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했던 꽁초의 추억

[논픽션 DMZ ⑧]

등록 2016.11.24 11:57수정 2016.11.2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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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였다. GP에 들어와서 처음 맞는 장마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투명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장구름이 덥혀 있었고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에 맹렬하게 타오르던 DMZ는 숨을 죽이고 그 비를 맞으며 잔득 움츠리고 있었다. 대남방송도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엄혹한 상황에 고립되어 있어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 먹는 건 군 사기의 핵심이다. 세계 전쟁사를 보더라도 식량의 원활한 지원이 없으면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으며 당연히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이 소련 침공에 실패한 원인 중 하나도 원활하지 못한 식량 조달이었다. 소련의 그 악명 높은 혹한에서 그것도 자국도 아닌 타지에서의 식량이 제대로 추진될 리 만무였다.


FEBA에 있을 때, 일주일 가량 훈련 나갈 때면 우리는 항상 야전 식사에 불만을 가지곤 했었다. 부대에서 먹는 양과 질적인 면을 비율로 따진다면 잘해야 50%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야전에서 밥을 만들고, 반합으로 배식을 받아 소대나 분대로 이동을 해야 하는 악조건 등으로 볼 때 부대만큼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배고픔은 열악한 조건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하여 우리는 중대 인사계한테 밥 좀 많이 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인사계는 이렇게 일갈했다.

"그것도 훈련이야!"

하지만 꿈의 궁전 GP엔 부식이 정량에 가깝게 들어온다. 그러니까 양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훈련이나 작업이 없으니 배고픔을 모르고 생활한다. FEBA에 있을 때처럼 건방, 생과자, 라면 등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먹는 것만큼은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의 생체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2,3일 간격으로 들어오는 보급차를 엄호하기 위해 우리는 1개 분대를 통문으로 보낸다. 일명 부식추진작전이다. DMZ에서의 군 이동은 훈련이 아니라 모두 실전이기 때문에 작전이라 부른다. 우리는 통문에서 보급차(지프)를 만나 700미터(실제 거리는 더 되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명명했다) 거리의 비포장 좁은 보급로를 따라 함께 우리의 궁전으로 이동을 한다. 우리 성은 그래도 지형이 양호해서 이동이 수월하지만 옆 성 만 해도 산세가 험악하여 보급차의 이동이 차마고도처럼 스릴 만점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상황은 지극히 평범한 상황이다. 비가 많이 오거나 안개로 인해 시야가 불량하여 보급차가 통문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가 직접 통문으로 나가 부식을 지게에 짊어지고 온다. 물론 눈이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식량을 따불백에 담아 지게에 지고 비를 맞으며 음침한 비무장지대를 다니는 게 분위기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먹어야 한다는 집념은 그 어떠한 조건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보라가 치든 비바람이 치든 악천후 속에서도 식량을 조달할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러니까 아예 보급차가 통문으로 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철책 밖에 있는 험악한 군사도로가 폭우로 인해 유실이 된다든지, 폭설로 빙판길이 된다든지 하는 경우엔 보급차가 간절히 원해도 통문까지 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통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는 사육사가 먹이를 가지고 통문에 오기만을 한없이 기다릴 수뿐이 없다. 무기력하지만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해 7월이 그랬다. 장마는 7월이 들어서자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통문으로 와야 할 보급차가 오지 않았다. 도로 유실이 이유였다. 비가 시시때때로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복구작업은 지지부진했다. 그렇게 보급차는 한 번을 걸렀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는 자급자족을 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철책 근방에 있는 부대에서는 쌀과 보리를 제외한 반찬거리는 농사를 지어 조달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군대는 그렇게 생각만큼 무지막지한 동네가 아니므로 전부 믿을 필요는 없다. 산악지역인 곳은 인력이든 차량이든 부식 운반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봄 여름철엔 잠깐씩 텃밭을 만들어 채소농사 정도는 지었을 것으로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성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림잡아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조리를 할 수 있는 식량인 쌀, 보리, 밀가루 등을 다 소비한 후에도 건빵과 시레이션 등 전투식량으로 양을 조절하면서 버틴다면 한 달은 족히 감당할 수 있다. 반찬이 없으면 건더기 없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연명할 수도 있다. 막말로 쌀만 있으면 화목을 해서라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존의 법칙은 복잡한 공식이 필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담배였다. 우리가 통문에서 가지고 오는 보급품 중에는 식량은 물론이고 편지나 소포, 건전지 등의 소모품, 그리고 군용담배 등 갖가지 생필품이 있는데, 마침 그 즈음이 군용담배 보급 기간이었던 것이다. 대략 15일 간격으로 들어오던 담배 보급이 끊기자 대책없이 보급 일자에 맞추어 가지고 있던 담배를 모두 소진해 버린 우리는 한마디로 난감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금연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삼시세끼 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더라도 불평을 하지 않았지만 금단현상이 오자 서로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담배 소진 후 둘째 날까지는 나의 영원한 심복인 보급병 송○○에게 몇 개비 얻어 피우며 그럭저럭 보냈다. 하지만 녀석도 셋째 날에는 두 손을 들었고, 나는 자타가 골초인 다른 놈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기 시작했다. 왕고참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최대한 짜내어 녀석들을 닦달했다. 비상용으로 꼬불쳐 두고 있는 놈들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을 하더라도 녀석들은 충분히 은밀하게 숨어서 끽연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혹한기 훈련 때 콧물이 얼 정도로  추운 새벽에도 귀신 같이 술을 만들어 오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성 안에 그 많던 성냥과 라이터가 동이 나서 한바탕 홍역을 치룬 적이 있었다. 그때 송○○이 기발한 착상으로 담배 화구를 만들었다. 통신장비에 사용하는 랜턴용 배터리를 비상용으로 10여개 비축하고 있었는데, 그 배터리 + - 극에 볼펜 스프링을 연결하면 놀랍게도 스프링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 불에 담뱃불을 지폈던 것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그렇게 사용한 배터리는 막대한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조리 방전이 되었고, 자세한 사정을 숨긴 채 죄 없는 중대 2,4종계한테 광분하며 배터리 보급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모나미 볼펜은 당연히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넷째 날에도 보급차는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중대 2,4종계한테 성토를 했다. "도대체 우리를 굶어 줄 일 것이야, 내일도 부식차가 안 들어오면 통문을 열고 철책을 넘어갈 거다"라고 우리는 분연히 궐기를 했다. 중요한 건 밥 세끼는 어떡하든 참을 수 있지만 금단현상은 우리의 의지를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젠 마지막 방법뿐이 없었다. 취사병 이○○을 만나 간절히 사정해보는 것이었다. 녀석은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자타가 공인하는 냉혈한이었다. 만물상회인 녀석은 한번 자신의 수중에 들어간 물품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다시 내놓지 않았다. 그래도 왕고참인 나에게는 조금은 마음을 열 것으로 희망을 간절히 바래보기로 했다.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녀석과 식당에서 마주했다. 녀석은 내 눈빛만 보고도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방송병 한데 담배가 좀 있을 겁니다. 내가 알기론 게들이 우리 식구들한테 돈 받고 파는 거 같거든요."

그래, 그거였다. 방송병은 주방장에 비하면 거상이었다, 그걸 왜 잊고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알고 있기론 소대원 70~80%는 흡연자들인데 이렇게 며칠 동안 조용한 것을 보면 알게 모르게 숨어서 은밀하게 끽연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참한테 걸리면 뺏길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쁜놈들...

하지만 나에겐 돈이 없었다. 지난주 꽃마차라 불리우는 PX차가 왔을 때 소대 회식시켜준답시고 돈을 다 썼기 때문에 수중에는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FEBA로 외박을 나가는 선임하사가 우리 GP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돈 쓸 일이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돈을 모은다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고, 하여 꽃마차가 들어오면 왕고참 기분낸다고 주머니 탁탁 털어 소대원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는 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적은 돈이지만.

주방장은 잠시 고민하고 있던 나를 남겨두고 주방으로 가다니 곧 다시 와서 앉았다. 그리고 내 손에 넌지시 피다 만 꽁초를 쥐어주었다. 자신이 피다 꼬불쳐 둔 건데 나에게 그거라도 피우라고 주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있는 꽁초는 그래도 장초였다. 몇 모금은 족히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녀석은 두꺼운 얼굴 피부를 씩하고 움직였다.

닷새가 되었는데도 보급차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이젠 정말 된장국도 지겨웠고 수제비도 이골이 났다. 아직도 하늘은 먹장 구름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제 상황실에 있는 분유통 만한 양철 재떨이에도 더 이상 불을 붙일 수 있는 꽁초는 보이지 않았다. 검게 그을린 필터만이 수북했다. 이젠 정말 내 수중에는 담배 부스러기 하나 없었다. 나뿐만 그럴까. 정말 그럴까. 이 샹그릴라 안의 누군가는 지금도 끽연의 포만감을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 나의 심복 송○○도 믿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나에게 담배는 없노라고 두 손을 들은 녀석의 말을 정말 믿어야 하는가. 동쪽 그 음침한 벙커에서 혼자 니코친을 음미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 아마도 담배는 나한테만 없는지 모른다. 모두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를 비웃으면서.

잠시 비가 멈춘 오후, 혹시나 해서 나는 벙커 안과 성벽 주위 등 성 안 구석구석 바닥을 무슨 지문이라도 채취하듯 눈을 부릅뜨고 훑었다. 혹시라도 떨어진 꽁초가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결과는, 평상시엔 담배꽁초 버리지 말라고 지른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바닥은 아주 깨끗했다. 종이가 벗겨진 필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장마 엿새 날, 비는 소강 상태였다. 아마 내일 정도면 장마가 물러날 것이라고 했다. 도로복구는 곧 끝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그때 가봐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늦은 오후, 머리카락이 곤두선 채 상황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북쪽으로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을 때 요즘은 군견병하고 잘 지내고 있는 정○○이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말 비가 지겹도록 오네요"라고 입을 연 녀석은 책상 위로 신문지에 싼 무엇을 넌지시 내밀었다.

"이거 내가 며칠 동안 온 성 안을 샅샅이 훑어 모은 꽁초에요. 신문지에 말아서 피세요. 좀 독하지만 필 만 해요"

나는 의자에서 몸을 세우고 그 신문지 뭉치를 폈다. 두어 개비 말아 필 정도의 거무스레한 연초가 습기를 머금고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책상 위에 있는 전우신문을 직사각형으로 찢어 그 위에 연초를 놓고 돌돌 말은 후 침으로 발라 궐련을 만들었다. 예전, 동네 시장 언저리에서 할아버지들이 신문지에 말아 피던 궐련이 떠올랐다. 그래도 비루했던 그 당시에도 피던 꽁초 부스러기를 말아 피지는 않았다.

녀석은 능숙하게 말은 궐련을 나에게 건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혹독한 금단현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권련을 입에 물고 성냥불을 붙였다. 회색의 검뿌연 연기가 눈앞에 피어오르더니 이내 진한 니코틴이 폐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비무장지대에서 사는 이야기
#DMZ #GP #FEBA #전방 #비무장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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