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설명만 읽어도 서원에 깃든 정신을 알겠네

[대구의 서원] 홍의장군 곽재우를 기리는 예연서원

등록 2016.04.27 14:47수정 2016.04.27 14:47
0
원고료로 응원
a

예연서원 가는 길에서 보는 호수와 벚꽃 ⓒ 추연창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구례길 123에 있는 예연서원을 찾아 나선다. 예연서원은 늘 붉은 옷을 입고 신출귀몰하게 왜적들을 물리친 홍의장군 곽재우를 기려 세워졌다. 1618년(광해군 10) 솔례마을(대리)에 처음 건립되었고, 1674년(현종 15)에 당시 현감 류천지가 규모를 키웠다.

그 후 1715년(숙종 41)에 이르러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하지만 6.25 때 불에 타버렸고, 1977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 공사를 거쳤다. 조선 시대 사립학교인 예연서원의 핵심 건물은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곧장 나타나는 강당 경의당과, 그 뒤편의 사당 충현사이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일반적인 서원 구조를 보여주는 예연서원은 대구광역시 기념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4월에 찾아가면 벚꽃이 아름다운 예연서원 가는 길

그런데 길을 가노라니, 이 서원은 4월 초에 찾아나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의 벚꽃이 너무나 멋지기 때문이다. 벚꽃이라면 일본의 상징 중 한 가지로 알려진 것인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병장 유적지로 가는 길에서 그것이 활짝 핀 풍경을 대하자니 어쩐지 불편하다. 벚꽃이야 말 못 하는 식물인데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내 마음은 그렇게 속이 좁다.

a

신도비 ⓒ 추연창


마을 입구에 닿으니 신도비가 먼저 반겨준다. 그런데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585에는 신도비가 둘 있다. '홍의장군 신도비와 충렬공 신도비'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신도비가 둘인 까닭을 풀어서 설명해준다.

홍의장군 신도비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웠던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충렬공 신도비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충렬공 곽준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곽재우(1552~1617) 선생의 신도비는 1761년(영조 37) 이곳에 건립되었으며, 곽준(1551~ 1597) 선생의 신도비는 1634년(인조 12) 현풍 대리(소례리)에 세웠던 것을 곽재우 선생의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함께 모시게 되었다.  


신도비 비각은 2010년에 새로 지은 것

신도비들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나무로 제작된 집이다. 당연히 16~17세기 건물은 아니다. 이것 역시 6.25 때 전소되었다. 비각 옆에는 2010년 12월에 세워진 '충렬, 충익공 신도비각을 새로 짓고 나서'라는 작은 빗돌이 있어 신도비와 비각의 역사를 해설해 준다.

1950년 6.25 때 비각이 소실됨에 따라 신도비도 함께 전화를 입어 손상되었다. 손상된 신도비는 1957년 탁본, 집자 등을 통해 원형에 충실하게 정부 주관으로 복원하였다. 이에 유림에서도 신도비가 풍우는 피해야 마땅하다고 여겨 비각을 재건했다. 이제 그 비각마저 노후화하여 신도비와 함께 서쪽으로 6.3m 옮겨 새로 지었다. 

a

예연서원 외삼문 ⓒ 추연창


그런데 더 재미있는 안내판이 비각 앞에 서 있다. <'땀 흘리는 신도비' 이야기>라는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잔뜩 자극한다. 

곽재우, 곽준 신도비는 '땀 흘리는 신도비'로도 유명하다. 비각이 비 맞는 곳도 아닌데 국난이 있을 때 두 분의 비신에는 땀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2006년 2월 14일에는 신도비가 땀을 흘린다는 주민들의 신고가 유가면 면사무소에 접수되었고, 확인 결과 두 비석의 표면에 수십 개의 물줄기와 물방울, 물기 등이 발견되었다. 동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한일합병 때, 2차대전 때, 6.25 한국전 때도 땀이 났으며, 전쟁으로 신도비가 소실되어 다시 복구하였는데도 4.19와 5.16 때도 땀이 났다고 전해진다.

곽재우, 곽준 두 분의 신도비는 언제 또 땀을 흘릴까

두 분의 신도비는 언제 또 땀을 흘릴까? 내심 그것이 궁금하지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이제 신도비 옆의 거대한 느티나무에 눈길을 준다. 물론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으로, 수령 400년, 높이 15m, 둘레 398cm를 자랑한다. 398cm이면 일반적인 성인 두 명이 양팔을 벌려 감싸안아도 품에 들어오지 않는 크기이다. 부부와 그의 어린 자녀 한 명이 동시에 나무 둘레를 싸안아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이 나무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달성군은 이 나무에 '곽재우 장군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을 안내판을 세워 설명해주고 있다. 안내판의 앞 부분은 '곽재우(1552~1617) 장군은 외가인 경남 의령에서 출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현풍, 창녕, 진주까지 작전 지역으로 삼고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하며 밝은 지리를 이용하여 위장 전술과 유격전을 펼쳐 적을 섬멸하는 전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로 시작된다.

장군은 '돌아가신 후 예연서원이 세워지고 숙종 35년(1709)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서원 앞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수령 400년 정도 된 이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때 신출귀몰한 전략과 전술로 가는 곳마다 왜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둔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달성군에서 '곽재우 장군 나무'라 이름을 붙였다.

a

예연서원의 강당 경의당과 그 오른쪽으로 보이는 전사청의 일부 ⓒ 추연창


마을 안을 지나 서원 입구에 닿으면 외삼문 앞에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커다란 은행나무 고목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서 늘여주고 있는 곳이다. 은행나무 옆집이 서원 관리소인데, 별도로 지은 사무실 형태가 아니라 일반 주택이다.

일문삼강의 곽준 장군 가족을 기리는 '곽준 나무'

이 나무도 보호수이고, 또한 이름도 있다. 수령 300년, 높이 20m, 둘레 314cm를 뽐내니 보호수로 지정을 받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역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곽준 나무'의 내력을 말해주는 안내판을 읽어본다.

곽준(1551~1597) 선생의 본관은 현풍, 호는 존재(存齋)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영남과 호남의 길목인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이상(履常), 이후(履厚)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 건립된 예연서원에 봉안되었다. 수령이 300년 정도 된 이 은행나무는 본인은 물론 두 아들과 며느리까지 함께 전시에 죽어 일문삼강(一門三綱)을 이룬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곽준 나무'라 이름지었다.

일문삼강은 한 집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다 탄생했다는 뜻이다. 아버지 곽준과 두 아들이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으니 나라의 충신이요, 두 아들은 아버지의 도와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친의 전사를 보고 더욱 분기탱천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으니 효자이며, 남편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며느리는 열녀이니, 그래서 일문삼강인 것이다.

a

사당 충현사 ⓒ 추연창


계단을 올라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뜰이 나오고, 강당이 웅장한 모습을 과시하며 서 있다. 강당 오른쪽으로 보이는 좁은 협문으로 들어서면 전사청이 있고, 서적 등을 보관 중인 장판각도 건립되어 있다. 사당은 강당 뒤편에 있다.

서원 옆 곽재우 재실 경충재도 꼭 둘러보시기를

예연서원을 찾는 이들이 흔히 놓치고 돌아오는 곳이 있다. 이름은 경충재(景忠齋). 끝에 '재'가 붙은 것으로 짐작되듯이 이 건물은 곽재우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본래 현풍면 대리에 있었는데 1875년에 이곳으로 이전, 신축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건물이 노화되었으므로 1992년에 전면적으로 보수했다.

경충재에서 보면 오른쪽 담장 너머로 서원 지붕이 보인다. 통로는 경충재에서 곽준나무로 곧장 이어진다. 관리소로 쓰이는 주택의 마당을 지나치는 길이다. 일반 가정집이라서 걸어가기가 조금 미안하다. 하지만 곽재우 장군과 곽준 장군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리라. 오늘이 늦가을이면, 마당 안을 조심조심 걸으면서 나는 타고 온 자동차 지붕 위에 노란 은행잎이 예쁘게 떨어져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이내 곽준나무 아래에 닿는다.

a

현판 ⓒ 추연창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국역 망우선생 문집> 중 서문의 일부 내용을 여기 옮겨서 소개한다. 서문은 허목(1595~1682)이 썼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여러 성이 무너지고 임금이 계시는 서울마저 지킬 수가 없게 되자 공(홍의장군)은 분개하고 탄식하면서 "나는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은 분들의 후손이므로 나라가 파멸의 지경에 이르른 지금 왜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면서 사재(私財)를 털어 장사를 모집하였다. 먼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기이한 전술을 발휘하여 적을 공격, 연전연승을 거두었다.'라고 기술했다.

또 허목은 '(홍의장군이) 계책을 써서 낙동강 연안 여러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을 파멸시킴으로써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의병들이 다투어 따르니 아군의 세력이 크게 불어났다. (중략) 임금께서 (홍의장군의 소식을 듣고) 장하게 여겨 공의 이름을 늦게 들음을 한탄하였다. 이로써 여러 지방의 의병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썼다.

특히 허목은 서문에서 홍의장군 곽재우의 공로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해준다. 홍의장군이 '왜적과 더불어 수십 회의 교전을 벌인 결과 낙동강 오른쪽 지방이 안전을 얻을 수 있었으니 온 나라가 함락과 패전에 직면했는데도 영남 일대는 공(곽재우)을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하였다.'라는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아들 및 며느리와 함께 황석산성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곽준 장군을 기리며 서원 일원을 둘러본다. 서원의 강당과 사당, 마을 입구 신도비, '곽재우 나무'와 '곽준 나무', 경충재,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될 답사지이다. 두 분의 신도비가 다시는 땀을 흘리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곳, 예연서원은 그런 역사유적이다.
#예연서원 #곽재우 #곽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나이 들면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
  2. 2 맨발 걷기 길이라니... 다음에 또 오고 싶다
  3. 3 눈썹 문신한 사람들 보십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4. 4 [단독] 민생토론회 한 번에 1억 4천... 벼락치기 수의계약
  5. 5 [단독] '대통령 민생토론회' 수의계약 업체, 사무실 없거나 유령회사 의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