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유정 "사이코패스 없앨 수 없어, 먼저 이해해야"

신작 <종의 기원> 발간 기념 '정유정 작가와의 만남' 참석기

등록 2016.07.07 16:44수정 2016.07.0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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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달리는 기관차'에 올라탄 듯...
말과 글의 속도가 일치하는 '정유정 식 화법'의 매력

웅성거리는 강의장. 소녀 같은 팬심으로 소설책을 옆구리에 끼고 작가를 기다리던 관객들 사이를 가로질러 정유정 작가가 걸어 들어오는 짧은 순간 찬 바람이 이는 듯 했다.


간호사로 5년, 공기업 직장인으로 9년. 그렇게 생활전선에 있다가 어느 순간 작가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정유정.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생각보다 더 박력 있었다. 역시! 이런 소설들을 쓸 만 해.

지난 6월 30일, 강동구 자기주도학습지원센터에서는 강동구청 주최로 <정유정 작가와의 아주 특별한 만남> 행사가 진행됐다. 필자도 '강동구에 정유정이 뜬다'는 소식에 일찍부터 참가신청을 하고, 행사 당일 책꽂이에 꽂혀 있던 <7년의 밤>과 새로 구입한 <종의 기원>을 가방에 넣어 출근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도착한 행사장은 이미 많은 신청자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뒤에서 정유정 작가가 긴장된 적막을 뚫고 걸어나왔다. 그 순간 느껴진 이미지는 바로 차가움, 날렵함, 그리고 씩씩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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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강동구 자기주도학습지원센터에서 '정유정 작가와의 만남' 행사가 진행됐다. ⓒ 문지선


이렇다 할 준비동작도 없이 정유정 작가의 강의 속으로 우리는 내던져졌다. "소설가는 평생 자신만의 한가지 테마를 변주하며 작품을 쓴다"는 정 작가에게 그 평생의 테마는 '인간의 선과 악'인 듯 최근 발표한 신작 <종의 기원>에서 그녀는 '악인의 끝판왕'을 다루었다.

"그동안 악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는데, 모두 3인칭 시점이었다. 늘 거기서 어떤 갈증을 느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사이코패스를 1인칭 시점으로 등장시켰다. (중략)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없는게 아니라 공감능력이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 (내가 이 일을 한 뒤의) 장래에 대한 숙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정 작가는 사이코패스를 1인칭시점으로 다루기 위해 뇌과학부터 범죄심리학까지 많은 양의 학습과 취재를 하고, 마지막으로는 6개월 이상을 '유진(<종의 기원>에서 사이코패스로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살았다.

그가 말하는 <종의 기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쇄살인을 벌이는 사이코패스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자기변론서'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악인을 옹호하기 위해 글을 썼단 말인가.


강남역 살인사건, 우리 삶을 파괴하는 행위
태풍을 막지 못하지만 대비할 수 있어
사이코패스는 일종의 샘플... 그들을 이해해야

"생존능력이 없는 착하기만 한 사람들의 세계는 백색이다. 악한 사람들의 세계는 흑색, 암흑의 숲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색의 공간에서 살아간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절대악인(사이코패스)이 갖고 있는 특성을 하나씩은 갖고 살아간다. 그 모든 특성을 다 가지고 있는 그들(사이코패스)은 일종의 좋은 샘플이다."

그는 최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언급하기도 했다.

"옛날 사람들은 태풍이 뭔지 몰라 제사를 지내고 무서워했지만, 이제 우리는 태풍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일종의 자연현상이라는 것을 안다. 강남역 사건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사이코패스)을 없앨 수 없다. 그들은 오랜 시간 인류 속에서 존재했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태풍을 막지는 못하지만 대비할 수는 있다."

작가는 "우리 나라엔 아직까지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다룬 소설이 없다"며 "누군가 써야 한다면 기왕에 악을 좋아한다고 소문난 내가 하는게 낫겠다(웃음)"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종의 기원> 이외에도 작가의 다른 출세작인 <7년의 밤>, <28>, 제5회 세계문학생 수상작인 <내 심장을 쏴라>, 데뷔작이자 유일하게 청소년들의 세계를 다룬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그리고 <28>을 탈고한 뒤 지친 심신을 쉬게 하려고(?) 떠난 안나푸르나 여행기를 다룬 첫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까지, 공통적으로 읽히는 키워드는 '속도감'. 이야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며, 초고는 노트에 손으로 3개월 안에 작성한다니 그 집중의 정도가 어느 만큼일까.

그의 강의 또한 소설들과 같이 한 점을 향해 단숨에 달려가는 '전차'의 이미지였다. 1시간의 강의가 지루할 틈 없이 마무리되고, 쏟아지는 질의응답에도 정 작가는 성심성의껏 답했다.

간호사로써 지낸 시간동안 마주한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나약함과 공포. 정 작가가 다뤄온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하는 또다른 키워드이다. 작가 스스로 "내가 다루고 있는 것은 생존능력"이라고 표현할 만큼 그녀는 그런 삶이라도, 그런 세상이라도 '살아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 안에 자신의 내면 속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주술적 기능이 있다면, 그의 소설을 읽는 우리들 또한 내 안의 '선함'이든 '악함'이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이겨낼 힘을 얻게 되지는 않을까.

장마와 더위가 반복되는 이 여름에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올 여름 정유정의 작품들에 올라타 속도감을 즐겨볼 생각이다.

이 행사는 강동구청과 강동송파교육지원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2016 강동 혁신교육지구 강동학교'의 <책방 따수다>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책방 따수다>는 '책방은 따뜻한 수다방이다'의 약자로, 독서문화 조성을 위한 주민 대상 프로그램이다.
#정유정 #종의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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