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뒤를 따라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

[시골에서 만화읽기] 이와오카 히사에, <토성 맨션 5>

등록 2016.01.25 09:06수정 2016.01.2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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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2006년에 진작 나왔으나 한국에서는 2012년에 4권까지 나온 뒤 뒤엣권이 더 나오지 않다가 2015년에 비로소 5권이 나온 <토성 맨션>(세미콜론)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미쓰'라는 아이는 아버지 뒤를 이어서 '창문닦이' 일을 합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집이나 건물에 붙은 창문을 닦지 않습니다. 지구별에서 떨어진 우주에 지은 커다란 시설물 바깥에 있는 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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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 맨션> 5권 겉그림 ⓒ 세미콜론

만화책이니 우주 이야기라든지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터전이 된 뒤' 이야기를 그릴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문명사회를 돌아보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만화로 그릴 만하다고 여길 수 있고요. 전쟁무기를 줄이지 않고, 원자력 발전소도 없애지 않는 문명사회 흐름이라면 틀림없이 지구별을 온통 망가뜨려서 지구에서 사람이고 풀이고 나무이고 짐승이고 벌레이고 아무것도 도무지 살 수 없는 곳으로 바꿀는지 모르니까요.


"자연이란 게 뭘까요? 저는 눈동냥으로 시작해서 잘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남편이 말한 자연이 지상의 식물과 동물과 대지라면, 그렇다면 우리들은 본 적이 없는 거잖아요." (19쪽)

"그렇게 큰 일은 실감이 잘 안 와서요. 눈앞에 있는 일만으로 벅차지만,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충실히 살고 있어요." (94쪽)

만화책 <토성 행성>을 보면, 지구 바깥에 세운 커다란 시설물은 '위(상층)·가운데(중층)·아래(하층)'로 나뉩니다. 이곳에서는 아주 빈틈없이 계급을 나누어서 위층하고 아래층은 서로 오가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이러면서 가운데층을 두어 겉치레로 '계급이 없는 사회'인 듯 꾸미지요. 막상 위아래층이 하나되어 움직이지 못하는데 말이지요.

아래층에 살면서 위층 창문을 닦는 '미쓰'라는 아이는 창문닦이를 퍽 보람찬 일로 여깁니다. 다른 창문닦이 일꾼도 미쓰하고 비슷한 마음입니다. 아래층 사람들이 위층 사람들 심부름꾼 노릇밖에 못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어디로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시설물에 '갇히다'시피 사는 사람으로서, 시설물 바깥으로 나가서 우주 바람을 쐬고 지구를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기에, 이러한 일은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 준다고 여겨요.

위층 사람들은 위에 있다고 할 테지만, 이들도 시설물 바깥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시설물 바깥에서 살아남을 만한 과학이나 문명이나 솜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위층 사람은 드넓은 우주를 '창문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에요. 아래층 사람은 우주고 뭐고 내다볼 틈조차 없이 깜깜한 데에서 전깃불만 밝혀서 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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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세미콜론

"굉장하네요. 번쩍번쩍하는데요." "음? 번쩍번쩍해진 걸 알아본다는 건, 제대로 보고 있다는 거네요." "예?" "잘못된 것도 알죠? 조금 더 제대로 해 주세요." "어, 죄송합니다." (113쪽)

'어깨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았을까? 나도 언젠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143쪽)

창문닦이 일을 하는 아이는 창문닦이 일을 하다가 그만 줄이 끊어져서 죽고 만 아버지를 그리면서도 그저 차분하게 아버지 뒤를 밟습니다. 아니, 이 아이가 짐짓 차분해 보일 수 있고,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좀처럼 바깥으로 못 꺼낸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창문닦이 아이는 '창문닦이 동료'인 어른들을 마주하면서 저희 아버지가 예전에 함께 일했을 어른들하고 어떤 마음이 되었고 어떤 삶이 되었으며 어떤 말짓과 몸짓으로 하루를 보냈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서로 돕고 아끼면서 짓는 살림을 가만히 그려요.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천천히 자라는 모습을 깨닫습니다.

"소타, 잃고 나서 알게 되면 늦는다고." "음." '하지만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게다가 가요는 내가 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 주니까. 일단 이렇게 생각하지만.' (153쪽)

만화책을 읽으면서 내가 걷는 길을 돌아봅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걸은 어떤 길을 뒤따라서 걷는다고 할 만한지 되새깁니다. 내가 걷는 길을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즐겁게 바라보면서 배우거나 맞아들일 만한지 되짚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똑같지 않으니, 내가 걷는 길은 여러모로 다를 만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하고 똑같지 않기에, 아이들이 걸을 길은 여러모로 새로울 만합니다.

나는 우리 어버이한테서 받은 사랑으로 오늘을 살면서 내 나름대로 새롭게 사랑을 짓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나한테서 받은 사랑으로 오늘을 꿈꾸면서 아이들 나름대로 기쁘게 사랑을 가꿀 테지요.

잘한다거나 못한다고 하는 모습을 가리는 삶은 아니라고 느껴요. 기쁨인가 아닌가 하는 대목을 살필 삶이라고 느껴요. 내가 우리 어버이한테서 지켜본 모습을 기쁨으로 삭히면서 가다듬을 노릇이고, 오늘은 내가 어버이가 되어 우리 아이들을 마주할 적에 새로운 기쁨하고 웃음하고 노래가 되도록 추스를 노릇이에요. 아름답게 웃고 사랑스레 손을 맞잡으면 넉넉하리라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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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그림 ⓒ 세미콜론

"다마치 군, 살아 있다면 울어도 되고, 웃어도 돼요. 당신이 당신을 용서해 줘요." (174쪽)

만화책 <토성 맨션>에 나오는 '다마치'라는 어른은 '미쓰네 아버지'가 창문닦이 일을 하다가 그만 줄이 끊어져서 죽던 날에 미처 잡아채지 못했다고 스스로 몹시 괴로워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마치라는 어른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여기지만, 아주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아서 미쓰네 아버지를 잡아채지 못해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다마치라는 어른은 늘 머리가 아프고 가위에 눌려요.

가까운 일벗이 죽었기에 웃지도 울지도 마음을 열지도 못하는 굴레에 빠진 다마치 씨예요. 참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말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채 그대로 머리가 아프고 가위에 눌려야 할까요. 아니면, 다마치 씨도 죽음길로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다마치 씨 스스로 웃음도 울음도 함께 되찾아서 '내 곁에 있는 이웃하고 벗님'을 느끼는 길로 가야 할까요.

어버이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오늘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저희를 나무란다고 해서 어버이가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어버이를 좋아하고 아끼며 사랑합니다. 나도 아이들이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아요. 아이들이 부엌에서 뛰놀다가 물을 쏟든 뭔 말썽을 일으키든 이런 일이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나도 그저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끼며 사랑할 뿐입니다. 우리한테는 서로 아끼면서 바라보고 돌아보고 '봐줄(용서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지 싶어요. 나는 우리 어버이 뒤를 따라서 새롭게 어버이가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서 새롭게 어른으로 자랍니다. 다 같이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씩씩하게 서야겠다고 새삼스레 다짐합니다.
덧붙이는 글 <토성 맨션 5>(이와오카 히사에 글·그림 /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펴냄 / 2015.4.15. / 9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토성 맨션 5

이와오카 히사에 지음, 송치민 옮김,
세미콜론, 2015


#토성 맨션 #이와오카 히사에 #만화책 #만화비평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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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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