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는 괜찮은데 도미노는 안 된다?

[로또교실15] 일과 여가의 균형 맞추기

등록 2016.04.08 14:41수정 2020.01.0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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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 애가 이거 해서 먹고살 수 있을까요?"


근원이(가명) 어머니는 대뜸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셨다. 담임을 맡은 지 3주째 되는 상담주간의 어느 날이었다.



근원이는 도미노를 좋아한다. 쉬는 시간 10분을 아껴 부지런히 도미노를 쌓아 노는 모습이 기특했다. 학교 생활을 물어보시는 어머님께 도미노 얘기를 꺼냈다. 관찰한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한숨을 쉬셨다. 같은 동네 사는 정미와 재용이는 큐브를 맞추며 노는데 근원이는 도미노를 한다고 걱정하셨다.


'도미노를 잘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웬 장래 걱정이실까?'



어떻게 응대를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내 말수가 적어지자 학부모님은 자신이 치킨집을 하고 있으며, 평소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또 근원이가 학습과 관련된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도미노를 반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큐브는 암기력 향상과 두뇌 계발 효과가 있어 성적에 도움이 되는데 도미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불안하시구나.'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일 년 학급살이를 하다 보면 꼭 몇 분씩 만나게 되는 유형이었다. 굳이 학부형이 믿고 있는 이유가 비과학적이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도미노는 핵심이 아니었다. 그저 부모 세대보다 자식들이 더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는데 방법을 모르니 불안한 상태였다. 아이가 행복하게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막막하고 허한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은 주로 '분주해지기'였다.



근원이의 방과 후 일정은 빡빡했다. 집에서 노느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근원이가 학교 숙제를 해오는 게 용했다. 그 녀석은 힘든 티 안 내고 버거운 일과를 버텨내고 있었다. 차라리 학교에서라도 도미노하고 놀아줘서 다행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며 거듭 잘 부탁하다고 하셨다. 상담 종료 후 근원이에게 가급적 과제를 주지 않았다. 갓 12살이 된 어린 친구에게 필요한 건 여유였다.


 

도미노 조각들. 누군가에게는 작품의 재료가 된다. ⓒ 이준수


상담 주간의 총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성실함의 남용'이었다.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무한 경쟁 시대의 불안이 학부모와 아이들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학업을 수행하거나 직업을 얻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아 보이는 일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같은 독서라면 대중 문학보다 자기계발서가 낫고, 어차피 할 게임이라면 롤(리그오브레전드)보다 마인크래프트가 낫다는 식이다. 다 동의할 만한 선택이다. 그러나 너무 어릴 때부터 일거수일투족이 실용성이라는 가치로 재단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거 하면 돈 되냐?"
"그거 하면 공부 잘하냐?"



실용성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학업에 방해되는 또는 거리가 있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고 학습목표에만 에너지를 쏟으니 당연히 성적은 오른다. 밤이 되면 몸이 뻐근할 정도의 성실한 삶이다.



이렇게 근면하게 사는데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행복하지 않다. 성실이 너무 맹목적이다. 무엇을 위하여 바쁜 것인가? 이 질문이 빠져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데 스스로에게 답할 기회도 없이 자꾸만 다음으로 미룬다. 나이가 들어도 눈O이 영어(학습지)가 토익 문제집으로 대체될 뿐 생활의 양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일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열심히 살아도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인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13년 기준으로 2163 시간이다. 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일과 학업에 눌려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적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다. 일만 하다가 끝나는 게 인생이라면 서글프다.


 

아이들의 쉬는 시간을 지켜주자. ⓒ 이준수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새가 양 날개로 날듯이 일과 놀이, 노동과 향유의 균형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은 향유를 위한 충분조건이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상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은 행복해질 권리를 보장해줄 뿐 현실에서 행복을 찾아 써야 하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일이 많아서 가족들과 부대낄 수 없고 취미활동이나 여가를 누리지 못한다면 일을 줄여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도미노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그건 아무도 모른다.


촤르르르 탁! 도미노 막대가 차례로 쓰러지더니 탁구공을 친다. 탁구공은 나무 장벽을 따라 굴러 가다가 얇은 책을 건드린다. 일렬로 늘어선 책들이 줄줄이 쓰러진다. 책 위에 설치되어 있던 압정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풍선을 터뜨린다. "예에~ 나이스!" 눈에 열망이 가득한 꼬마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근원이의 도미노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압정, 자, 연필, 탁구공 등 도미노와 관련 없어 보이던 물체들이 추가됐다. 도미노에 관심 없던 친구들이 전문가의 손놀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보현이는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었고, 유정이는 소리 없이 옆에 앉아 쓰러진 블록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미 근원이의 도미노는 단순한 블록 넘어뜨리기 게임을 넘어섰다.


도미노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직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저렇게 신나서 터져나오는 함성과 얼굴 가득히 퍼지는 환희.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유 #일 #놀이 #균형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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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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