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명량대첩 앞둔 이순신, '울돌목의 좁은 해로가 더 유리' 판단

등록 2016.02.18 18:35수정 2016.02.1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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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진도 벽파진 전경.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이끌고 명량대첩 이틀 전까지 머물던 포구다. ⓒ 이돈삼


이전 기사 '일본군 선발대, 어란 앞바다까지 왔다'에서 이어집니다.

1597년 9월 7일(양력 10월 17일), 일본군 전함 13척이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각 전함에 알리고 엄중 경계토록 했다. 오후 늦게 적선 13척이 조선수군을 향해서 돌진해 왔다. 임중형이 보고한 그들이었다. 이순신은 수군 전함의 닻을 올려 바다로 나아갔다. 당당히 맞서서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진해오던 적선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선수군은 달아나는 적선을 먼바다까지 쫓아갔다. 바람이 앞에서 불고 조수도 거꾸로 흘러 계속 쫓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숨어있는 적선이 있지 않을까 염려도 됐다. 더 이상 쫓는 걸 포기하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헛수고는 아니었다. 수군의 적극적인 방어와 공격에 적선이 쫓겨 도망갈수록 조선수군은 강해졌다. 왜선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수군의 사기가 높아지면서 일본군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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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어란진 풍경.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일본군은 수시로 이 바다까지 드나들며 정탐활동을 했다. ⓒ 이돈삼


이순신은 그날 밤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오늘 밤에는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다. 여러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를 하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다." 이순신은 장수들한테 일일이 다짐까지 받았다.

이순신의 예상 대로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 공격을 해왔다. 이순신은 제장들에게 엄명을 내리고 앞장서 적선 앞으로 나아갔다. 지자포를 쏘며 맞불을 놓았다. 적막하던 밤바다가 포 소리로 진동을 했다.

적선도 계속 포를 쏘아댔다. 한밤중의 공방전이었다. 생각보다 강하게 나온 조선수군의 기세에 눌렸을까. 적선이 뱃머리를 돌리더니 이번에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적선은 포를 쏘며 용용하게 모습을 드러낸 지 두어 시간 만에 완전히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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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에 세워진 이충무공 대첩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머물던 벽파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 이돈삼


9월 9일은 중양절이다. 예부터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이 귀하게 여긴 세시다. 나라에서는 임금이 참석하는 제사를 올렸고, 사가에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날이다. 이순신에게는 일본군을 앞에 두고 있는 데다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어서 중양절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부모형제를 뒤로 하고 전장으로 나온 군사들은 달랐다. 이순신은 부대 안에 있던 소 5마리를 녹도와 안골포 만호에게 내주고 군사들에게 나눠 먹이도록 했다. 소는 지난 9월 초하루에 점세가 제주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소를 잡아서 군사들에게 먹이고 있는데, 적선 두 척이 수군의 진영을 정탐하고 있었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먹던 고기를 놔두고 쫓아갔다. 이번에도 적선은 곧장 달아났다.

이순신의 휘하 군사들이 모처럼 배를 듬직하게 채운 하루였다. 군사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이순신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왜선의 기습 공격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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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본 해남 우수영 전경. 벽파진에 머물던 이순신이 명량대첩 이틀 전에 진을 옮겨 설치한 곳이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여기에 머물면서 명량대첩을 이뤄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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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와 울돌목.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은 이곳 울돌목의 물살을 이용할 전략을 마련하고 벽파진에 있던 수군진을 우수영으로 옮겼다. ⓒ 이돈삼


같은 시각 일본군 진영에선, 많지도 않은 조선수군의 함대로 인해서 육상 진출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에 몹시 불쾌해 했다. 곧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서 밀어버리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조선수군과 일본군과의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9월 14일. 명량해전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정탐활동을 나간 임준영이 돌아와서 이순신에 보고했다.

"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와 있사옵니다.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듣고 도망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 수군 10여 척이 쫓아와서 사살하고 불을 태웠다면서 보복을 결의하고, 우리를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했답니다."

이순신은 정탐활동을 통해 얻은 정보를 다 믿기는 어려웠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순신은 먼저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 피난민들을 뭍으로 올라가도록 했다. 자칫 백성들이 화를 입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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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어란 앞바다 풍경. 정탐활동을 나갔던 임준영이 돌아와서 이순신에 보고하기를, 일본전함 55척이 여기까지 들어와 있다고 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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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우수영관광단지에 세워진 고뇌에 찬 이순신상.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고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 이돈삼


이순신은 제장들과 함께 일본군의 기습 공격에 대응한 방어책을 논의했다. 아직도 열세에 놓인 병력으로 일본군과 어떻게 맞서야 할지 고민중이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있던 수군진을 우수영으로 옮기기로 했다. 적은 병력과 함대로 많은 수의 일본군과 왜선에 맞서려면 울돌목의 좁은 해로가 적합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강한 해류 탓에 적이 쉽사리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구천부, 一夫當經 足懼千夫)'는 이순신의 말도 이 물목을 염두에 둔 지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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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현장인 울돌목의 거친 물살. 이순신은 이곳의 물살을 활용해 일본군을 물리칠 구상을 했다. 해로는 좁고 해류는 강한 지역의 특성을 파악한 전략이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11월과 12월 두 차례 답사했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명량대첩 #이순신 #조선수군재건 #조선수군재건로 #벽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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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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