 짱짱한 주민 세력도 없었고, 1년 전 삼척처럼 지자체장 이하 공무원들이 주민투표를 전폭 지원하지도 않았다. 2005년 방폐장 유치를 찬성했던 사람들은, 경주에 그걸 빼앗겼단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방폐장을 반대했던 주민들은 갖은 불이익에 속을 앓으며 생계의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을 뿐이었다.

서명버스 봉사단 영덕 주민투표를 지지하는 전국의 시민들이 주말마다 영덕을 찾아 가가호호 문을 두드려 주민들의 투표인명부 등록을 도왔다. ⓒ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


마을 주민들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이장, 그 이장들을 틀어쥔 이희진 군수는 결정적으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399명 주민 서명만으로 원전 유치를 밀어붙였던 전임 군수가 영덕에 내려와 군청에 남은 수족들을 움직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영덕 주민투표는 주민들이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며 직접 투표인명부를 만들어야 했던, 최초의 민간추진 주민투표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 투표는 또한, '주민'투표로 기록돼야 했다. 책임과 실무는 뒤집어쓰되, 스포트라이트 앞에선 영덕 주민들 뒤에 꼭꼭 숨어야만 했던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영덕 구석구석을 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경주 월성1호기 이주대책위 황분희 어머님도 매번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오셨다. 주민투표가 끝나면 그 결과를 들고 싸워나가야 할 사람은 활동가들이 아니라 영덕 주민들일 것이었다. 함께 울고 함께 걱정해드리면서도 우리는 주민들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우리가 골무가 돼 드리겠다는 진심은 그때 전해졌을까, 그렇지 못했을까.

서툴러도 황소걸음

반핵 운동가들은 원전 추진의 실체인 ㈜한국수력원자력(아래 한수원)과 산업통상자원부(아래 산자부)를 두고 '핵 마피아'라며 늘 공격해댔지만, 이번 영덕에서는 오히려 수세에 놓였다. "불법투표 나쁜 투표, 불순한 외부세력 물러가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영덕을 뒤덮었다. 추진위원회와 관리위원회는 긍정의 마케팅으로 대응했다. 영덕 땅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밝게 웃으며 인사드렸다. 아홉 곳 읍면 '청정' 영덕의 진짜 주인들을 만나며 '참여'를 독려했다. 한수원이나 찬성 단체가 창피함조차 내던진 유인물을 뿌려도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주민투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투표하러 가는 길 노상에 천막으로 꾸려진 투표소이지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려는 영덕 주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 김자유


개인적으로는 '결국 주민투표를 실행조차 못 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의 위기도 있었다. 주민들이 '확정됐다'고 얘기하던 20개 투표소가 사실은 '섭외된'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던 적이 있었다. 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투성이던 투표소 예정지들은, 영덕군이 어깃장을 놓자 집회신고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2만 명에 조금 못 미칠 것으로 예상했던 투표인명부도 투표를 며칠 앞두고 뒤통수를 쳤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나 틀린 정보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인명부 숫자가 짐작했던 것보다 너무 많았다. 인명부 관리팀 활동가들은 하나같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투표인원 8천 명 돌파. 이틀 동안 치러지는 주민투표가 반환점을 돌았을 때, 관리위원회 캠프는 한껏 들떠 있었다. 모두가 서로 악수를 나눴다. 내겐 그래서 더욱, 불안하기 짝이 없는 리드였다. 한국과 브라질이 축구 경기를 하는데, 전반전이 끝나고 보니 한국이 브라질을 2대 0으로 이기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튿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한수원의 투표 방해도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공보팀이 종료 1시간 전 발표한 투표율은 유권자 대비 32.5 %. 현행 주민투표법상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해 절반을 넘는 의견은 국가사무에 반영하게 돼 있다. 그러나 원전 '유치'는 영덕 지방 사무이기에 관리위는 투표율 33.3 %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투표율이 턱밑에 다다르자 기자들은 애가 탔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관리위원회는 최종 투표율 보도자료를 생략해 버렸다. 기자들은 개표소 현장에서 거세게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기자들의 펜 끝에는 서슬 퍼런 날이 서게 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전날 밤 너무 이른 환희에 젖을 게 아니라 다음날 투표함 호송이라든가 개표 등의 세부 시나리오를 더 꼼꼼히 준비하고 점검했어야 했다.

복숭아·쌀·온천관광을 풀어서라도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을 한수원도 그랬지만, 주민투표가 끝나자 언론도 활동가들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함께 두 달을 믿고 의지해 온 주민들의 실망과 힐난은 더더욱 아팠다. 그런 과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고목도 껍질을 누르는 손톱자국이 아릴 것이다. 골무도 상처는 아픈 법이다.

상처 위에 건네져야 할 위로와는 별개로, 비난 받는 쪽이 영덕 군민들이 아니란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참 고맙다. 골무도 아픔을 느끼지만, 눈물과 신음을 토해내지는 않는다. 공격은 뒤집어쓰고 갈채 앞에선 주민들 뒤에 숨어야만 했던 우리가, 애초에 두려움 속에서도 자처했던 그 역할을 끝까지 잘 감당해낸 것 같아 나에겐 그게 가장 커다란 다행이다.

투표하는 91세 할아버지 주민투표 첫 날, 영덕 군민의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축산 1투표소를 찾은 91세(1925년 생) 노령의 할아버지가 투표용지를 배부받고 있다. ⓒ 영덕핵발전소반대범군민연대


볼넷, 그 애매함 너머

야구에서 볼넷은 애매하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아웃되지 않고 출루한 기록의 비율에는 포함되지만, 안타를 기록하는 비율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덕이 이번 역사의 현장에서 기록한 투표율이 꼭 그렇다. 누군가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도 한다. 중앙선관위에서 멍석을 깔아주는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보다 한수원의 방해공작 속에서 얻어낸 영덕 주민투표율이 더 높다는 데서 의미를 찾는 사람도 있다.

처음부터 영덕이 노렸던 것은 법적 효력 그 너머의 정치적 효력이었다. 이희진 영덕 군수를 당선시켰던 만큼의 사람들이 투표소를 찾았다. 가만히 앉아 걸려오는 전화 여론조사에 응했던 게 아니다. 궂은 날씨와 협박과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직접 투표소를 확인하고 찾아가 주인의 뜻을 드러냈다. 재미난 사실 하나. 지난해 삼척 핵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다음 날 아침 국회에는 세 남자가 모였다. 무소속 삼척시장, 여당 국회의원과 야당 도의원이 그 즉시 '핵발전소 삼척 유치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다.

영덕은 이제 보호구를 벗고 1루에 섰다. 누구는 주민투표를 성공이라 평가하고, 또는 무효라고 한다. 볼넷이 출루율에 계산되든 타율에 포함되지 않든 그런 건 상관없다. 삼진 아웃되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깔끔하게 잘해낼 수도 있었지 않나 싶다. 두 달 전의 나를 떠올리면 이게 무슨 호연지기인가 싶어 웃음이 난다. 영덕 앞에는 2루와 3루 그리고 홈으로 가는 더 먼 길이 놓여 있다. 그래도 괜찮다. 여전히 영덕은 혼자가 아니니까.

지난 두 달이 마음 언저리에 선득하다. 비어있지도, 가득 차 있지도 않은 시간이 만져진다. 그 때로 돌아가는 꿈을 아직 꾸곤 한다. 전화가 걸려 온다. 왠지 용건을 미리 알 것만 같다. 누군가 묻는다면 어떨까. 많이 상처받고, 박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영덕 가서 일 할래?

"네. 그럼요."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전병조 시민기자는 포항환경운동연합에서 간사로 일하는 활동가입니다.
#영덕 #주민투표 #핵발전소 #효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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