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을 거부한 이순신, 원균도 버텼지만

이순신과 그의 부장 김완을 함께 모신 경북 영천 동린각 ①

등록 2016.11.08 08:28수정 2016.11.0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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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동린각 외삼문의 풍경.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7호인 동린각(東麟閣)은 이순신과 그의 부장인 김완 장군을 모시는 곳으로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281-5번지에 있다. 사진의 왼쪽 담장은 김완 장군의 아버지인 김응생이 세운 자양서당의 것이다. ⓒ 정만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7호인 동린각(東麟閣)은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281-5번지에 있다. 당호(堂號, 집이름) 동린각은 해동의 기린을 모신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과 그의 부장 김완(金完, 1546∼1607) 장군이 그만큼 걸출한 인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래 동린각은 영천시 자양면 노항동에 건립되었다. 처음 세워진 때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1785년(정조 9)에 이르러 건물이 소실되었고, 2년 뒤인 1787년(정조 11)에 재건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그 후 성곡동으로 이전, 보수되었는데, 영천댐 축조 때문에 1976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공포, 주심포, 다포

집을 지으려면 수직부재인 기둥과 수평부재인 보를 연결해야 하므로 기둥과 보 사이에 받침목을 둔다. 그 받침목을 공포(栱包)라 한다. 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열한 건축 양식을 주심포, 기둥 사이에도 다포(多包)라 한다. 물론 다포가 훨씬 화려하다.

이 집은 중앙에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미고 후벽 1칸에 위패를 모셨다. 기둥은 네모, 여덟모, 원형 등 세 종류를 다양하게 사용한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기둥과 보를 연결하는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식으로, 안동과 영천 지방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으로 짜여졌다.

자양서당은 김완의 아버지 김응생이 건립

동린각 왼쪽에 자양서당(紫陽書堂)이 있다. 주소가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인데도 자양서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곳 일대가 1392년 조선 건국 이래 자양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영천 지역 의병장) 정세아는 난리가 평정된 (중략) 이듬해(1593년)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으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영천으로 돌아갔다'가 아니라 '자양'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양서당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8호이다. 동린각은 77호이다. 두 건물이 나란히 서 있기도 하지만, 문화재 지정 번호가 77호와 78호로 바로 이웃인 걸 보면 문화유산으로서도 무슨 연관성이 있지 않나 여겨진다. 강동면 양동마을 향단과 안강읍 옥산리 독락당이 서로 10km 이상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언적 관련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각각 보물 412호와 413호로 나란히 이어지는 지정 번호를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알고 보면, 동린각과 자양서당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지레짐작은 그저 추측만이 아니라 사실이다. 동린각의 주인공 김완은 자양서당을 지은 김응생(金應生, 1516∼1575)의 셋째아들이다. 자양서당은 호조참의 김응생이 1546년(명종 1) 고향의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서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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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장군의 아버지 김응생이 세운 자양서당. 사진 오른쪽 끝에 김완 장군을 모시는 재실 동린각의 일부가 보인다. 동린각과 자양서당은 각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77호와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정만진


서당은 4칸으로 나누어 대청과 유생들의 방을 두고, 전면에 쪽마루를 둔 평범한 구조를 보여준다. 서당 내에는 퇴계 이황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건물이 창건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훨씬 후대에 많이 보수된 상태이다.

자양서당은 영천댐 건설로 인해 1976년 7월 현 위치로 옮겨졌다. 현지 안내판에 따르면 '담장과 일각문은 현 위치에 건물을 복원할 때 새로 세운 것이다.' 일각문(一脚門)은, 일주문(一柱門)이 다포 등을 갖춘 채 화려하고 웅장한 면모를 뽐내는 데 견줄 때 기둥 두 개만 있는 소박한 문을 가리킨다. 보통 샛문 용도로 세워진다.

31세 무과급제 김완, 임란 직전 종3품 사도첨사 되어 바다 지켜

김완은 31세인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89년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 일원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다를 지키는 전라좌수영 사도첨사가 되었다. 첨사는 종3품 무관으로, 행정권을 가진 지방 문관 수령이 군사권까지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경 지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전문 무관인 장수가 맡는 직책이었다.

김완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인 옥포 해전, 그리고 당포 해전,  한산 대첩, 부산포 해전 등에서 줄곧 척후장(斥候將)으로 활약했다. 척후는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임무이다. 김완이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 계속 척후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그만큼 그가 용맹한 장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순신도 1592년 6월 7일자 <난중일기>에 '아침에 출발하여 영등포(거제시 구영리)에 이르렀을 때 적선이 율포(거제시 대금리 또는 구율리)에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중략) 적선 5척이 먼저 우리 군사를 알아채고 남쪽 넓은 바다로 달아났다.

우리 배 여러 척이 일제히 추격하여 사도첨사 김완이 1척을 통째로 잡고, 우후 이몽귀도 1척을 통째로 잡고, 녹도만호 정운도 1척을 통째로 잡았다. 왜적의 머리를 합해보니 모두 36급이었다'라고 기록하여 김완의 출중한 전투 능력을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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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린각은 본래 영천시 자양면 노항동에 건립되었는데, 1785년(정조 9) 건물이 소실되었고, 2년 뒤인 1787년(정조 11)에 재건되었다. 동린각은 그 후 성곡동으로 이전, 보수되었다가, 영천댐 축조 때문에 1976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 정만진


여러 해전에서 계속 공을 세운 김완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추천을 받아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고, 1595년에는 한산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한다. 하지만 '배에 오른 지 5년이 되도록 바다에서 지내면서 형제와 처자를 만나지 못한 채(김완 문집 <해소실기>의 표현)' 수군 장수로서 왜적과 싸우는 일에 분투하던 그의 생애는 뜻밖의 풍파에 휘말린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1597년 1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의 일이다.

1596년 12월 1일, 소서행장의 밀사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온다. 요시라가 김응서의 경상우병영을 방문한 것은 두 사람이 이미 여러 차례 만나 잘 아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응서는 두 해 전인 1594년 11월 22일 지금의 경상남도 함한 지곡현에서 소서행장과도 직접 만나 강화 회담을 가진 바 있었다. 비록 그 강화 회담은 소득 없이 끝났지만, 그 이후 김응서는 조선과 소서행장 사이를 잇는 대화 통로가 되었다.

요시라는 김응서에게 '1∼2월 중으로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 옵니다. 조선은 수전에 강하니 바다 복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하면 반드시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강화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등청정이 관백(풍신수길)에게 자신이 조선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귀국에서도 익히 아는 바가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일본의 이간책에 속은 조선 조정, 그러나 이순신은 음모를 간파

12월 4일에 김응서의 보고를 받은 선조는 그 다음날인 12월 5일 '통제사(이순신)로 하여금 정탐군을 파견하게 하여 바다를 살피고 있다가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오는 날 해상에서 요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다만 가등이 오는 때가 정확하지 않으니 요시라에게 뇌물을 잔뜩 주어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도록 하시오' 하고 대신들에게 명령한다.

1597년 정월 초하루, 가등청정이 1월 중순에 바다를 건넌다는 소식을 김응서가 조정에 알린다. 선조는 '통제사와 경상우병사는 잘 협력해서 일을 성공시키도록 하시오. 결코 서로 공을 다투다가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될 것이오. 과인은 두 사람의 공로를 반드시 으뜸으로 삼겠소' 하고 당부한다. 물론 선조는 '적이 우리를 속여 기만책을 흘린 것인지도 모르니 마땅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할 것이오' 하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1월 2일 임금의 출전 명령을 받고도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는다. 일본 측의 속임수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선조는 계속 출정을 명한다. 이순신은 왕명을 거부한다. 이윽고 1월 13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말을 타고 한산도로 달려간다.

이때 가등청정이 1월 12일과 13일에 걸쳐 부산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진다. 선조는 2월 6일 이순신 체포령을 내린다. 3월 4일, 이순신은 투옥된다. 하지만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도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지 않는다. 전함을 몰고 부산을 공격하라는 도원수 권율과 조정의 명령이 떨어져도 배를 출전시키지 않는다.

이순신이 거부한 부산 앞바다 출정 명령, 원균도 따르지 않아

당시는 부산에서 거제도 북쪽 해안에 이르는 바닷가가 온통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진격했다가는 앞에는 부산포의 일본 수군, 뒤에는 경남 해안선 일대의 왜성에서 몰려나와 배를 타고 달려온 일본 육군에게 앞뒤로 에워싸일 게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도 출전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이순신만큼 강단이 없었다.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한 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수군 장졸들과 전함을 지킴으로써 일본군에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려 했지만, 권율에게 끌려가 두 번 곤장을 맞은 원균은 결국 1597년 7월 5일, 모든 전함을 몰고 부산 앞바다를 향해 출발했다.

수군통제사를 부하 장졸들이 보는 앞에서 두 번씩이나 곤장을 때린 권율도 너무했지만, 이순신만한 배포를 보여주지 못한 원균도 나라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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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린각 사적비의 오른쪽 뒤로 자양서당이 보이는 풍경. 동린각은 자양서당보다도 더 오른쪽에 있어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동린각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서 큰 활약을 했던 김완 장군을 기려 세워진 재실이고(사당에는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을 함께 모신다), 자양서당은 김완 장군의 아버지인 김응생이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이다. ⓒ 정만진


김완의 인생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뒤틀어진 것도 이때였다. 7월 7일 다대포 앞바다에서 왜선 10척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전황은 괜찮았다. 왜장이 탄 안택선 한 척을 혼자 돌진하여 쳐부순 김완은 풍신수길이 피를 나눠 마시면서 맹세한 문서를 빼앗았고, 아군은 적선 여덟 척을 바닷물 속으로 처넣었다. 적군 대장인 화산구고(樺山久高, 가바야마 히사다카)와 경념(慶念, 게이넨)이 탄 두 척만 간신히 도망쳤다.

그러나 부산포 앞에 당도했을 때가 문제였다. 바다를 건너온 적선 1천여 척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아군도 280여 척이나 되는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한번 일전을 겨뤄볼 만했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풍랑이 일어났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전투를 벌일 경황이 없었다. 모두들 배가 뒤집어지는 와중에 난간에서 떨어져 물귀신이 되지 않는 데만 안간힘을 쏟을 뿐 전투에는 관심도 없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엄청난 풍랑, 조선 수군에게만 속수무책의 피해

그래도 적군은 해안으로 떠내려가도 왜성의 아군이 기다렸지만, 조선 수군은 그 반대였다. 바닷가로 떠내려가면 적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꼴이었다. 운이 좋아 물귀신이 되지 않고 무사히 뭍으로 떠내려가도 그곳은 일본군이 무장을 한 채 기다렸다. 서생포로 표류한 아군 전함 일곱 척의 수군들은 기다리고 있던 가등청정 군의 칼날 아래 한꺼번에 도륙되었다. 조선 수군은 그렇게 전투도 못 해본 채 20척의 판옥선과 장졸들을 잃었다.

원균은 후퇴하여 칠천량에 전군을 주둔시켰다. 본래는 한산도로 가야 하지만 잠시라도 빨리 재출전을 하려고 그곳에 진을 쳤다. 그것이 결정적 착오였다. 경상우수사 배설 등이 '이곳은 물이 얕아 덩치가 큰 판옥선이 밤을 샐 곳이 못된다. 적들이 기습을 하면 우리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당할 것'이라면서 끝까지 반대했지만 원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7월 16일 새벽, 사방에 잠복한 채 야습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조선 수군은 배설이 구해내어 뒷날 명량대첩의 밑거름이 되는 10여 척을 제외한 모든 전함들과 3만여 장졸들의 생명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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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린각의 내삼문과 사당의 모습. 사당에는 이순신 장군과 김완 장군을 함께 모시고 있다. 김완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부장으로 큰 활약을 한 무장이다. ⓒ 정만진


김완은 칠천량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좌우에서 도와주는 아군이 없었고, 그냥 적과 맞부딪혀 서로 포를 쏘고 화살을 날려대던 중에 군관 유영호(劉英豪)와 이춘연(李春連), 종 필연(必連)이 탄환에 맞았다. 유영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완 본인도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았지만, 모두들 빈주먹을 휘두르며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김완 문집 <해소실기>의 표현, 아래 작은따옴표로 인용한 내용도 같음).'

김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왜적 한 놈을 벤 뒤 죽기로 결심했다. 종 필연이 (중략) 붉은 옷을 입은 왜적 하나가 배를 붙잡고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가슴으로 부딪쳐 물에 떨어뜨린 후 그가 다시 올라올 때를 기다렸다가 이마를 칼로 찔렀다. 포수 박곤(朴昆) 등은 창을 쥐고 배꼬리에 엎드려 있다가 목구멍을 공격하여 세 명의 왜적을 죽였다.'

그러나 김완은 '바닷가의 왜적 무리들이 한꺼번에 아군 전함으로 올라와 칼을 들고 돌입하던 와중에' 빽빽이 늘어선 적의 칼날이 왼쪽 귀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부상을 당했다. 그 바람에 몸이 물속으로 떨어졌다. 김완은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혹은 뜨기도 하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뜸(풀로 엮은 거적) 하나가 떠내려왔다.' 그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잡아당겨 몸을 의지했다. 뜸은 그에게 잠깐의 휴식을 주었다. 이윽고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바위섬에 닿았다. 어떤 상인이 "사령(使令) 간손(艮孫)과 포수 박곤이 이곳에 있습니다" 하고 말해주었다. 섬이름은 내서기도(乃胥歧島) 혹은 어리도(於里島)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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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도(왼쪽)와 거제도(오른쪽) 사이의 좁고 얕은 바다 칠천량. 이곳은 조선 수군의 최초, 최대의 패전을 기록한 바다이다.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과 도원수 권율의 재촉에 못이겨 부산 앞바다로 출정했다가 불의의 풍랑을 만나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피해만 입고 철수하여 칠천량에 주둔한다. 그러나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행로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고, 그래서 칠천량 일대의 땅에 잔뜩 매복해 있었다. 그리고 밤에 야습을 했다. 사진은, 일본군의 새벽 야습에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조선 수군은 육지로 올라오면 왜성에서 나온 일본 육군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정만진


김완은 박곤 등과 함께 수풀 속에 엎드려 몸을 숨기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조선 수군의 전선들이 일제히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노라니 '참으로 참담하였다. 밤새도록 통곡하며 서로를 베개 삼아 칡넝쿨 아래 누워서 지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탄환에 맞아 상처를 입고 신음 중이던 종이 있었는데, 결국 운명했다. '모질고도 모진' 밤이었다. '내내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밤을 지샜지만 적선이 바다를 덮고 있어서 감히 머리를 내밀 수 없었다. 천지가 망망하고 어디 호소할 데가 없어' 김완은 '스스로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귀신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칠천량에서 대패한 조선 수군, 김완도 끝까지 싸웠지만

17일 저녁이 되자 왜적들의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김완은 간손 등과 함께 칡을 캐어 나무를 얽어매었다. 그렇게 만든 뗏목 하나에 일곱 명이 타고 진해 앞바다까지 갔다. 하지만 뭍에 거의 닿으려는 찰나 폭풍이 연이어 심하게 일어나고 미친 파도가 몰려왔다. 칡으로 만든 끈은 조각조각 끊어져 버렸다. 뗏목 나무가 제 각각 흩어졌다.

순식간에 절반이 물에 빠져 죽었다. 간손은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해온 보자기(鮑作)라서 물에 매우 익숙했다. 간손은 잽싸게 나무 하나를 움켜잡고서 땅으로 건너갔다. 김완은 물에 잠겼다 떴다를 반복한 끝에 마산포까지 떠내려갔다.

먼동이 틀 무렵, 우리나라 보자기 네 명을 끌고가던 왜적들이 김완을 발견했다. 왜적들은 우리 전함 판옥선과 기타 여러 배들을 불태운 뒤 본대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적들은 김완을 추적하여 바닷가를 달려왔다.

기력이 다한 김완은 그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줄곧 물속에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되풀이한 며칠이었다.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죽는 수밖에 없었다. 김완은 스스로 나무토막에서 손을 떼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계속)
덧붙이는 글 기사가 너무 길어 2회에 나누어 싣습니다.
#김완 #이순신 #김응생 #동린각 #자양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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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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