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대에 매단 '비닐뽁뽁이', 고라니 오지 말라고...

정성스런 농부의 마음이 읽혀지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등록 2016.08.17 13:41수정 2016.08.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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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들어 날이 선선해지자 나는 자전거에 올라탔습니다. 들판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달리면 더위도 잊을 것 같습니다.

나무그늘에서 쉬고 있는 동네 어르신들이 날 발견하고 말을 겁니다.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이 더위에?"
"들판에 바람이나 쐬려고요!"
"요즘 나락모가지 올라온 거 보이지?"
"벼이삭 팬 게 많아요."

그리고는 당신네끼리 말을 주고받습니다.

"날은 더워도 말이야 이런 날씨가 벼한테는 최고여!"
"이삭 팰 때 푹푹 쪄야 풍년이 든다니까!"

이깟 더위는 얼마든지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전거 조심히 타라는 당부를 뒤로하고 들길로 들어섰습니다.

날은 더워도 들판에는 싱그러움으로 넘쳐납니다. 막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벼이삭들이 출렁거립니다. 나락모가지 올라온 벼논에는 벼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어느 마을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어느 정갈하게 정돈된 밭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랫밭은 인삼밭이고, 윗밭은 대파밭입니다. 질서정연하게 심어진 대파가 잘 자라고 있습니다. 밭 가장자리에는 콩이 심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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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가장자리에는 허수아비가 여러 개 있고, 건너편에 깃발이 나부낍니다. 윗밭은 대파밭이고, 밭 아래는 인삼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전갑남


밭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허수아비가 춤을 춥니다. 사람 얼굴을 한 허수아비에다 비료 포대를 뒤집어씌운 것, 그리고 디지털허수아비까지! 디지털허수아비가 뭐냐고요? 이건 바람에 움직임이 크고,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낮에는 강한 햇빛반사가 되고, 야간에는 야광기능이 있어 사실감을 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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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가에다 깃대를 박아 깃발을 달아놓은 게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 전갑남


나를 자전거에서 내리게 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건너편 깃대에 백기를 달아놓은 깃발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깃대는 단단한 긴 쇠파이프로 튼튼하고, 깃발은 깃대에 단단히 묶었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은 '휘익휘익' 큰 소리를 내며 펄럭입니다.

'아니 저건 뭐야? 무슨 의미로 깃발을 나부끼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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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밭 가장자리에 백기가 펄럭입니다. 바람에 '휘익휘익' 펄럭이는 소리에 고라니가 덤비지 말라는 농부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 전갑남


깃대에 달린 깃발은 천조각도 아니고, 비닐입니다. 겨울철 창문에 단열효과를 높이기 위해 붙이는 이른바 에어캡 '뽁뽁이'입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깃발 주위에 가까운 집을 기웃기웃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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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의 소재는 비닐로 깃대에 단단히 묶여있습니다. ⓒ 전갑남


"자전거 타다 저 깃발이 궁금해서요?"
"저 깃발! 좀 이상해 보이지?"
"네에."
"짐승들 얼씬 말라고!"
"날짐승이요, 산짐승이요?"
"날짐승, 산짐승 다야!"
"그럼 고라니도?"
"고라니 녀석들 콩밭 절단 내고, 그보단 녀석들 날뛰면 삼밭을 망가 놓기 일쑤야!"

그러고 보니 마을 가까이에 야산이 있습니다. 아저씨는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 녀석들이 밭이고 논이고 날뛰다 인삼밭으로 뛰어들면 그늘막을 짓이겨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깃발까지 날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의아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허수아비며 깃발이 나부끼니까 녀석들 잠잠해요?"
"녀석들도 내 맘을 알았는지,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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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매단 농가 입니다. 인근에 야산이 있어 자주 고라니가 침범한다고 합니다. ⓒ 전갑남


아저씨가 피식 웃습니다. 바람에 깃발 펄럭이는 소리에 겁 많은 고라니 녀석들이 피해갈 거라는 기대를 한다고 합니다. 고라니는 겁이 많은 짐승임을 강조합니다.

우연인지 몰라도 콩이 싹틀 때 떡잎을 절단내는 날짐승 피해가 없었고, 고라니도 덤벼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애써 가꾼 것에 대한 최선을 다하려는 농부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농사는 정성으로 짓는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나는 시원한 들길을 달려 우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막걸리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서 와서 한 잔 해!"

땀 흘려 운동하고 먹는 막걸리 맛이 기가 막힙니다.

나는 좀 전에 목격한 사진을 어르신들께 보여드렸습니다.

"무슨 점쟁이집인가?"
"짐승들 달라 들지 말라고 한 것 아닐까?"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하십니다. 내가 '고라니 덤벼들지 말라는 깃발'이라고 하자 그제야 좀 이해가 되신 표정입니다.

"고라니 녀석들 겁은 되게 많잖아! 깃발 펄럭이는 소리에 다른 데로 가겠는 걸!"

옆집아저씨는 막걸리 한 잔을 내게 더 따르며 말씀하십니다.

"사진 보니까 밭에 풀 하나 없네. 그 양반 농사짓는 정성이 대단한 것 같아! 그러니까 고라니 오지 말라고 깃발 날릴 생각을 다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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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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