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의 '흑돌' 제안, 이 기자 질문 없었다면

[取중眞담] 이세돌 9단 첫승 기자회견, NHK 기자 질문만 남달랐을까

등록 2016.03.14 21:10수정 2016.03.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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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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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기자가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4번째 대국이 끝난 뒤 데미스 하사비스 딥바인드 CEO에게 질문하고 있다.(구글 유튜브 생중계 영상 갈무리) ⓒ 구글


"(실수를 확인할 수 없는) 알파고를 의학에 접목하면 큰 혼란이 생기지 않겠나?"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처음 승리한 지난 13일 일본 NHK 기자의 질문이 누리꾼 사이에 큰 화제였습니다.

NHK 기자 질문에 누리꾼들 찬사

이날 제4국 직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일본 기자는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대표에게 "바둑 전문가들이 알파고의 실수라고 여겼던 수가 나중에 묘수가 되기도 했다"면서 "(알파고를) 사람 생명과 직결된 의학에 접목했을 때, 의료전문가들은 오류라고 본 것이 나중에는 더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지면 더 혼란을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단순히 이날 승부를 떠나 인공지능 발달이 의학 등 다른 분야에 미칠 영향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하사비스 대표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알파고는 '프로토 타입'(시제품) 단계 프로그램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면 (이세돌 9단 같은 고수와) 이런 경기를 계속 치러야 한다"면서 "바둑은 게임이지만 의료·보건 분야에 적용하려면 아주 엄격한 시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알파고를 의료 분야에 적용하기엔 아직 큰 격차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NHK 기자의 질문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 받으면서 다른 한국인 기자 질문에 불똥이 튀었습니다. 한 마디로 '수준 차이'가 난다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이날 기자간담회와 앞선 대국에서 나온 기자들 질문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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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이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4번째 대국에서 알파고에 승리한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오자 기자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 구글 제공


우선 평소 질문자를 3명으로 제한했던 주최 쪽은 이날 네 번째 대국이 끝난 뒤 평소보다 많은 기자 6명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질문 기회가 너무 적다는 기자들 불만이 컸던 데다, 마침 이세돌 9단이 첫 승을 거두면서 들뜬 현장 분위기도 반영된 듯합니다. 질문자는 외신이 2명, 국내 언론이 4명이었습니다.


한국 기자들, 알파고 '져주기' 의혹에 하사비스 가능성 일축

앞서 NHK 기자 첫 질문이 끝난 뒤, KBS 기자는 역시 하사비스 대표에게 알파고에게 분산형과 싱글형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이날 대국에서 이전과 다른 버전이 사용됐는지 물었습니다. 앞서 3연승하면서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던 알파고가 이날 이 9단에게 패하자, 알파고 실력을 일부러 낮춰 져준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죠.

하사비스는 이번 대국에서 모두 같은 분산형 버전이 사용됐다면서 이 같은 의혹을 일축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의 의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어 연합뉴스 기자는 알파고가 상대 실력에 맞춰 수준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지 물었습니다.

마인드 개발자인 데이비드 실버 역시 "알파고는 상대가 누군지, 형세와 무관하게 상대방이 최선의 수를 둔다는 가정 아래 승률이 가장 높은 곳에 돌을 놓는다"고 나름 반박했습니다.

SBS 기자도 이세돌 9단에게 이날 승리가 자신의 의도 대로 풀린 경기였는지, 알파고의 실수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아울러 대국 전 국내 바둑계에서 논란이 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도 거론했습니다.

이에 이세돌 9단은 알파고의 약점 2가지를 거론했습니다. 알파고가 백보다는 흑을 힘들어 하고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수가 나왔을 때 버그 형태로 수가 진행이 됐다는 것이죠. 정보 비대칭성 문제에 대해서도 "알파고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면 수월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겸손한 대답을 내놨습니다.

하사비스 대표도 "이세돌 9단 기보나 기풍에 맞춰 알파고를 훈련시킨 게 아니라 일반적인 바둑 훈련을 시켜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는 없고 동등하게 대결했다"면서 "알파고를 학습시키려면 수백만 수천만 게임 정보가 필요한데 (이세돌 9단의) 수백 수천 개 기보만으로 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기자들은 이처럼 알파고가 3연승 뒤 1패한 걸 '이례적 상황'으로 보고, 그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이를 승부에만 너무 집착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일반적인 한국인 독자와 시청자들의 눈높이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한국일보 기자가 이 9단에게 3연패로 정신적 충격이 컸을 텐데 팬들에게 걱정 불식시키는 말을 부탁하면서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소 가볍고 뻔한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9단은 멋지게 화답했습니다. 

이 9단은 "즐겁게 바둑을 둬 큰 내상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이번에 백으로 이겨 마지막 대결은 흑으로 이겨 보겠다"고 딥마인드 쪽에 즉석 제안해 동의를 받았습니다. 이날 기자간담회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답변이 한국일보 기자의 '뻔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죠(관련기사: 이세돌의 도발 "흑돌 약한 알파고, 다음엔 내가 흑돌").

이세돌, 평이한 질문에도 '우문현답'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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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이 13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4번째 대국에서 알파고에 승리한 뒤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구글 제공


아무래도 한국 기자들은 자국에서 열리는 대국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 바둑 기사가 출전한 경기여서 승부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번 대국을 지켜보는 대다수 한국 국민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한국인인 기자들도 이세돌의 승패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었고 이날 이 9단이 기자회견장에 들어올 때 기자단에서 큰 박수가 터진 것도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난 12일 3국이 끝났을 때 영국 가디언지 기자가 이세돌 9단에게 "고국인 한국에서 대국이 열려 더 압박감을 느낀 게 아니냐"고 질문한 것도 이런 한국적 정서를 느꼈기 때문 일 겁니다.

반면 외신 기자들은 이번 대국 승부 자체도 큰 관심거리지만, 앞으로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에도 동등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취재 기자들 가운데 바둑을 잘 아는 기자들이 많은 반면 외신은 상대적으로 IT(정보기술)쪽 전문 기자들이 많았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이세돌 9단의 승패에 대해선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다만 바둑이 국기인 중국 텐센트 기자는 중국 구리 9단이 이날 '신의 한 수'라고 평가한 '78수'에 대해 물었죠. 

결국 이날 질문 때문에 한국인 기자들의 수준이 떨어졌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12일 YTN 기자는 알파고의 기풍과 실력이 기존 바둑계에 '3차 혁명'이라는 메시지를 줄 정도라고 보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이세돌 9단은 "굉장히 놀라운 프로그램이지만 아직 완벽한 신의 경지 오른 정도는 아니다"라면서 "1, 2국 모두 조금씩 약점은 보여 인간에게 메시지를 던질 실력은 아니었다"고 다음 대국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아울러 "오늘 패배는 이세돌이 패한 거지 인간이 패한 건 아니다"라는 명언도 남겼습니다(관련기사: "이세돌이 패했지 인간이 패한 건 아니다").

결국 아무리 훌륭한 질문이 나와도 답변이 부족하면, 좋은 질문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거꾸로 이세돌 9단은 질문의 수준을 뛰어넘는 훌륭한 답변을 했기 때문에 우리 국민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이죠. 부디 남은 대국에서도 승패를 떠나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랍니다.
#이세돌 #알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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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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