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얽매이지 않는 삶 위해, 한국을 떠납니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여행 ①] 여행 출사표

등록 2016.11.24 17:28수정 2016.11.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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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신은 내게 일종의 계시를 내렸다. 우연히 마주한 두 가지 사건 때문에 인생 방향을 수정해야했다. 그해 3월의 끝자락에 떠난 핀란드 여행에서 난생처음 아나키스트를 만났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단 1%도 참여하고 싶지 않아 숲속에서 자급자족으로 살고있어"라고 했다. 그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낡은 통나무집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에 저항했다. 정부에서 주는 모든 복지혜택마저 거부했다.

나는 신문이나 뉴스의 사회면을 보며 혀만 끌끌 찰 뿐, '남들도 그렇게 사는 걸 어쩔 수 없잖아'라고 사회에 순응한 채 살았었다. 정치나 사회 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다. 핀란드인 아나키스트는 나의 말과 태도가 용기 없는 자의 변명에 불과함을 몸소 증거했다. 내가 월 200만 원을 벌기 위해 1년 중 어느 때라도 자다가 고객 전화를 받았다면, 아저씨는 농사일이 없는 긴 겨울 동안만큼은 원없이 잠을 잤다. 불안에 떨며 사는 나 보다, 월 30만 원으로 사는 아저씨가 더 행복해 보였다. 돈이 적어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니!


한국에 2014년 4월 14일에 돌아왔다. 딱 이틀 후, 세월호는 300명이 넘는 생명을 태운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온몸이 시퍼렇게 되어 돌아온 아이를 마주하는 부모의 비명 소리가 사회에 울려 퍼졌다. 슬픔도 잠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도 세월호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아지는데, 사람들은 '이제 지겨워 그만해', '경제가 더 중요하지'라고 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지금의 사회에서는 돈이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너무 선명하게 알아버렸다.

마지막에 탈출하려고 애를 썼는지, 이따금 손톱이 빠진 시신이 건져졌다. 아비규환의 죽음이었다. 일면식 하나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죽음 앞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뿐이었다. 세월호 광화문 광장이 만들어지고, 유가족들의 단식이 이어졌다. 직장이 광화문 근처였다. 광장을 자주 지나다녀야만 했고, 점차 고립되는 유가족들을 목격했다. 극우파들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밥을 먹었고, 일부 시민들은 세월호 유가족이 시체 장사꾼이라는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잔인한 사회를 목격할 때마다, 내 안에 남아있던 죄책감과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감이 말을 걸었다. '이대로 세월호를 잊을 거야?' 이번마저 '남들도 그렇게 사는 걸'이라는 식의 말 따위로 받아칠 수 없었다. 냉소주의적 태도, 권력의 힘에 굴복하는 자세는 정부의 유가족 탄압에 힘을 더하는 꼴이었다. 더 이상 시스템에 반항조차 하지 못하던 예전의 삶을 살 수 없었다. 돈보다는 생명이 먼저임을 삶으로 증거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아이들의 죽음 앞에 부끄럽지 않았다.        

핀란드 아나키스트의 삶이 생각났다. 이 무서운 사회에 동참하지 않아도 살아갈 길이 있을 것 같았다. <윌든> <조화로운 삶>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같이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적 삶을 보여주는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점차 지속가능한 삶이라는 키워드가 다가왔다. 지속 가능한 삶은 자연 착취적이고, 권력 맨 아래에 있는 생명의 희생을 필수로 하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시스템을 지양한다. 대신,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며 사는 삶을 지향한다. 수익을 높이는 데 제 1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

5년 동안 해오던 사업도 돈 때문에 생긴 불안 때문에 힘에 부치던 차였다. 돈에 저당 잡힌 인생은 돈이 많건 적건 불안했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싶어 사업을 정리했다. 사업을 정리했지만 막막했다. 지속가능한 삶이 절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돈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먼저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 확신을 얻어야 했다. 지속가능한 삶이란 주제는 한국에서는 생소하지만, 유럽이나 북미 등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지속가능한 생태 공동체가 설립 20년 안팎이지만, 미국에는 세계 1, 2차 대전 때부터 이어져온 곳들이 많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1년 동안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여행의 테마를 지속가능 한 삶으로 잡았다. 나에게 지금의 돈이 제일 중요한 사회를 부정하고, 대안적 삶을 알려줄 여행을 하고 싶다. 한번 해보라고, 그래도 죽지 않는다고 용기를 불어넣어줄, 삶의 기술들을 알려줄 장소와 사람을 만나려 한다.

첫 도시는 호주, 멜버른으로 정했다. 멜버른에 가면 우울증을 앓았을 때, 옆에서 힘이 돼 주었던 친구가 있다.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멜버른을 택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예상외의 것들 이 꽤 많다. 프리건(Freegan)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형 마트의 쓰레기통을 뒤져 공짜 음식을 얻는 덤스터 다이빙(Dumpster diving)을 한다. 대형 마트에서는 유통기한이 단지 몇 시간 지났다는 이유로 식용가능한 음식을 포장째 쓰레기통에 버린다. 프리건들은 마트를 비웃으며 쓰레기통에 다이빙한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시스템에 즐겁게 도전한다. 멜버른 덤스터 다이빙 페이스북 그룹에 가입해보니 유기농 블루베리 잼, 스위스 초콜릿 등을 박스째로 얻었다고 한다. 멜버른에 가 프리건들을 만나볼 예정이다.

볼리비아에 가면 희망꽃 학교도 가보고 싶다. 희망꽃 학교는 한국인 한꽃거지씨가 세운 학교다. 한꽃거지씨는 나름 유명한 여행가다. 그는 '듣보잡 지방대'를 휴학하고, 무작정 떠난 배낭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빈민 가족에게 고급 카메라를 사려고 아껴둔 돈을 기부했다. 그 빈민 가족은 받은 돈으로 집을 지었다. 그렇게 원하던 카메라를 못 사게 됐는데도 더 없이 행복했고, 그는 그날 이후로 볼리비아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꿈을 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100원만 주세요. 학교 만들게요"라는 구호를 몇 년 동안 외치고 다닌 결과, 그는 정말 학교를 만들었다. 그 학교가 볼리비아에 있는 희망꽃 학교로, 나는 그 학교의 호구(이 학교에서는 정기 후원자를 호구라고 한다)다. 한꽃거지씨를 만나 묻고 싶다.

"정말 그렇게 행복해요? 뭐가 당신을 돈에서 자유롭게 한 거죠?"

여행의 목표는 분명하다. 대안적인 삶을 살기 위한 주택 제작, 에너지 만들기 등의 구체적인 기술 강의를 들을 예정이다. 이미 기술을 활용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에도 가보려 한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고, 괴짜 같은 인생을 살아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쌓고 싶다. 여행을 통해 쌓은 내공으로 돈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 시스템을 유쾌하게 비웃고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내가 그런 인생을 살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자, 이제 시작이다.
#세계일주 #대안적 삶 #지속가능성 #아나키스트 #친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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