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2주기, 20살된 생존 학생의 가슴 치는 한 마디

2년이 지나도 바닷속에 가라앉은 세월호... 그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등록 2016.04.16 11:24수정 2016.04.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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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팽목항을 찾은 사람들이 미수습자의 모습이 담긴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 최예륜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지난 4월 15일 자정 팽목항에 아홉 명의 이름이 불려졌다. 잔잔한 바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2014년 같은 날, 자욱한 안개 속에서 476명의 승객을 태운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났다. 다음날, 새로운 삶에 들떠있던 사람들을 실은 채 침몰했고 2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세월호는 304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중 9명을 여전히 품고 있다.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사람들, 망자의 가족들, 그리고 지켜본 우리 모두를 고통 속에 내몬 세월호가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히 바닷속에 그대로 있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친구를 잃은 십대들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고 우리가 사는 곳은 아찔한 사고요인으로 둘러싸인 위태로운 곳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버렸다.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생명의 위협,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국가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세월호에 관한 모든 사법 절차는 일단락되었다. 불법증축과 과적을 일삼은 청해진해운은 유병언의 죽음 이후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사고가 나자 얼 빠진 채 자신의 탈출에 급급할 뿐이었던 선원들 일부가 처벌받았다.

필사적으로 탈출한 승객의 곱절의 승객을 실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방관했던 해경 중 경비정 123정장 이외에는 아무도 법적 책임을 물지 않았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둘러싼 진통과 유가족과 희생자에 대한 조롱과 모욕, 의혹에 대한 은폐 시도들이 난무한 가운데 우리 사회는 절망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안전과 인권을 무시한 관행에서 비롯된 사고 자체와 정부의 해결 과정 전반이 점점 피해가 확산되어가는 참사가 되어버렸다. 참사 2년, 피해는 전방위적이고 피해자는 광범위하다. 그 모든 피해가 낱낱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고 이후 730일이 넘도록 미수습자 9명과 그날의 진실을 품은 배가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는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족의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한 이들의 절규는 언제 끝날 수 있을까.

'미수습자'를 수습하지 않고 있는 정부


2014년 10월 28일 5시 25분. 세월호 4층 중앙 여자 화장실에서 민간 잠수사가 실종자 열 명 중 한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날은 294번째 희생자 조리사 이묘희씨의 시신이 수습된 7월 18일, 그러니까 참사 발생 196일째로부터 102일이 지난 날이었으며, 실종자 가족들이 수중 수색 지속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한 다음날이었다. 물살이 거세 시신 수습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가족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혹시 내 아이, 내 가족이 아닐까, 혹시 내일이라도 남은 실종자들이 한꺼번에 발견되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4층 화장실에서 발견된 여성이라는 것밖에 단서가 없었다.

이튿날은 단원고 2학년 황지현양의 생일이었다. 지현양의 부모는 7년 만에 얻은 외동딸의 열여덟번째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울면서 껐다. 그날 오후 수습된 시신은 지현양이었다. 17년 전 엄마 배속에서 힘껏 세상으로 나왔듯 온 힘을 다해 세월호에서 탈출해 295번이라는 번호를 얻은 것이다. 지현양의 부모는 수학여행을 떠난 지 198일 만에 죽은 딸과 함께 진도를 떠나며 오히려 미안함에 쩔쩔 매야 했다. 축하를 건네고 돌아서 눈물 흘릴 아홉 명의 가족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남은 아홉 명의 실종자들은 11월 11일 정부의 수색 종료 선언에 따라 '미수습자'가 되었다. 

그러나 참사 직후 이미 기술적 검토를 끝마친 인양 문제에 대해 정부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광화문과 서울시내 곳곳, 전국을 다니며 인양을 호소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차일피일 시간 끌기에 여념이 없던 정부는 2015년 4월에 이르러서야 세월호 인양계획을 발표했고 여름이 되어서야 인양 업체를 선정하여 선체 조사가 시작되었다.

장례 치러질 권리조차 빼앗긴 미수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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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청와대 앞. 다윤양의 부모는 매일 거리를 돌며 세월호의 인양을 호소해야만 했다 ⓒ 최예륜


단원고 2학년 허다윤양의 아빠는 100번대 이후 희생자의 시신을 한 구 한 구 지켜봐야 했다. 바지선에 올라 수색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잠수사의 사망사건 이후로는 잠수사를 직접 대면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수색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먼 바다를 내다보며 '얘가 이렇게 속 썩일 애가 아닌데, 어디 저 섬 한켠에서 살고 있는 거 아닌가, 혹시 손을 흔들고 있지는 않을까' 헛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0월 28일 그날도, 시신을 발견한 잠수사가 여학생인 것 같다고 한 말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제는 수술조차 어렵게 된 희귀병을 앓고 있는 다윤 엄마가 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십년 넘게 쇠를 자르고 나르던 노동자, 다윤 아빠는 사고를 당했을 때 정부가 해야 하는 구조의 체계도 몰랐고 참사를 수습하기 위해 꾸려진 범대본을 이루는 정부 각 부서의 조직도도 몰랐으며 법이 자신의 딸의 죽음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수학여행을 떠난 내 딸이 저 바닷속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600만이 넘게 서명했다는 특별법 서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지면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도에 고립된 채 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미수습 희생자 가족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립된 채 가족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희생자 가족들이 경험한 일이었지만 그런 일상이 미수습자 가족에게는 너무 여러 날 반복되었고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아홉 명이 아직 세월호 속에 있다. 어디 멀리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월호 속에 있다. 그래서 미수습자이다. 어떤 사고의 희생자라도 사고 현장 내에서 실종되었다면, 즉각 수습될 수 있어야 한다. 참사의 희생자들을 이토록 긴 시간 방치한 것 자체가 범죄다. 정부는 수색작업의 책임을 민간 잠수사에게 떠넘기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의 책임은 철저히 외면하고, 인양 문제는 정치적으로 저울질하며 차일피일 미뤄왔다.

그 과정에서 수색장기화의 부담은 오롯이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떠넘겨졌고, 그 부담에 못 이겨 결국 가족들이 수색종료를 요청하도록 종용했다. 수색 종료를 선언하고 곧바로 범대본 해체 수순을 밟은 해수부는 이미 사고 발생 직후 인양에 대한 기술적 검토를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었다.

수색종료 후 유가족과 시민들은 세월호 인양을 위해 힘을 모았다. 심신이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미수습자 가족들이 일인시위 등을 이어가며 인양을 눈물로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정부는 권한과 위상을 대폭 축소해 진실규명을 오히려 가로막는 시행령을 내놓아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이 머리를 깎고 사지가 들려나가며 시행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수색과 인양문제를 철저히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정부는 1주기 즈음하여 비판여론이 거세어지자, 회심의 카드를 던지듯 인양 결정을 발표하였다. 구조실패-수색 부실-인양 미루기, 총체적 무책임으로 일관한 정부의 대응이 이토록 긴 시간 그리고 점점 더 깊이 미수습자 가족을 고통으로 내몬 것이다. 

조속하고 온전한 세월호 인양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본격적인 인양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올 7월말을 인양완료를 목표한다지만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 지금껏 사고 해결 과정이 피해자들의 요구와 투쟁 없이 된 일 하나 없듯 지속적 관심과 감시 없이는 세월호의 조속하고 온전한 인양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양작업 초기부터 가족협의회, 미수습자 가족 등의 참여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여전히 인양과정에 관한 문제가 투명하게 공유되고 있지 않다. 정부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지속적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인양 이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요구해야 한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눈물, 많은 국민의 서명으로 만들어진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특조위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4월 14일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추모 법회를 마치고 함께 한 간담회 자리에서 조은화양의 엄마는 말했다.

"훼손 없는, 그리고 추가적 인명 사고 없는, 그리고 조속한 세월호의 인양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제 딸 은화를 만져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할 수 있게 해주세요. 수학여행 보낸 딸을 아직도 못 만나고 있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아픔을 다시는 그 누구도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 찾아주셔서, 제 얘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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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1반이었던 조은화양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교과서. 은화의 책상에는 교과서와 노트 등 소지품이 여전히 그대로 놓여있다. ⓒ 최예륜


2016년 4월 16일, 세월호 2주기를 맞는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 함께 모여 여전히 잊지 않고 있음을 외쳐야 한다. 세월호를 인양하듯 우리 가슴 속에 가라앉은 그날의 기억, 슬픔과 분노를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유가족들은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여전히 동거차도를 오가고 미수습자 가족들은 전국을 헤매 돌며 호소하고 있다.

'이제 그만', '벌써' 등의 말은 이들 피해 가족들과 생존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뿐이다. 영영 세상을 떠나버린 이들에게 가닿을 수 없는 말들이다.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가 아무리 좋고 올바른 것일지라도 단 하나의 가치관을 완벽히 공유한다는 것은 허상이다. 다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상처와 아픔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평범한 우리들이 하는 '세월호의 정치'다.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다시 봄이 올 거예요 -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창비) 라는 책을 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한다. 이제 스무살 대학생이 된 생존학생이 당시 여섯 살이었던 혁규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가족이 모두 희생된 혁규의 한 살 어린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려다 죄책감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제 청년이 된 그가 곱씹는 말이 있다고 한다.  

"슬플수록 남을 존중한다."
#세월호 #세월호 참사 2주기 #세월호 인양 #미수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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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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