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환승 거리에도 기어이 지하철을 타는 이유

[서평] 지하철에서 책 읽는 이들을 스케치한 <지하철 독서 여행자>

등록 2016.01.28 14:40수정 2016.01.2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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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앉은 아가씨가 사정없이 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한쪽 어깨를 빌려준다. 먼발치에서 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이고, 건너편에 앉은 여학생은 놀랍게도 시집을 읽고 있다. 그렇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은 있고, 그들은 지하철을 나름 훌륭한 독서실로 이용한다. 물론 서울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책을 읽기보다 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드문 풍경은 아니다. 스마트폰보다 책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세련되고 모던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도구의 새로움보다는 내면의 새로움이 새로운 것이고,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최신 전자제품을 가진 사람보다 앞서가는 사람일 테니까. 오래된 지하철에서, 더욱 더 오래된 미래를 읽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 <지하철 독서 여행자> 중에서.

얼마 전부터 경의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대곡역에서 경의선으로 갈아타곤 하는데, 한파에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던 지난주 출근길에 봤던 '한 남자의 책 읽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언뜻 50대 중반 정도로 보였던 그 남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목도리에 고개를 푹 파묻고 걷던 그 추운 날, 에스컬레이터 주변의 구조물에 책을 올려놓고 읽고 있었다. 그것도 한손에 연필을 쥐고 밑줄까지 그으며 누가 봐도 진지하게 말이다. 강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남자가 그토록 절실하게 읽던 책은 어떤 책일까?

책을 좋아하다보니 그처럼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반갑다. 눈이 한 번 더 가곤 한다. 생면부지의, 잠시 스치는 사람들에 불과하지만 '책을 읽는 누군가'라 반갑고, 막연히 가깝게 느껴지고, 멋있고 근사하게 보인다. 어떤 책인지 궁금해 어느 때는 나도 모르게 (아마도) 상대방이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로 보고, 또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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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독서 여행자> 책표지. ⓒ 인물과 사상사

<지하철 독서 여행자>(인물과 사상사 펴냄)는 그날 내가 만난 남자와 그 남자가 읽던 책처럼,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과 그들이 읽는 책을 주제로 한 산문집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까짓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싶게 삶이 비루하고 속악하고 치사하게 느껴질 때가 부지기수로 많다. 이 나이까지 견디어 온 그런 고비 고비를 생각하면 먹은 나이가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삶은 누추하기도 하지만 오묘하기도 한 것이기도 하여, 살다보면 아주 하찮은 것에서 큰 기쁨을,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순간과 만나질 때도 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너무도 생생하고 뚜렷하다.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지하철 여행자들을 조금만 관찰해보면 알게 된다. 분명히 젊기는 하지만 모든 일에 무관심해 보이는 이들의 표정에 어린 피로감과 권태에 비하면, 두꺼운 소설책에 정신없이 몰두해 있는 50대 신사의 얼굴이 훨씬 더 생기 있다는 사실을. 사실 정신의 젊음과 노쇠는 육체적 나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건 태도나 열정에 더 많이 관련되어 있다." - <지하철 독서 여행자>에서.


소녀가 읽던 책은 박완서 작가(1931년~2011년)가 노년을 보낸 아치울 '노란집'에서 쓴 글들을 엮어 별세 2년 후인 2013년에 출간한 <노란집>이란 산문집이다. 저자는 '어디를 펼쳐 봐도 할머니 작가가 쓴 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만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가 겪지 못한 과거를 통과해 온 윗세대 작가의 추억과 일상, 생각들이 적혀 있을 뿐이다'란 표현과 함께 <노란집>에 대해, 그리고 박완서 작가와의 짧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 중 하필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을 다행이요, 축복이라고 감사할 정도로 좋아하는 그런 책을 내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 읽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그런데 하필 나도 읽은 책을 누군가 읽고 있으면 더더욱 반갑다. 더욱이 나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누군가 들춰내면 좀 전에 처음 만난 누군가일지라도 오랜 세월 알고 지내온 사람끼리 낯익어서 막연히 편안한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이 되곤 한다.

<노란집>(관련 기사: 쇼핑할 때 이런 존대 불쾌하지 않으세요?)은 나도 잔잔한 감동으로 읽었던 책이다. 고인의 노년 생활과 생활 철학을 풍성하게 엿볼 수 있는 데다가,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글들이 많은 책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지하철 독서 여행자> 저자가 나도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 중 하나인 노부부의 사랑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더 살갑게 읽혔다. 아마 나도 저자처럼 지하철에서 누군가 <노란집>을 읽고 있는 것을 봤다면 그 책을 읽을 당시의 느낌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으리라.

글은 모두 25꼭지.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책들은 <노란집>외에 이언 매큐언의 <속죄>,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한강의 <소년이 온다>,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마스다 미리의 만화 <주말엔 숲으로> 등 여러 작품. <노란집>처럼 책과 작가, 그리고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우리의 삶과 사랑과 관련지어 들려준다.

이런지라 <지하철 독서 여행자>, 한 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지하철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읽는 다양한 책만큼 꽤 다양하다. 무엇보다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은 것은 흔하게 접하나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던 지하철의 다양한 풍경과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1호선이 완공된 것이 1974년이라고 하니 지하철과 나는 비슷한 또래인 셈이다. 서울 지하철과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1호선을 비롯해서 2호선, 3호선, 4호선까지 추억이 어려 있지 않은 노선이 없다. 나는 지하철을 친구들과 함께 탔고, 첫사랑과 함께 탔으며, 가족과 함께 탔다.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다녔고, 직장을 다녔다.

지하철에서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음악을 들었고, 쓸데없는 물건들을 샀으며, 안타까운 일들을 목격했다. 나는 지하철과 함께 컸다. 지하철이 없었다면 읽지 못했을 책들이 있었을 것이고, 겪지 못했을 경험이 있었을 것이며, 학교와 직장을 다니기도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지하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지하철 독서 여행자>에서.

돈도 벌어야 하고 살림도 꾸려야 하고, 게다가 기사도 써야 하고. 이런 내게 "바쁘게 사는 사람이 그 많은 책들을 언제 읽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좀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책을 읽긴 읽어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이 없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글쎄? 나나, 그들은 언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집안 행사 때문에 어느 때는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데다가, 겨우 하루 쉬는 일요일에는 밀린 집안일로 점심을 홀딱 넘기기 일쑤다. 이런 내게 책읽기는 우리나라 성인들 대부분의 책 읽지 못하는 사정이나 변명처럼 어쩌면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결코 가까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잔인하고 슬프게도, 그리고 비참하게도 말이다.

이런 내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지하철이다. 때문에 가급이면 지하철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곤 한다.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어 편하고 훨씬 빨리 갈 수 있어도, 한두 번 환승을 해야 하고, 내려서 걸어야 하니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는 지하철로 가는 방법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곤 한다. 이유는 언제나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이용하는 구간은 서울지하철과 경의선 합쳐 여섯 역. 지난주 출퇴근 시간만 이용해 300쪽 가까운 이 책을 읽었으니 출퇴근 시간만 잘 활용해도 한 달에 4, 5권은 읽을 수 있고, 1년이면 50권이 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그래도 책 읽을 시간이 없으신가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이야기 관련 글을 쓰자니 언젠가 딸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요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이 많아져 나도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어야 겠다"던. 그러고 보면 책 읽기도 누군가를 전염시키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책을 읽게 하는 내 책읽기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유익한 그런 전염병이라 표현하면 마땅할까.

아마도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과 그들이 읽는 책을 주인공으로 한 책으로는 유일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을 전염시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의 전자파보다 책의 향기가 더 그윽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지하철 독서 여행자> | 박시하 (지은이) | 안지미 (그림) | 인물과사상사 | 2015-11-30 | 13,000원

지하철 독서 여행자

박시하 지음, 안지미 그림,
인물과사상사, 2015


#책읽기 #지하철 #산문집 #노란집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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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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