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여운형, 안중근 제친 항일 전기영화 주인공

[서평] 이하나 지음 <대한민국, 재건의 시대>-플롯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등록 2016.09.09 21:46수정 2016.09.09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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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건의 시대 표지 ⓒ 푸른역사

<대한민국, 재건의 시대>는 기존 역사학계에서 다루지 않던 소재로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본다. 그간 한국 현대사 책들이 보여주던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와는 다르게, 이 책은 독특하게도 영화의 플롯을 통해 '대중의 심성사'를 펼쳐낸다. 덕분에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 현대사에 대해 새롭게 눈 뜨게 하는 미덕이 있다.

한 시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이 녹아 있는 특정한 플롯을 낳는데, 이 책은 '대중 영화'를 통해 그러한 플롯이 드러내는 시대의 의미를 추적한다. 대중 영화야말로 대중의 감수성이 잘 녹아 있으며 시대의 플롯을 드러내는 매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사 중에서도 특히 '재건의 시대'이자 '한국 영화 제1 르네상스 시대'인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영화를 분석한다. 이때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요소와 조건들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기이다. 책은 이 시기를 살펴보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기원을 찾는다.

나아가 그간 미처 보지 못했던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의 얇은 층들을 섬세하게 복원한다. 대한민국이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추구한 민족주의, 반공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근대화 등에 여러 층으로 겹겹이 서로 다른 결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해방 이후 영화에 '대한민국 건국 신화'가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서사를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첫째, 우리는 누구인가? 둘째, 우리가 아닌 것은 누구인가? 셋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넷째,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이 네 가지는 이 책에서 각기 하나의 부를 이룬다.

먼저, '우리는 누구인가'에서는 '항일 전기영화'를 분석한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것이냐는 어떤 인물이 기억되고 어떤 인물이 잊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이는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항일 전기영화에서 가장 많이 주인공으로 발탁된 이는 누구일까? 김구, 서재필, 여운형, 김규식, 안중근, 안창호, 김상봉 등 항일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제치고 주인공이 가장 많이 된 이는 바로 유관순이다.

유관순은 해방 이후에야 존재가 알려진 인물이고,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도 바로 영화였다. 영화를 통해 유관순은 민족의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 책은 유관순이 주인공인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깊게 분석해 나가며 유관순이 독립의 상징보다는 '건국 영웅'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읽어낸다. 이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유관순 영화는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로서 작용했으며 '3.1운동-유관순-대한민국 정통성의 근간'이라는 논리도 함께 만들어졌다고 분석한다.

이 책은 김구를 다룬 영화도 분석한다. 김구는 이승만의 라이벌이었기에 4.19혁명 이후에야 처음으로 그를 그린 영화가 제작된다. 그런데 그 영화들에서 항일 민족 담론보다 '국가' 담론이 우위에 선다. 김구는 '애국'의 아이콘이 되어 현실 대한민국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로 이용된다. 이러한 해방 이후 항일 영화들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정리한다.

"건국 신화를 대체하고 있는 항일 전기영화는 단지 '항일'이라는 민족주의의 발로에서 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민족'을 키워드로 하는 정체성의 물음에 대한 대중문화의 화답이었다고 볼 수 있다."(130쪽)


반공주의를 비웃는 반공 영화

정체성 형성에 있어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아닌 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어서 '우리가 아닌 것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에서 반공 영화들을 살펴본다. 그런데 무시무시하기만 할 것 같은 반공 영화들이 의외로 다양한 결이 있다.

반공 영화는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표 주자는 전쟁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쟁 영화를 살펴보며 미군 구출 플롯, 탈출과 귀순 플롯, 이념과 사랑의 삼각관계 플롯, 가족과 이념의 갈등 플롯, 이념과 인간성의 대립 플롯 등등을 찾아낸다.

나아가 이 책은 전쟁 영화들이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에 기대고 있지만,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인 예가 빨치산 부대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피아골>이다. 이 영화 전반에는 '이념보다 인간이 우선'이라는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휴머니즘은 공산주의를 공격하며 반공성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약화시키기도 하는 양면적인 잣대였다. 또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비무장지대>, <남과 북> 등의 반공 영화들이 반공과 틈새를 벌리며 '반전'과 '민족'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간첩 영화도 반공 영화의 기수다. 그런데 우리가 알던 전형적인 반공 영화와는 다른 '반공 영화'들도 여럿 나왔다. <살사리 몰랐지?>, <요절복통 007>, <요절복통 일망타진> 등의 코미디 반공 영화인데, 이들은 '덜떨어진 인물들'을 통해 간첩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아이러니한 코미디에 가까운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꽤 놀라운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 화해 정책이 실시된 이후에야 가능했던 '반공주의 희화화'가 이미 반공주의가 확립되는 시절부터 대중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반공 영화의 여러 모습에 대해 "반공주의의 내면화가 동시에 반공주의의 균열을 초래하기도 하는 대중문화 속 반공주의의 독특한 풍경"(264쪽)이라고 말한다. 또한 "반공영화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공주의를 무력화시켰다"(268쪽)고도 분석하며 반공주의라는 모호한 정체성 속에 겹겹이 쌓인 얇은 층들을 복원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공감,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 방황하는 시민

계속해서 이 책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주제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시대의 플롯을 분석한다. 영화를 통해 이 시대를 들여다보면, 그저 오랜 독재 시기로만 그려지던 당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공감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대표적인 영화로 <로맨스 빠빠>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민주적 가정에 대한 영화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막내나 여자라고 해서 무시당하지 않는다. 대화와 토론이 기본이 되며 가족간의 평등한 대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당시 대중들이 원하던 민주주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4.19 혁명을 가능하게 한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희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290쪽) 해서 흥미롭다.

한편 해방 이후 영화에서 자본주의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물질지상주의와 동일시되고 비인간적이며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 정서였다. 이 역시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맹렬한 반공주의가 떨치던 시기에 '반자본주의 정서'는 왜일까? 이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민주주의이지 자본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정서는 1960년대 초반까지도 지속되었다. 곧 반공주의와 반자본주의는 전혀 모순관계가 아니었다."(85쪽)


이 책은 사람들의 감수성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늘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는 점을 밝히고, "적어도 1950~60년대 영화들에서 자본주의적 현실에 뭔가 대중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감수성의 발현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365쪽)고 지적한다.

세계사적으로도 당시는 수정 자본주의가 일반적인 흐름이었고, 남한에서도 수정된 형태의 자본주의에 대한 선호가 있었다. 제헌 헌법 역시 사회민주주의적 지향,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경제 체제를 지향한다. 이 책은 이러한 해방 이후의 지향성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서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국민상'이 제시되는가 하면 '방황하는 시민'이 그려지기도 함을 보여 준다. 여기서도 역시 의외로 다양한 무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유신 시기로 다가갈수록 영화도 경직되고 정형화되어 간다. 그리고 유신 독재와 함께 한국 영화 제1의 르네상스 시대도 마감한다.

한 시대의 가능성은 그 사회의 상상력의 크기에 비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부 수립 이후 약 20년을 반공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단일한 이데올로기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우리나라', 혹은 '대한민국'은 통합되고 일치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고 교섭하는 복수의 상이한 공동체적 네이션(nation)으로 존재한다."(15쪽)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그동안 잊혔던 무수한 얇은 층들을 복원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은 그 의미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밝힌다.

"대중들의 심성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 네이션의 분열과 투쟁 과정이야말로 분단 이후 남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게 있어서 남한 역사에 대한 탐구를 이러한 심상적 네이션을 구성하는 정체성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 열쇠를 주조하는 거푸집을 만드는 것과도 같았다."(16쪽)


이 책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대중들의 의지와 지향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의외로 다양한 무늬와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가능성이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덕분에 이 책은 1950, 60년대를 새롭게 보게 하며 흥미로운 독서로 이끈다.

나아가 이 책은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본다. 1950~60년대의 갈등하고 교섭하는 상이한 심상을 돌아본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 구축에 새로운 상상력과 가능성을 펼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재건의 시대 (1948~1968) - 플롯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이하나 지음,
푸른역사, 2013


#대한민국 #재건의 시대 #이하나 #한국 현대사 #시대의 플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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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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