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왕' 정조, 매력 있네요

[서평] 개혁군주, 문화군주 정조의 또 다른 모습 다룬 <정조, 나무를 심다>

등록 2016.05.17 16:28수정 2016.05.1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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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나무를 심다> 책표지. ⓒ 북촌

<정조, 나무를 심다>(북촌 펴냄)는 우리에게 개혁군주, 문화군주로 많이 알려진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1752~1800)를 '식목왕 정조'로 만나게 하는 책이다.

책에 의하면 정조가 1789년부터 7년 동안 현륭원에 심은 나무만 1200만 그루. 그런데 재위(1776~1800년) 첫해부터 죽은 해까지, 조선 전역에 숲이 출렁이도록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심고 가꾸었는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정조가 현륭원(사도세자의 묘.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 이후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이나 현륭원 일대, 용주사 일대 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버드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재위 15년째인 1791년. 그해 1571주를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수차례, 버드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다고 한다. 제방을 쌓은 곳에도 심게 했다. 버드나무가 물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정조가 왕이 된 후 사도세자의 무덤을 정비했다는 사실은, 그 과정에서 많은 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지라 정조가 많은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은 그리 신선하게까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버드나무였을까? 그 이유와 버드나무를 심게 된 계기를 읽으니 자못 감동스럽다.

어느 해 동지정사(동지 인사를 하고자 중국에 보낸 사절단)로 북경(청나라)에 다녀온 연행사가 정조에게 보고한다. '강희제(청의 4대 황제, 재위는 1661~1722년)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수 천리에 달하는 길에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심게 한 덕분에 산 속에는 도적이 없고, 마을에는 싸움도 없었으며, 풍속이 좋아 사람들의 삶이 편안했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10년 뒤인 1790년 6월, 그러니까 정조 재위 14년에 다녀온 연행사 일행도 '강희제에 이어 옹정제가 여러 차례 심은 버드나무 덕분에 백성들의 삶이 평안했다. 땔감이 부족한 곳에서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를 한해 걸러 베어다 쓰게 하고, 베어낸 자리에 다시 나무를 심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숲을 이루게 한다'와 같은 보고를 한다.

정조가 버드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연행사가 돌아온 그 이듬해. 아마도 정조가 버드나무를 심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청나라의 황금기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치세처럼 조선도 부흥하기를 바라면서가 아니었을까? 강희제와 옹정제가 심은 버드나무의 혜택을 누리는 청나라 백성들처럼 조선의 백성들 또한 그처럼 자자손손 나무의 혜택을 누리길 바라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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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는 자생이 확인되지 않고 북한에서만 확인되는, 그동안 직접 보고 찍은 사람이 없어 식물을 공브하는 사람들에게 환상의 나무로 불리는 새양버들. <한국의 나무> 공저자들이 “북한 국경수비대에게 발각되면 첩보활동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찍은” 두만강 모래톱의 새양버들이다.(출처:<한국의 나무>) ⓒ 김태영.김진석


'관동지방에서 온 잣이 자라난 잣나무는 현륭원을 울창하게 만들었고, 거기서 잣을 수확할 수 있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할 당시, 구황작물로 쓰일 수 있는 도토리와 경관을 아름답게 만드는 소나무 씨앗, 단풍나무 씨앗 외에는 모두 과실을 수확할 수 있는 종자를 파종하도록 명했다. 봄에는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울창한 숲을 만들어 눈을 기쁘게 하며, 가을에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후세사람들이 이곳의 무성한 나무를 베어 밥을 하고 방을 데우는 데 쓸 수 있도록 하려는 뜻이 있었다.

정조는 뽕나무를 화성에만 심은 것은 아니다. 전국 각 고을에 파견 된 수령들이 꼭 해야 하는 7가지 업무(守令七事, 수령칠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정조 2년부터 재위기간 내내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정조는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윤음(綸音, 임금이 백성들이나 신하들에게 내리는 말)을 내렸다. 윤음을 통해 드러난 정조의 마음은,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비단 옷을 입은 채 넉넉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뽕나무가 이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믿었기에, 백성들 또한 뽕나무 심기에 매진하도록 권했다.' - <정조, 나무를 심다>에서.

이제까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것과 다른 모습인, 책을 통해 만나는 식목왕 정조는 매우 매력 있는 역사인물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게 와 닿는 것은 나무 심는 것을 명령만 하는 왕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관여한 때문에 나무 또는 나무심기 관련 지식이 풍부했고, 현장 사정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 그걸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에 그대로 적용했다는 것이다.

▲언뜻 왕릉과 어울리지 않는 잡목이나 밤나무, 잣나무와 같은 유실수들을 심게 함으로써 다양한 나무가 자라는 건강한 숲으로 만든다든지 ▲아무리 심어도 죽는 곳에는 노간주나무처럼 가뭄에도 살아남는 나무들을 심게 한다든지 ▲뽕나무처럼 경제에 도움이 되는 나무나 땔감으로 좋은 나무들을 전국각지에 심고 가꾸어 백성들이 활용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풍족한 삶을 도모한다든지 ▲나무 심기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품삯을 지불하거나, 송충이를 잡은 백성들에게 무게에 맞는 값을 지불하게 함으로써 나무도 가꾸고 백성들의 경제도 살핀다든지 ▲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상을 해 나무 심기를 독려한다거나 ▲나무를 심고 가꾼데 들어간 비용이나 인력, 날짜나 기간 등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게 해 다른 때 참고하게 한다든지 등으로 말이다.

책을 통해 만나는 식목왕 정조나, 정조의 나무심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래서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읽는 내내 아쉬움이 일곤 했던 그런 책이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 책의 바탕은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의 기록들이다. 즉위부터 죽던 해까지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는 사실이 이처럼 책 한 권이 될 정도로 숱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제야 발굴되었음은 우리의 나무심기에 대한 인식 부족, 그 방증이란 생각 때문이다.

어떤 인물을 최대한, 그리고 제대로 알려면 그 인물의 가급 많은 것들을 아는 것이 좋다. 아니 꼭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라 이제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식목왕으로서의 정조를 알려주는 이 책이 가급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 싶다. 이 책을 읽던 첫날, 인상 깊게 읽은 저자의 말을 소개하는 것으로 식목왕 정조에 대한 우선 소개를 마친다.

"조선 후기 중흥을 이끈 정조의 각별한 나무심기를 들여다보며, 그가 장소와 시기마다 독특한 종류의 나무를 심은 것과 나무에 대한 정조의 지식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그가 조선왕실과 백성들의 번영을 함께 추구했다는 점에서, 참된 리더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다. 정조가 나무를 심은 일은 소수의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일이다.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면 잊히게 된다. 기억하고 계승하여 실천하는 것만이, 과거를 현재에 심어 미래에 이어주는 길이다" - <정조, 나무를 심다> '저자의 말'에서.
덧붙이는 글 <정조, 나무를 심다>(김은경) | 북촌 | 2016-04-05 | 정가 18,000원

정조, 나무를 심다

김은경 지음,
북촌, 2016


#정조(이산) #버드나무 #식몽왕 정조 #현릉원(사도세자) #나무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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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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