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다르게 채색하다

등록 2016.04.07 17:30수정 2016.04.0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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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아니지만 빛바랜 사진을 보며 과거를 회상할 때가 있다. 즐거운 추억도 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국가 역시 공식/비공식적으로 사진이나 기록을 남겨 놓는다. 어떤 것은 대중에게 공개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비밀로 취급되어 공개되지 않는다. 여주에 위치한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가보면 한켠에 명성황후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자료들은 모두 공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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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의 기록들 ⓒ 최홍대


2016년은 명성황후가 태어난 지 165주년이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에 빗대어서 생각해보면 명성황후가 태어나고 한반도는 16번을 넘게 강산이 변화한 셈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어떤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것은 과장되고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명성황후 기념관이 이곳에 만들어지게 된 것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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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초상화 ⓒ 최홍대


기념관 입구에 들어오면 먼저 만나게 되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어진뿐만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여흥민씨들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설날과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열려 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왕실로 들어오기 전부터 조선은 격변의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왕비 간택이 발표되기 하루 전인 1866년 3월 6일 광화문 동쪽에 있는 훈국화사의 가가에서 불이 났다. 이때 경복궁 중건에 사용될 목재가 소실되었다. 당시 왕실의 재정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소실된 목재를 대체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지만 대원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진하면서 민심은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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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순종황제의 국상 ⓒ 최홍대


정면에 보이는 인물은 순종으로 순종황제의 장례식이 있었던 1926년에 사용된 사진이다. 고종의 장남으로 명성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일본이 강제로 하야시킨 고종의 뒤를 이어 1907년 7월 ~ 1910년 8월까지 3년 1개월동안 재위하였다. 1910년 8월 29일에 일제가 앞세운 이완용, 송병준 등이 한일합방을 단행하자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유폐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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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의 국상 국상을 따라가는 조선의 백성들 ⓒ 최홍대


지금은 다소 낯선 모습들이 사진에 담겨져 있다. 일본 순사들의 모습도 보이고 백성들이 순종의 국장을 보려고 나와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조선의 마지막 국왕의 장례를 사진으로 담아 놓은 것은 처음이나 마지막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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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장의 사진첩 국장일정 ⓒ 최홍대


'어장의사진첩' 마지막에 부착된 기록으로 국장일정이 적혀져 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 후 나흘 뒤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6월 1일에는 상복으로 갈아입는 성복의식을 하였으며 이어 6월 8일부터 조문을 받은 다음 6월 10일 봉결식을 거쳐 유릉에 순종을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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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왕비로 책봉되다. ⓒ 최홍대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되기 하루 전에 큰 불이 일어난 것은 그녀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명성황후가 왕실로 들어오기 3년 전에 이미 궁중생활을 시작한 고종에게는 총애하는 궁인 이씨가 있었다. 명성황후가 왕실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고종과 소원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중국의 경전및 고전과 조선의 명서들을 탐독하며 후일을 도모하였다.

어릴때부터 인품과 학식에 남다른 면모를 보였던 그녀는 조선이 혼란속에서 갈팡질팡할 때 대원군과 정치적인 입지를 다투고 있었다. 대원군을 끌어내리는데 성공은 하였으나 1882년 6월 5일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생명의 위험을 받게 된다. 이때 무예별감 홍계훈의 기지로 도성을 벗어나 이곳 여주 땅에 은신하였는데 대원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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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 은신하다 군사들을 피해 은신한 왕후 민씨 ⓒ 최홍대


여주에 은신하고 있는 왕후 민씨는 대원군의 국상선포로 인해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군란의 열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았을 때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자신의 생사를 알리고 청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요청을 받은 청은 군사를 보내 대원군을 납치하여 보정부에 연금하였고 왕후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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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왕실로 들어오는 절차 ⓒ 최홍대


왕실에 들어오면 모두가 화려한 생활을 하리라 생각했던 시절 그녀 역시 험난한 생활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후 민씨는 시해당하기 1년 전인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 운동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식객이기도 했던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농민운동은 대원군을 추종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그들을 반란의 비적들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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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일어나다 조선을 바꾸기 위해 일어난 동학농민군 ⓒ 최홍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기세좋게 올라올 때 다른 첩보가 왕후 민씨의 손에 쥐어졌다. 동학군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한양 도성에 이르면 고종을 폐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왕후 민씨는 청나라로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텐진조약을 어기고 인천에 발을 디뎠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은 조선으로 대군을 급파했다. 아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고 이어 청나라 군대까지 조선에서 몰아내었다. 일본은 왕후 민씨와 대척점에 있던 대원군을 끌어들여 궁궐로 입궐시켰다.

일본은 1894년 6월 친일파인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내각을 세웠지만 불과 1년여가 지난 1895년 7월 서양세력들의 간섭으로 일본이 군대를 물리면서 왕후 민씨와 고종은 다시 조정을 되찾게 된다. 왕후 민씨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종은 조선 왕실을 정상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에게는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고종의 뒤에서 조정하는 왕후 민씨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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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장례 시해된 명성황후의 장례식 ⓒ 최홍대


일본은 왕후 민씨를 제거하기 위해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대원군을 추종하는 조선군 훈련대가 일으키는 내부 쿠데타로 가장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내에서 할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1895년 8월 20일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 낭인들은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도착하였다. 이어 낭인들은 빠르게 경복궁으로 진입하여 왕후 민씨를 시해하였다. 왕후 민씨를 시해한 사람은 조선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 스즈키, 와타나베로 밝혀졌다. 그들은 시해한 왕후의 시신을 태워버렸다.

불과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왕후 민씨로 인해 전국에서는 의병이 봉기했고 국제사회는 일본을 비난했다. 일본은 형식상 시해범들을 재판에 회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풀어주었다. 그들의 가문은 지금도 일본의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대원군은 일본이 밀어준 덕분에 잠시 국사를 좌지우지 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초기에는 철저한 척화정책을 펼치며 일본세력과 타협을 거부했던 대원군이 말기에는 일본의 덕을 본 셈이다. 지금 명성황후에 대한 이미지의 상당부분은 일본과 친일파에 의해 덧칠해진 부분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왕후 민씨는 시해된지 약 1년 6개월 뒤에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명성황후 #명성황후기념관 #여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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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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