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선조의 변명

[대구 정사철, 서사원, 최동보가 남긴 의병 유적] 금암서당, 이강서원, 삼충사 묘정비

등록 2016.02.17 11:53수정 2016.02.1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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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대구 지역 선비들로부터 의병대장으로 추대받았던 정사철을 기려 세워진 금암서당. 정사철이 학문적 벗 전경창(1532∼1585)의 죽음을 애도하여 읊은 만사(輓詞)에 나오는 표현 '옛집 동산의 매화와 대숲도 슬퍼하는구나(故園梅竹帶悽悲)'처럼 2월 초순인데도 서당 앞뜰의 매화에는 볼그레한 꽃망울이 맺혀 있다. ⓒ 정만진


임진왜란이 일어난 달인 1592년 4월, 읍성을 왜적들에게 빼앗기고 팔공산에 피난 중인 대구 유지들에게 선조의 교서가 도착한다. 교서는 창의(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를 재촉하는 명령을 담고 있었다. 이 교서의 내용은 임진왜란 초기 대구 지역 의병대장이었던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의 <낙재일기> 중 '壬辰四月日有旨(임진4월일유지)'라는 제목 아래에 실려 있다.

유지(有旨)는 '임금의 말씀(旨)이 있었다(有)'는 뜻이다. 즉, '임진사월일유지'는 1592년 4월 어느날 (대구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선조의  교서(敎書)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선조는 4월 29일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蒙塵, 임금의 피난)을 떠나 5월 1일 개성에 도착했으므로 대구 의병장들이 교서를 받을 즈음 아직 서울에 있었거나, 아니면 경기도 어느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 처소)에 머물렀을 것이다.


선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됐다"

교서라고 해서 임금이 직접 붓을 들고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명으로 교부되는 문서이므로 교서에는 임금의 뜻이 담겨 있다. 대구 선비들은 이날 무릎을 꿇고 교서를 받았을 것이고, 명령에 복종하려는 충심으로 마음을 불살랐을 터이다.

구본욱의 저서 <임하 정사철과 낙애 정광천 선생>에 따르면 '평생 동안 여러 곳에 서당을 열어 지역의 인사들을 교육'한 결과 '(대구의) 의병들은 모두 그에게 강학을 받았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30∼1593)은 '눈물을 흘리며' 교서를 대한 뒤 '노구를 이끌고 창의를 도모'하게 된다. 

'지금 영남의 부(府)와 진(鎭)이 계속 왜적에게 함락되는 것은 도(道)의 병력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 고을의 군민들이 바람처럼 달아나고 무너져서 와해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들의 본심이 어찌 왜적에게 투항하여 복종하려 하였겠는가? 만일 하나하나 효유(曉諭, 깨우침)하여 선비들이 충의로써 격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또 자제(子弟)와 노복(奴僕, 계집종과 사내종)들을 거느려서 관군과 협동하여 힘을 합해 죽기로 싸운다면 오히려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 원주 사람 원충갑은 한 필부로서 의려(義旅, 의병)를 창솔(唱率, 앞장서서 이끎)하여 많은 적을 물리쳤으니 이것이 하나의 증험(證驗, 증거가 될 경험)이다. 상호군 김륵을 본도(本道)에 뽑아보내어 원근을 두루 효유하고 선비들을 격려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근왕(勤王, 임금을 가까이서 모심)하게 하도록 병조(兵曺, 국방부) 등에서는 전교(傳敎, 교서를 주어 알림)를 내려 시행하라.'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의중을 담은 이 교서는 매우 정치적이다. 교서는 '첫째, 우리의 군사가 적어서가 아니라 전란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영남의 여러 지역이 왜적들에게 함락되었다. 둘째, 군사와 일반 백성들이 달아난 것도 왜적에게 항복할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역시 전란이 창졸간에 일어난 때문이다. 셋째, 선비들이 사람들을 일깨우고, 자신의 자제와 종들을 거느리고 싸움에 앞장선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넷째, 관군과 힘을 합해 죽기로 싸운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랴. 다섯째, 필부에 불과한 원충갑(元冲甲)이 고려 때 자신의 향토 원주를 지켜낸 일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겠지?' 하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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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1592년 정월 선조들의 묘소를 수축하고 선영에 제사를 지내며 슬퍼했던 정사철과, 그의 아들로 의병 활동을 했던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1553∼1594)을 기려 세워진 <임하 선생 낙애 선생 양 임란 창의비>를 비롯한 빗돌들과 (정광천 묘소 앞의) 시비(오른쪽 사진) ⓒ 정만진


교서의 치밀한 논리는 원충갑(1250, 고려 고종 37∼1321, 충숙왕 8)을 거론한 데서 절정에 도달한다. 원충갑은 시골 관청에서 실시하는 과거 향공(鄕貢)에 합격한 진사(進士)에 지나지 않았지만, 카다안(哈丹) 군이 철령(鐵嶺)을 넘어 난입한다는 소문만 듣고 모두들 달아나는 통에 수비를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분연히 일어나 향토 원주를 지켜낸 인물이다. 그러므로 원충갑은 선조가 교서에 예시 인물로 거론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고을을 지켜야 마땅한 수령과 관군들이 적의 공격 소문만 듣고 도망쳐버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런데 원충갑은 홀로 의병으로 나서서 향토를 지켰다. 원충갑은 문신이고, 진사 정도에 머물렀던 사람이다. 지금 교서를 받는 전국의 선비들도 원충갑처럼 진사 정도의 신분을 가지고 있고, 역시 원충갑처럼 문신들이다. 따라서 원충갑을 본받아 창의를 해야 마땅하다. 그런 논리로 선조는 '왜 산속에 숨어 있나? 네 땅은 네가 지켜야지!' 하고 선비들을 책망한다.

그러면서 교서는 아직 창의를 하지 않고 숨어지내는 선비들에게 '도망갈 구석'을 열어준다. '각 고을의 군민들이 바람처럼 달아나고 무너져서 와해되기에 이르렀지만, 그들의 본심이 어찌 왜적에게 투항하여 복종하려고 하였겠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런 배려를 깔고 있는 부분이다. '단지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런 행동을 취한 줄 임금이 다 헤아리고 있으니 지난 일은 걱정하지 말고 이제라도 창의에 나서 공을 쌓으라는 주문이다.

교서는 또 관군과 힘을 합해 싸우라는 지시도 곁들인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창의 후 관군의 지시를 받으라는 함의가 숨어 있는 표현이다. 물론 교서는 선비들에게 집안 자제들과 노비들을 이끌고 직접 나설 것과,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도 맡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선조는 '본래 각 고을의 일반 백성들은 너희들이 관리해 왔지 않나?'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교서는 선조와 대신들의 무능에 대한 책임 추궁 소지를 없애버리는 역할도 한다. '우리의 군사가 적어서가 아니라' 하는 구절은 자신들이 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충분히 확충해 두었다는 뜻이다. 조정은 전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생각해 맞설 수 있을만큼 군사를 길러두었는데, '단지 (세계 정복의 허황한 꿈에 젖은 풍신수길 탓에)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는 것이다. 죽음과 부상, 굶주림과 이별 등등 모든 것은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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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철에 이어 대구 의병대장을 맡은 서사원은 정사철이 창건하여 강학하다가 임란 때 불탄 선사서당 자리에 선사재를 재건하여 평생의 강학 장소로 삼았는데 뒷날 후학들이 대구 두 번째 서원인 이강서원으로 발전시켰다. ⓒ 정만진


과연 임진왜란은 '창졸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시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일까? 구본욱의 저서는 정사철이 '1592년 정월  자질(子姪, 후손)들에게 멀지않아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선조들의 묘소를 수축(修築, 고치고 쌓음)하게 하고 선영(先塋, 선조의 산소)에 제사를 지내며 크게 슬퍼하였다'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정사철의 글을 모아 후손들이 간행한 <임하실기> 중 '행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대구 지역 의병대장으로 추대되는 정사철

1592년 7월 6일 대구 의병 편제

대장 : 정사철, 서사원
공사원(工事員) : 이주
유사(有司) : 이경원, 채선행
읍내: 용덕리 (항병장)하자호 / (유사) 주심언
북산리 김우형 / 서사진, 무태리 여빈주 / 류호
달지리 서득겸 / 박유문, 초동리 서사술 / 서사준
이동리 배익수, 채응홍 / 서행원
신서촌 설번 / 백시호
수성현: 대장겸 현내장(縣內將) 손처눌 / 유사 손탁
동면 (항병장) 곽대수 / (유사) 곽렴
남면 배기문 / 류창, 서면 조경 / 전길
북면 채몽연 / 박득인
해안현: 오면(五面) 도대장(都大將) 곽재겸
상항리 (항병장) 곽재명 / (유사) 전상현
동촌리 우순필 / 최인개, 서부리 최의 / 이사경
북촌 류요신 / 홍익, 서촌 민충보 / 배찬효
하빈현: 대장 겸 서면장 이종문 / 유사 정악
남면 (항병장) 정광천 / (유사) 곽대덕
동면 홍한 / 정용, 북면 박충윤 / 이유달

1592년(선조 25) 당시 대구는 '대구도호부'였다. 대구도호부는 중심가인 읍내, 읍내의 동쪽 일원인 해안현, 남쪽인 수성현, 서쪽인 하빈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남쪽으로 화원현도 있었지만 대구도호부가 아니라 성주목 소속이었다.

그래서 왜적들에 대항할 의병을 조직할 때에도 이 행정구역 편제에 따랐다. 선비들은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 모여 읍내 7개의 리(里)와 3개 현(縣)에 의병을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회의는 정사철을 (대구 전역의) 의병대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읍내와 해안현은 각 마을 및 현 단위로, 수성현과 하빈면은 대장(향병장)과 유사(有司, 실무 책임자)를 두었다. 다만 각 현에는 전체 지역을 관장하는 대장을 별도로 선임했다.

정사철은 6월 1일 아들 정광천을 팔공산에 보내어 서사원, 이주, 채응홍, 서행원, 이상문, 은복홍 등과 창의를 논의하게 하고, 또 손처눌, 채몽연, 전길과도 의견을 나누었다.

정사철은 전란 발발 무렵 대구 유림의 최고 지도자였다. 임진왜란 때 대구에서 창의한 의병들은 모두 명종 대와 선조 대의 대구 유림을 대표한 정사철, 전경창(全慶昌, 1532~1583), 채응린(蔡應麟, 1529~1584) 세 사람으로부터 배운 제자들이었는데, 1592년에는 정사철만 생존해 있었다. 그리하여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지역 의병, 즉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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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철에 이어 대구 의병대장을 맡은 서사원을 기리는 이강서원의 솟을대문 ⓒ 정만진


하지만 63세로 대구 최고령 유학자였던 정사철은 7월 16일 노비 둘을 시켜 다리에 난 종환(腫患) 때문에 향병(鄕兵)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전갈을 부인사 의병소로 보낸다. (정사철은 이듬해 3월 4일 병으로 타계한다.)

그래서 서사원이 의병대장을 이어서 맡게 된다. 서사원은 자신의 1592년 7월 18일자 <낙재일기>에 '사람들이 모여 모두가 의병장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다, (모인 선비들이)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정상사(鄭上舍, 정사철)를 대신하라는 첩자(帖子, 문서로 낸 의견)를 내었으므로 나는 사양했지만 부득이 그것을 맡았다'라고 적고 있다.

병중의 정사철 대신 의병대장을 맡는 서사원

그런데 서사원의 <낙재일기>에도 일본의 전쟁 도발 가능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날인 1592년 4월 12일자 일기가 놀랍다.

'밤에 내가 혼자 연방(蓮房, 서사원 집의 사랑채인 연정에 딸린 방)에서 잠을 잤는데 꿈에 부산 첨사의 상여가 뜰 안에 들어와 놓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놀라 잠에서 깨어나 괴이하다는 탄식을 그치지 못하였다.'

서사원이 이런 꿈을 꾼 것은 그가 평소에 전란 발발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첨사의 상여가 몽중에 등장한 것은 위치로 볼 때 일본의 침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상여는 왜 보였을까? 이는 '우리의 군사가 적어서가 아니라 전쟁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교서의 내용과는 달리 당시의 조선인들이 정부의 전쟁 대비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처참하게 질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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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사 묘정비(三忠祠廟庭碑). 최인, 최계, 최동보를 기려 세워졌다. 묘정비는 향교나 서원의 뜰에 세워져 있는 빗돌로, 건립 과정 등의 내력과 모시고 있는 인물에 대한 추모의 글이 새겨진다. ⓒ 정만진


'다른 사람들은 비록 사방으로 흩어지더라도 (중략) 병기(兵器)를 만들어 준비해서 적의 선봉을 만나면 토적(討敵, 적을 토벌)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그러자!'고 했다. 곧바로 집의 종 복수에게 명하여 각 집에서 쓰는 쇠그릇과 집 안에 모아둔 무쇳덩이 2백 근을 모으고, 또 대장장이 화석에게 명하여 긴 창과 큰칼 3백여 자루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집에 간직한 곡식 5백 섬을 내고 각 집에 모아둔 곡식 8백여 섬을 모아 굳게 간직해 두었다.

의병장 최동보(崔東輔, 1560∼1625)의 <우락재실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놀랍게도 최동보가 이 일을 한 때는 1592년 4월 5일이었다.

대구 선비들, 임진왜란 발발을 예견하고 준비했다

대구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의병이 결성된 때는 7월 6일로 확인되지만, 그 이전에도 의병장들은 개별적으로 왜적과 싸웠다. 그중 한 사람이 최동보이다. 그는 전란 발발 당시 33세였는데 그의 숙부 최인과 함께 대구에 진입한 4월 21일 바로 뒷날인 4월 22일, 왜적들이 반야(동구 반야월) 지역에 몰려오자 의병들을 이끌고 나아가 최초의 전투를 펼쳤다.

어떻게 이토록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을까? <경산 시지(1997)>의 '영남의 사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훨씬 전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수시로 만나 동고동락을 약속한 바 있어 의병장들의 유기적 연대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라는 기술이 참고삼을 만하다. <경산 시지>는 지역 의병장들의 유기적 연대가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문장을 썼겠지만, '영남의 사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훨씬 전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는 대목이 더 눈길을 끈다. 구본욱도 논문 <대구 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에서 '(서사원처럼 왜란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염려한 기록은 대구 지역 인사의 기록에도 여러 곳에 발견되고 있다'고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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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충사묘정비 뒤의 다천정(茶川亭). 다천은 이 집을 지은 최계의 아들 최동률의 호. ⓒ 정만진


정광천은 아버지 정사철을 모시고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술회가' 6수와 '병중(病中)술회가' 3수의 가사를 지었다. 그의 글을 모아 간행한 <낙애일기>에 실려 있는 두 노래에는 나라와 부친을 걱정하는 심정이 깊이 서려 있다. 그 중 '술회가'는 1592년 11월 15일에 지었다.

'설울사 설울시고 민망함이 그지없다.
병진(兵塵, 전쟁의 먼지)이 막막하니 갈길이 아득하다.
어느제 수복고국(收復故國, 나라를 되참음)하여 군부(君父, 임금과 아버지) 편케 하려뇨.'

이 시를 새긴 시비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달구벌대로 126길 58-8 금암서당 뒤편 소나무 숲속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정사철, 정광천 등의 유택(幽宅, 산소)이 있는 정씨 문중 묘역이다. 그리고 금암서당과 문중 묘역 중간 지점에는 부자의 의병 활동을 기려 세워진 '임하 선생 낙애 선생 양 임란 창의비' 등 기념 빗돌들이 나란히 서 있다.

금암서당은 정사철 타계 후 171년이 지난 1764년(영조 40), 대구 일원 선비들이 뜻을 모아 그의 묘소가 있는 대구 달성군 다사읍 연화리 연화산 아래에 금암사(琴巖祠)를 세운 데서 출발했다. 금암사는 1786년(정조 10) 금암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799년(순조 23) 이래 낙애 정광천도 종향(從享, 더불어 제사 지냄)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58년 금암서당으로 재탄생했다.

이강서원은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277에 있다. 이강서원 자리에는 본래 선사(仙槎)서당이 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탔다. 정사철이 1587년(선조 20) 선사서당을 세우면서 '신선(仙)이 타는 뗏목(槎)'이라는 뜻의 선사를 쓴 것은 이곳이 최치원이 머문 후 선사사라는 이름을 얻은 사찰의 터이기 때문이다. 그 후 1601년(선조 34) 서사원이 선사재를 중건하여 강학 장소로 삼았다. 이강서원이라는 새 이름은 1636년(인조 14) 연강서원에 이어 대구 두 번째 서원으로 인정되면서 썼고, 1639년(인조 17) 이래 서사원을 모셨다.

최동보 유적인 삼충사 묘정비는 금암서당, 이강서원과 달리 달성군에 있지 않고 멀리 팔공산 초입에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벗어나는 '신숭겸 유적지'의 서쪽 끝자락, 파계사로 들어가는 대도로변의 지묘동 871-1번지에 홀로 자리잡고 있다.

'세 명의 충신'은 최인(崔認), 최계(誡), 최동보이다.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이 대구가장(假將, 임시 의병대장)으로 임명했던 최계는 최인의 동생이고, 최동보는 두 사람의 조카이다. 삼충사묘정비각의 안내판은 '경주 최씨일가 삼충(三忠)인 최인, 최계, 최동보 삼숙질(叔姪, 삼촌과 조카)이 임란에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 업적을 찬양한 충의사적비(忠義事蹟碑)'라고 자랑한다. 그럴 만한 일이다. 세 사람 모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최동보 #정사철 #서사원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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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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