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우리 박물관에 한국인이 구경왔다고?"

[몽골기행 20] 몽골의 거란 성(城), 하르 보흐 발가스(Khar Bukhiin Balgas) 기행

등록 2016.09.02 23:06수정 2016.09.0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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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를 태운 차는 몽골 중부의 드넓은 초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차 안에서는 차 앞유리에 걸어둔 노리개 같은 불교 부적이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차가 거친 황톳길에서 울렁거릴 때마다 이 부적은 옆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의 길 앞을 가로막은 소들은 다행히 뛰면서 길을 빨리 비켜준다. 소들이 양이나 염소보다 길을 빨리 비켜주는 것은 아마도 착하게 생긴 소들이 겁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의 초원은 끝없이 이어지고 아주 저 멀리에 낮은 산들의 흐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국과는 달리 산 위에 나무가 자라지 않고 푸른 풀밭만 이어지고 있으니 평지가 산 같고 산이 마치 평지 같다. 그리고 그 풀밭 사이로 뱀이 기어가는 듯이 이어지는 찻길이 길게 선을 만들고 있었다. 차가 달린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내 눈 안에는 시리도록 푸른색의 하늘과 싱싱한 초록색의 초원만이 담기고 있다. 몇 시간째 나는 푸른색과 초록색 외에는 만나지를 못하였다.


몽골 중부 초원지대로 들어서자 드디어 시원스럽게 포장된 도로가 나타났다. 아주 평범한 포장도로지만 몸이 편해져서 반갑기도 하고 여행의 운치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작은 개천 위에서 말들이 모여 목을 축이는 모습을 만났다. 개천 앞에는 초원에서 정말 오랜만에 어린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초원길의 긴 여정을 달려온 우리들은 오랜만에 만난 물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몽골 초원의 샘물. 귀중한 식수원에 몽골인들이 물을 길으러 왔다. ⓒ 노시경


개천 위쪽으로 걸어 올라가보니 돌 무더기가 모여 있는 곳이 있고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지하에서 올라온 깨끗한 용천수가 담겨 있다. 초원의 귀하고 깨끗한 이 용천수를 보호하기 위해 물이 솟아나오는 곳에는 소중하게 철제 펜스가 둘러쳐져 있었다. 용천수 수원지는 작지만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제법 많아서 졸졸 흐르며 초원을 향해 길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수원지와 개천 주변에는 게르 10여 채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초원의 소중한 물이 나오는 곳에 사람들과 가축들이 모여든 것이다.

용천수 샘물 주변으로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초원의 용천수를 식수로 이용하기 위해 물을 길러 오는 아저씨도 있지만 동네 아이들은 물가에서 놀기 위해 이곳에 몰려온다. 아이들은 펜스를 타고 올라가 작은 수원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다리가 짧아서인지 수원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꼬마들은 한 아저씨가 플라스틱 물통 2통에 물을 담아갈 때까지 구경을 하다가 아저씨가 가자마자 갑자기 플라스틱 바가지를 가져와서 물이 흐르는 곳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에게 이 소중한 수원지는 더위도 식히고 장난도 칠 수 있는 훌륭한 놀이터인 것이다.

하르 보흐 강. 몽골 중부 초원의 젖줄인 강물이 구불구불 흘러간다. ⓒ 노시경


황량한 초원에 물길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이 몽골 중부의 땅은 예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개천 위의 작은 다리를 건너 차로 10분 정도 더 달리자 시원하게 펼쳐진 초원 위에 하르 보흐(Khar Bukhiin) 강이 꿈틀거리며 뱀 같이 이어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몽골어로 '하르'는 '검다'는 뜻이고, '보흐'는 종우(種牛)를 말하는 것이니, 이 강 주변에 몽골의 검은 소가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강의 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작았다. 날씨가 요새 가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몽골 초원지대가 점점 사막화되고 있는 영향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더 큰 하르 보흐 강이 이곳을 흐르고 있었고, 이 강 중류 옆에는 예부터 성(城)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성이 바로 내가 오늘 찾아가는 성, 하르 보흐 발가스(Khar Bukhiin Balgas)이다. 몽골어 '발가스(Balgas)'는 성이라는 뜻이다. 이 성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거란족이 만든 큰 성이었다.


초원 위에 쌓은 이 성은 10~11세기에 거란족이 쌓은 성이다. 이 거란족은 널리 알려진대로 993년, 1010년, 1019년에 고려를 부단히 침략했었던 민족이다. 거란족이 초원 위에 쌓은 토성은 아스라한 흙 둔덕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토성 흔적 위로는 초원을 거니는 바람만이 불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당시의 번성했던 성 안의 풍경을 상상하며 성 앞으로 걸어갔다.

거란족이 쌓은 사각형 토성이 몽골 초원 한복판에 남아있는 것은 거란족이 몽골족에서 파생되어 나온 한 일파이기 때문이다. 거란족의 언어는 몽골어와 완전히 동일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거란어와 몽골어는 비슷했다고 한다. 거란족이 몽골족과 구분되는 이유는 초원지대에 게르만 짓고 살던 몽골족과 달리 거란족은 이렇게 성도 짓고 정착생활을 하는 반목반농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르 보흐 박물관. 험상 궂은 박물관 관리인이 박물관 문을 열어주고 있다. ⓒ 노시경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성 입구에 게르 한 채와 함께 아담한 사각형의 흰색 시멘트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다. 몽골 친구에게 물으니 이 작은 시멘트 건물이 바로 하르 보흐 박물관이라는 것이었다. 규모도 작고 외양도 전혀 박물관 같이 생기지 않았지만 거란족 유적지인 하르 보흐 발가스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도 하고 있으니 박물관이라는 이름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물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군가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저 옆 게르에 누군가가 있을 거예요."
"윗옷도 안 입고 배가 축 늘어진 아저씨가 이 박물관 관리인인가요? 얼굴도 시커멓고 너무 험상궂게 생겼는데?"

우리와 함께 간 몽골인 아주머니가 확인해 보니 작은 게르는 박물관 관리인의 집이었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아저씨는 박물관 관리인이었던 것이다. 웃통까지 다 벗고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박물관 관리인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박물관 문을 열어 줄게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입장료 내야 해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이런 곳까지 찾아온 한국인을 만난 것도 오랜만이네."

박물관에 들어가는 출입문 좌우에는 마치 박물관을 호위하는 듯이 비석의 귀부(龜趺) 2개가 양 옆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귀부는 거북이 모양을 한 비석의 받침돌인데 거북이의 얼굴은 누가 칼로 내려친 듯이 잘려나가고 없다. 이 거란족의 토성을 공격한 누군가가 비석을 파괴하기 위하여 거북이 목을 쳤을 것이다. 목이 잘린 거북이는 수백 년 동안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비석이 세워져 있던 자리는 비석이 완전히 뽑히면서 사각형 모양의 큰 구멍만 남아있을 뿐이다. 비석의 몸돌은 산산이 부서진 후 몽골의 바람에 섞여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이 비석에는 하르 보흐 성의 역사가 자랑스럽게 기술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귀부 뒤쪽에는 하르 보흐 성 기둥의 주초석으로 사용되었을 석재 2개가 박물관 문의 장식품처럼 배치되어 있다. 반쯤 깨져버린 이 석재들은 우리나라 불교사원에서 자주 보이는 것과 같은 연꽃무늬를 하고 있다. 석재가 닳은 정도로 보아서는 많은 불교문화재를 남긴 거란 시대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몽골과 북중국의 강자로 군림했던 거란족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불교였기 때문에 이 건축물의 잔해에도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남아있는 것이다.

굳게 닫힌 박물관 문이 열리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 안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작은 유물보관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귀중한 유물들도 일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유리 전시관 안에 소중하게 전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허름한 책상 위에 유물들을 나열해 두기만 하였다. 유물에 대한 설명서가 모두 몽골어로 되어있는 것도 불편하다. 나는 함께 간 몽골 친구에게 이 유물의 용도 등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유물들은 흙으로 구운 전돌, 철제 및 석제 농기구, 손바닥만한 크기의 여러 부조불상, 청동제기, 그릇 파편 등이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먹다가 남긴 동물의 뼈, 하르 보흐 성을 하늘에서 찍은 항공사진이 여러 장 전시되어 있다. 전돌에는 과거 몽골인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나무줄기 같은 기하학적 문양도 담겨 있다. 이 안에 분명 역사적 가치를 몰라주는 귀중한 유물도 있을 듯한데 보관상태가 열악한 게 아쉽기만 하다.

거란 토성 흔적. 외국 관광객들이 거란의 토성 위를 걸어가고 있다. ⓒ 노시경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 뒤쪽으로 사람 키보다 조금 더 크게 남은 흙 둔덕, 토성이 보인다. 토성은 많이 허물어져서 마치 띠 같은 흔적만 남기고 있다. 벌판을 가로질러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의 흙을 만져보았다. 10~11세기에 요나라의 거란인들은 진흙과 함께 이 고운 황토를 다져 굳혀서 사각형 모양의 성을 쌓고 작은 도시를 만들었다. 하르 보흐 토성의 규모는 동서 2km, 남북 1km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낮은 산과 넓은 들이 토성 주변으로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황량한 들판을 보고 있으니 송나라, 고려, 중앙아시아와 활발하게 왕래하던 천년 전 기마민족의 역사가 거짓으로 느껴진다. 거란인들은 북쪽의 유목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이곳에 군사를 정착시키고 이 군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발해인, 여진족, 한족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이곳에 잡혀온 이민족들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토성 안쪽의 건물터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성을 축조하고 무기를 제작하고 성밖으로 나가 식량으로 사용할 곡식과 야채를 재배했을 것이다. 토성 부근에서 경작 및 수로 흔적과 함께 맷돌, 돌절구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몽골사원 터. 거란의 성터 안에는 17세기에 지어진 몽골 사원 터가 남아있다. ⓒ 노시경


여행 오기 전 보았던 하르 보흐 성의 발굴보고서에는 사방에 문이 있었다고 되어 있었다. 지금 보니 여행자들이 성 내부의 건축물 유적을 보기 위해 넘나드는 통로가 거란 성 당시의 성문인 것 같다. 성 바깥에는 해자인 도랑을 팠다고 하는데 현재 해자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는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의 문을 연결해 만든 넓은 거리도 있었다고 하는데 발굴 후 다시 흙이 쌓여서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하르 보흐 발가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란의 토성 안에 또 다른 시대의 몽골 유적이 공존하고 있다. 멀리에서도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16세기~17세기 초의 몽골인들이 거란의 토성에 남아있던 석재와 벽돌로 지은 건축물 유적이다. 거란의 토성은 잘 보이지 않고 후대의 이 건물은 또렷하게 보이니 많은 여행자들이 이 석재 건축물을 거란족의 토성으로 잘못 알고 돌아본다.

나는 17세기의 몽골족이 지은 석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친 초원 안에 덩그러니 남은 2채의 석조 건물 안에는 한적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이 건물들은 당시 몽골에서 유행한 티벳불교의 홍모파가 세운 사원터였다. 사원터의 중심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은 사찰의 대웅전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홍모파가 지은 불교사원이었으니 당시 이곳에는 붉은 모자를 착용하는 스님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돌로 쌓은 벽면을 보니 돌을 쌓는 방식이 독특해서 특이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돌 사이마다 진흙으로 단단하게 메꾸어져 있다. 막돌을 깨서 한 면을 반듯하게 해서 한 줄을 쌓고, 그 다음 줄은 널돌로 2, 3층 쌓고 틈도 메꾸어 빈틈이 없다. 벽면을 만져보니 뜨거운 날씨와는 달리 돌 벽면은 감촉이 서늘하다.

붉은 부리 까마귀들. 건물벽 사이의 공간은 새들에게 훌륭한 보금자리이다. ⓒ 노시경


성터를 답사하는 외국인들. 한때 몽골을 지배했던 러시아 여행자들이 성터를 찾았다. ⓒ 노시경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무너진 구멍 사이로는 붉은부리 까마귀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흙과 지푸라기를 가져와서 둥지를 짓는 새들에게 이 건물터 유적의 무너진 구멍은 훌륭한 둥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붉은 부리 까마귀들은 성터를 구경 온 사람들을 마치 자기 집에 침입한 이방인을 보듯이 노려보고 있다.

성터를 답사 중인 러시아 여행객들은 몽골 안내인의 설명을 찬찬히 듣고 있다. 몽골 중부지역에 산재한 거란시대의 여러 성 중 이 하르 호르 성은 아주 성공적으로 발굴 조사된 유적지인데, 1870년대에 이 성터를 처음 발견하고 조사한 것도 몽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의 학자였다. 이 황량한 초원의 아무도 찾지 않은 성터를 일부러 찾아온 것을 보면 몽골의 역사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러시아 여행자로 보인다.

불교 사원 터에 남은 높은 성벽은 이 지역에 방목된 말들의 그늘 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습기가 많지 않은 몽골의 여름 햇볕은 그늘로만 가면 위력이 약해지는데 그걸 잘 아는 몽골의 말들이 석벽에 줄줄이 서서 햇볕을 피하고 있다. 인간이 사라진 성터와 사원터는 이 동네 말과 새들의 훌륭한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

더위를 피하는 말들. 말들이 땡볕을 피해 건물벽 아래의 그늘에 모여 있다. ⓒ 노시경


돌탑 터. 더운 여름의 땡볕을 뚫고 돌탑을 향해 걸어갔다. ⓒ 노시경


저 멀리 북벽의 옹성 쪽에 파고다 같이 생긴 돌탑이 보였다. 돌탑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는 그늘 한 점 없이 쏟아지는 땡볕 속으로 들어서야 했다. 오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많이 걷지 않았던 아내가 선뜻 동행해 주었다.

이 탑은 17세기에 세워진 몽골 불교사원의 탑이었다. 탑을 유심히 보니 돌을 쌓을 때 진흙을 발라 돌려서 탑이 붕괴되는 것을 막은 것이 보인다. 이 돌탑의 돌 틈에도 수많은 새들이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지저귀며 다른 새들을 부르는 여러 마리의 새들에게 이곳은 아파트 같은 보금자리이다.

그런데 이 돌탑 주변은 몽골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1970년 이 주변의 성터를 발굴하던 중에 몽골의 문자 및 서지 문화에서 중요한 책이 발굴되었다. 이 책은 자작나무 껍질에 몽골 문자가 적힌 책이었다.

"이 근처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문자를 남긴 수십 종류의 책이 발견되었어요."
"음, 몽골인들이 자랑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이겠군요. 희귀한 유물인가요?"
"아주 숙련된 몽골 문필가가 유려하고 세련된 문체로 만든 책이지요."
"책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역사 오랜 거란의 성터에 그 후손인 몽골인들이 다시 사원을 건설했다는 내용이에요."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몽골족은 고려시대 이후 우리를 숱하게 침략했던 민족 아니던가? 몽골에 와서 보니 거란족도 몽골족의 한 일파로서 몽골족의 역사 안에 있었다. 정착민족을 괴롭히고 침략을 일삼던 무지한 유목민족으로만 생각했던 몽골족은 이곳에 그들의 문자로 훌륭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문자로 금석문과 문학작품을 남겼고 여러 나라 문자를 병기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여행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트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하르 보흐 발가스를 보면서 유목민족에 대한 여러 편견을 깨트리고 있었다. 그들도 문화적 깊이가 있고 그 위에서 힘을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하루였다.

돌탑의 새들. 나란히 선 새들이 지저귀며 친구를 부르고 있다. ⓒ 노시경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20 편이 있습니다.
#몽골 #몽골여행 #하르보흐발가스 #거란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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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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