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와 기차,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

[10년, 다시 만난 남미 ⑩] 칠레 테무코, 파블로 네루다의 유년이 있는 곳

등록 2015.12.14 10:31수정 2015.12.14 10:31
0
원고료로 응원
a

칠레 테무코, 시인 네루다의 자취를 따라가는 안내책자 ⓒ 홍은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시를 안 읽어본 사람이라도 한번은 들어본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스페인에 있을 때도 친구들 책장에는 어김없이 그의 시집 한두 권쯤은 꽂혀있었다.

칠레의 남쪽 아루아카니아 주의 테무코라는 도시에는 '파블로 네루다의 흔적들'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루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도시는 시인이 유년을 보낸 곳이면서 그의 부모님이 사시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 도시에 남은 시인의 흔적과 함께 도시를 둘러보는 것이 꽤나 흥미로워 보여 안내 책자를 들고 그의 시와 함께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인용된 시구는 필자의 주관으로 번역된 것임을 밝힙니다).


[첫 정거장] 파블로 네루다와 기차

a

파블로 네루다 기차박물관 ⓒ 홍은


"나의 유년기는 기차역을 달리네. 새로운 목재로 만든 철로를 따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향기를 품은 사과나무들로 둘러싸인 집... 그 시절 나는 깡마르고 창백한 아이였지. 와인 창고와 텅 빈 숲 안에 흠뻑 젖어 있었지."  <경계>

2004년 2월,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기차박물관은 그의 이름으로 오픈했다. 시인과 기차는 그의 아버지로 연결된다. 기차 기술자이자 조종사였던 시인의 아버지 돈 호세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a

기차박물관에는 오래된 기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홍은


오랜 열차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는 시인의 시가 적인 판넬들이 있는 전시실도 있었다. 네루다의 시와 이미지가 더하여 공간은 단지 오랜 기차의 역사를 보는 곳이 아닌 조금은 낭만이 함께 담기는 공간으로 느껴졌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테무코 기차역이 있다 지금은 짧은 거리의 기차밖에 다니지않지만 예전에는 남쪽과 북쪽을 이어 기차가 달렸던 곳이다. 조종사였던 네루다의 아버지는 종종 그를 기차에 태워 여행을 했고, 그 여행을 통해 네루다는 자신의 땅을, 칠레의 숲을, 그리고 이를 이어주는 기차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많은 시 안에 그 사랑이 담기게 되었다.


[두번째 정거장] 파블로 네루다, 유년의 집

a

파블로 네루다가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의 대문 ⓒ 홍은


"나의 집. 막 베어져 아직 향이 나는 새 나무로 된 벽으로 된 집. 삐걱거리는 복도, 폭풍을 불러오는 남쪽의 바람이 부는 집. 얼어붙은 깃털을 가진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드는 곳. 나의 노래가 자란 곳." <나의 집>

파블로 네루다의 집은 칠레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칠레 산티아고 주변만 해도 시내와 발파라이소, 이슬라 네그라 등에 그가 머문 집이 있다. 하지만 테무코의 집은 시인이 시인이기 이전 어린 시절을 보낸 집으로 의미가 있다. 다른 집들이 네루다의 박물관으로 보존되는 것에 비해 테무코의 집은 작은 표지만 있을 뿐이다.

정확한 주소가 없어 근처에서 지도를 들고 서성이는데 한 아저씨가 금방 내가 찾는 곳이 네루다의 집인지 알아채시고는 문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네루다는 이곳에서 1906년 초에서 1921년까지 살았다. 이 지역의 모든 집이 그렇듯 지역의 나무로 소박하게 지어진 집이었다.

이 집에서 네루다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8살 때부터 시를 썼다는 그는 1919년 한 작문대회에서 3등을 하며 첫 상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1920년 테무코 봄축제 글짓기 대회에서 일등을 하며 서서히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인으로서 첫 영감을 준 곳이기에 그의 시에는 이 집에 대한 기억이 많이 등장한다.

[세 번째 정거장] 네루다의 부모와 가족의 무덤

a

시인의 아버지와 가족의 묘는 소박하게 테무코에 자리잡고 있었다. ⓒ 홍은


"기차 조종사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는 죽음의 열차에 올랐네. 그리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네"  <아버지 묘 비문에 적인 네루다의 글>

네루다 부모님과 가족의 묘가 있다는 테무코 묘지를 찾았다. 묘지 입구에는 그 곳에 안장된 주요 묘지들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네루다 부친의 이름이 보였다.

중요 인물이니 만큼 묘지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찾기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위치가 표시된 곳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아저씨께 물어 본 후에야 많은 묘들 사이에 소박하게 위치한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

1938년 네루다가 아버지가 많이 아프타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마린의 집으로 가 머물렀다. 그날 네루다는 마린에게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한 뒤 서재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책상 위에 네루다가 그날 밤에 쓴 글을 발견했다, 그의 아버지에게 그의 마지막 존경을 바치는 그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 시는 이후 그의 유명한 책 '모두의 노래' 시집에 수록되었다.

[네 번째 정거장] 네루다의 사랑, 테오도로 쉬미트 광장

a

사춘기 시인이 앉아 그녀의 짝사랑을 생각하고 있었을 곳에 시인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 홍은


"내 누나가 그녀를 초대했을 때 나는 문을 열러 나갔네. 문을 열었을 때 태양이 들어오고, 별들이 쏟아져 들어 왔지. 밀로 만든 빵을 든 깊은 두 눈이 들어왔지. 나는 그때 14살이었고 아주 멋진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었네." - <귀에르미나마는 어디에 있나>

이 광장은 1881년 테무코 도시 계획을 맡았던 테오도로 쉬미트의 이름을 딴 곳이다. 예전에는 "만자노 광장(사과나무 광장)"이라 불린 곳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시인이 사춘기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사랑에 빠졌던 여성의 집이 이 광장 앞에 있었단다.

주로 시인은 산타 트리니다드가 보이는 교회 앞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시인의 자리를 빌어 시인의 책상과 의자가 그곳에 놓여있다. 그곳에서 시인은 이미 그의 사랑의 시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정거장] 시인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 '이슬라 네그라'

a

'이슬라 네그라'그가 사랑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 ⓒ 홍은


테무코 도시를 거닐며 시인의 흔적을 둘러보니 지난 9월, 칠레 산티아고에 있을 때 들렀던 이슬라 네그라의 기억이 났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두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하는 이슬라 네그라는 '검은 섬'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섬은 아니다.

본래는 카비요따(갈매기)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는데 파블로 네루다가 이곳에 집을 지으며 그곳의 이름을 '이슬라 네그라'라 불렀다. 그곳에서 시인은 그의 가장 알려진 시집인 '모두의 노래' 책을 집필했고, 그의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한다.

시인이면서 정치적 활동도 많이 했던 그에게 한 인터뷰에서 두 가지 역할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는 시를 사랑했고, 여인을 사랑했으며, 그의 나라를 사랑했고 생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그렇기에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칠레의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 속에 그의 시는 살아 이어지고 있다.

"벗들이여. 나를 '검은 섬'에 묻어주오. 울퉁불퉁한 바위들, 파도들... 다시는 보지 못할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바다 앞에 말이오..." - 파블로 네루다

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았던 시 속의 바람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1973년 9월 피노체트 군사 구테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 그의 죽음은 여전히 일부 의혹으로 남아 여전히 시인은 그가 사랑한 바다에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왠지 허망하게 바다를 향한 그의 얼굴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칠레 #파블로 네루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흙, 예술치료, 스페인 문화&언어, 글쓰기로 삶의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서양에선 없어서 못 먹는 한국 간식, 바로 이것
  2. 2 모임서 눈총 받던 우리 부부, 요즘엔 '인싸' 됐습니다
  3. 3 카페 문 닫는 이상순, 언론도 외면한 제주도 '연세'의 실체
  4. 4 생생하게 부활한 노무현의 진면모...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5. 5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