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형무소가 불 타던 날, 놋그릇 덕에 살았다

문철근옹이 말하는 1950년 청주형무소 민간인학살

등록 2016.03.23 16:00수정 2016.03.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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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타버린 청주 형무소 ⓒ 박만순


언제 끌려 나갈지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순간 싸한 휘발유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지'라는 생각은 잠시, '이러다 불에 타죽겠구나'라는 생각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동료들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감방을 뛰쳐나온 날은 1950년 9월 24일경이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문철근(현 89세, 청주시 서원구 수곡동 거주)옹이 1950년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에 대해 입을 열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2008년 발표한 '청주지역 신교식 등 8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및 강제연행사건'에서도 생존자 증언은 없었다. 목격자 및 전문자(傳聞者)만이 있었을 뿐이다. 최소 234명이 죽은 청주형무소 사건이 당사자에 의해 민낯을 드러내기는 66년 만의 일이다. 아래는 문철근옹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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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문철근 ⓒ 박만순


의열단에 맞아 신명의원에 입원하고

해방 후 청주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적산가옥은 우익단체가 무단으로 점거해 사용했고 시내에는 깡패가 득시글해, 현재의 성안길이라 불리는 본정통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철근은 어느 날 박기운으로부터 치안대 활동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지금 누군가가 희생되더라도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러면 깡패를 제압해야 한다. 그런데 친구들도 호응을 하지 않는다. 동지가 함께 해줬으면 한다."

박기운의 제안에 문철근은 흔쾌히 동의했다. 박기운은 일본 와세다대 중퇴생으로 초대, 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청주경찰서에서 99식, 38식 총을 나눠받은 치안대원들은 박기운으로부터 사격법을 배우고 치안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총보다 주먹이 먼저였다. 푸른색 하의에 붉은색 상의의 단복을 입은 의열단원(단장 김팽조) 이창구에게 죽도록 맞은 문철근은 신명의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입원하면서까지 치안대 활동을 열심히 한 것이 후일 반동으로 몰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무는 뭐 하는 사람이오?"

6.25 직후 문철근은 미원을 경유해 보은 방향으로 피난을 갔다. 미원에서 하룻밤을 잔 그는 지게에 밥을 싣고 피난길에 나섰다. 길을 가로막은 인민군의 "동무는 뭐 하는 사람이오?" 물음에, 상과대(현재의 청주대학교) 학생증을 내밀었다. "동무! 해방이 됐으니 집으로 돌아가시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를 경유, 보은으로 피난가다 결국 길이 막혀 청주로 돌아왔다.

청주에 오자마자 길거리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인민군 정치보위부가 있던 민주식 별장 지하실로 끌려갔다. 4~5일 구금되어 있는 동안 구경한 것이라곤 소금 덩어리와 주먹밥뿐이었다. 또 하나는 자술서. 자술서에 쓴 치안대 활동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빌미가 되었다.

1사 23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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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형무소 평면도 ⓒ 박만순


정치보위부에서 기초조사를 받은 그는 청주경찰서 유치장을 경유해 탑동에 있던 청주형무소에 끌려가 감금됐다. 1사 23감방이 그가 갇힌 곳이었다. 한 감방에 18명이 있었는데, 대부분 우익단체 활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운명의 날은 다가왔다. 1950년 9월 24일 조명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구둣발자국 소리가 요란히 났다. 1, 2감방 문을 열고 감금되었던 사람들을 끌고 나간 후 총소리가 난 것은 잠시 후였다. 이어서 3~6감방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을 끌고 가 학살했다. 잠시 후에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소리가 들리더니 휘발유 냄새가 났다. 인민군과 지방좌익들이 청주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던 우익단체원들을 일일이 죽일 시간이 없자 불태워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놋그릇과 똥통 때문에 살아남아

23감방에 있던 사람들이 놋그릇과 똥통 작대기로 감방문을 부숴 형무소 뒷문으로 갔다. 거기에는 축구 국가대표 선수인 김진우의 형 김흥권이 있었다. 형무소 뒷문에 있던 사람들은 전봇대 지선을 타고 탈출했는데, 이때 살아난 이가 약 200명 이었다. 이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당산(동공원)에서 총 맞아 죽고, 형무소에서 불타 죽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9월 24~25 양일간에 당산에서 220명, 형무소에서 14명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또한 같은 시기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돼 있던 120여 명이 서문다리 아래에서 학살되었고,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갇혀 있던 95명의 우익인사가 산성리 토굴(민영은 묘지 아래쪽)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이틀 동안 죽은 인원이 449명인데, 이는 최소한의 수치이며, 최대 1천 명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념의 과잉시대에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에 불과했다. 하지만 치안대활동을 한 것이, 구장(이장)과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것이 죽을 만큼의 죄를 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은 국군수복 후 부역자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고, 감금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불운한 역사의 반복이었다. 시대와 이념을 초월해 존중되어야 할 것은 인권 존중의 정신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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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에서 학살된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 박만순


#청주형무소 #청주형무소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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