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을 읽으면 시진핑이 보인다

조영남 교수 역작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출간... 중국을 보는 통찰력 키워

등록 2016.11.29 18:07수정 2016.11.2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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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교수의 역작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1권은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주도권을 잡고 개혁과 개방을 시작하던 시기다. ⓒ 민음사

'전략적 동반자 관계'니 하면서 한없이 가깝게 이야기하던 중국과의 사이가 사드 배치 이후 급속히 멀어지고 있다. 정부는 사드 배치로 인한 보복조치는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지만, 현장에서 들리는 아우성은 갈수록 높아간다.

멀어지는 한중관계의 원인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대통령을 포함한 중국에 대한 정부의 이해 부족이다. 특히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에 대한 이해는 상식인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한중관계의 모든 면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를 통해 현 정부를 통찰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조영남 교수가 쓴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시리즈(민음사 간) 세 권이다.


어떻게 덩샤오핑을 통해 시진핑을 읽을 수 있을까,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덩샤오핑 시대와 시진핑이 가진 유사성을 느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중국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또 이런 이해가 있어야만 향후 시진핑이 직접 통치하는 6년과 그가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10년을 읽을 수 있다. 16년의 세월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미중 관계 등에서 상전벽해가 가능한 중요한 시간인 만큼 시진핑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덩샤오핑과 8대 원로의 기묘한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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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개혁 개방의 가장 큰 수혜자인 선전 야경 홍콩과 맞닿아 개혁개방의 초기 기지가 된 선전은 10만 안되던 인구가 2000만명으로 급성장했다 ⓒ 조창완


1권 '개혁과 개방'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실권을 쥐는 이야기가 중심이고, 2권 '파벌과 투쟁'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를 다루고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을 다룬다. 3권 톈안먼 사건은 1988년부터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한 1992년까지는 주로 다루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쟁점인 톈안먼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책은 덩샤오핑이라는 막후 실세 지도자의 행보를 씨줄로, 역사적 흐름을 날줄로 하고 있다. 저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 중국 혁명 1세대가 대부분 사망한 1976년부터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순강화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1992년까지를 덩샤오핑의 시대로 보고 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편년체 역사서이지만 독자들은 중국에 대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우선 저자는 덩샤오핑의 시대가 톈안먼 사건이라는 큰 갈등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성공한 시대라고 본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봤다.

첫 번째는 개혁 개방을 결정하고 지도했던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정치 리더십이고, 둘째는 결정한 개혁 개방을 현실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던 정치 제도와 유능한 당정간부, 셋째는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맞추어 만들어진 개혁 개방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리더는 현실 지도자보다는 오히려 8대 원로로 불린 혁명 2세대였다. 덩샤오핑, 천윈, 리셴녠, 예젠잉, 펑전, 양상쿤, 보이보, 덩잉차오를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90세 이상 살았고, 1990년대 사망했는데, 사망 직전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들이다.

물론 이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덩샤오핑이고, 그가 변화를 주도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의 사망 직후 가장 당면한 문제는 4인방의 처리였고, 이는 마오에게 공식으로 권력을 이양받은 화궈펑과 군부에 강한 원로 예젠잉이 주도해 큰 무리없이 처리된다.

1973년 2월 하방을 끝내고, 1975년 1월 부총리가 된 덩샤오핑은 그해 정돈운동으로 개혁에 대한 나름대로 자신을 얻는다. 이후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네 차례의 해외탐방을 떠나고, 싱가포르 등을 통해 방향성도 얻는다. 일단 덩샤오핑은 외국의 신기술 도입, 외국 자금 이용, 교육 사업과 과학연구라는 철학을 기조로 한다.

당시 덩샤오핑의 생각을 현장에서 진행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완리는 안후이성에서 농촌을, 자오쯔양은 쓰촨에서 도시개혁의 실험을, 시중쉰은 광둥에서 연해지역 수출산업과 선전 등 경제특구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다. 특히 선전특구는 1979년에서 2007년까지 매년 GDP 성장률이 33.8%를 기록해 인구 10만의 지역이 2000만명이 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덩샤오핑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없을 리 만무했다. 온건한 개혁파인 천윈이나 후차오무 등은 경제특구가 제국주의 강점가에 조계나 다름없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야오방의 지지 등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화궈펑이다. 마오가 직접 육성하고 선택한 후계자인 화궈펑은 '양개범시'(兩個凡是 마오가 작성한 정책이나 지시는 시종 변함 없이 따른다)를 내세우며, 지도자나 인민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반면에 덩샤오핑은 1978년 6월 2일 열린 전군 정치공작회의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주장하고 개인숭배, 교조주의, 유심론을 비판하면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이런 흐름에 천윈, 리셴녠, 예젠잉 등이 지지하면서 서서히 덩샤오핑 쪽으로 저울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고, 그 시점을 1978년 12월에 열린 11기 3중 전회로 본다.

다음해 2월 열린 11기 5중 전회에서는 왕둥싱 등 화궈펑 세력이 물러나고, 덩샤오핑의 노선을 지지하는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승진해 실질적으로 덩샤오핑의 시대가 더 굳어진다. 물론 덩의 시대는 1982년 9월 열린 12차 당대회를 통해 중앙군사위 주석을 맡으면서 확고해진다. 중앙군사위 주석은 이후에도 중국 권력 향배를 가늠하는 주요한 잣대인데,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만큼 실질적 지도자인 핵심인물(领导集体核心人物)을 상징한다.

새로운 엘리트 키운 덩샤오핑

2권 '파벌과 투쟁'은 아무래도 역동성이 떨어지는 시기인데, 저자는 그 관전 포인트를 보수파와 개혁파의 투쟁에 맞추었다. 화궈펑이 사라진 시대에 원로정치 인사 가운데 보수파는 천윈과 리셴녠을 중심으로 보고, 대척점에 개혁파 덩샤오핑이 있는 구조로 본다.

덩샤오핑은 하루라도 빠른 개혁개방을 주장하고, 너무 빠른 개혁의 부작용을 아는 천윈은 안정적인 전진을 주장한다. 실제로 두 세력은 주기적으로 세를 과시한다. 이를 덩리췬은 좌우파동주기설이라고 설명하는데, 크기는 달라도 서로 주장을 내세우면서 여론을 장악하려 한다.

그런데 덩샤오핑에게 노령화되는 지도체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982년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대약진이나 문혁의 세대를 넘을 인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바로 '제3제대 프로젝트'다. 1980년 국가기관 30여 곳 주요 지도자의 평균 연령이 63세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에 덩샤오핑은 간부의 4화(연소화, 지식화, 전문화, 혁명화)를 주장하며 젊은 인재를 발탁했다. 이런 여파로 1982년에 중앙 당정기관에서 총 7260명의 고위급 간부가 퇴직했는데 이는 전체 고위급 간부의 8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왕자오궈, 장쩌민, 리펑,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도 선발해 차세대와 차차세대의 기틀까지 다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부각한 인물이 장쩌민이다. 1986년 안후이성 허페이 과기대 시위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됐는데, 그 당시 장쩌민은 상하이시 시장이었다. 그는 12월 18일 모교인 상하이자오퉁대학에서 열린 시위에 참석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영어 전문을 외워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당시 총서기는 1982년 12기에서 당선된 후야오방이었다. 그런데 학생 시위가 진정되지 않으면서 1987년1월에는 반강제적으로 퇴진하는 상황에 이른다. 후야오방의 퇴진에는 지식인 정책에서 덩샤오핑과 틈이 생기고, 원로들의 퇴진에 대한 직설적 주장이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은 개혁파로 그를 밀었던 덩샤오핑으로서도 뼈저린 일이었다.

이후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불러 새로운 판을 짠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1987년 11월 1일 13기 1중전회 폐막에서 확정된 새로운 상무위원회다. 당시 5명의 상무위원은 짜오쯔양, 리펑, 차오스, 후치리, 야오이린 등으로 큰 색깔이 없었다. 물론 이 구성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텐안먼 사건이 끝난 89년 6월에 개최된 13기 4중전회에서 장쩌민, 러펑, 차오스, 야오이린, 쑹핑, 리루이환 체제로 대체된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힘 겨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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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의 상장 선전의 롄화산에 있는 덩샤오핑 동상 마오쩌둥 동상은 많이 있지만 덩샤오핑 동상은 이곳과 덩의 고향 광안에 있는게 전부다 ⓒ 조창완


3권 '톈안먼 사건'은 말그대로 이 격변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그 씨앗은 1988년부터 덩샤오핑의 지원 아래 자오쯔양이 추진했던 가격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시작됐다. 당시 물품의 시장 가격은 정부가 관장하는 계획 가격보다 휠씬 높았다.

이 과정에서 당정간부들이 이 가격격차를 통해 이익을 챙기는 관다오(官倒)가 성행했는데, 이를 개혁하려다 예금인출과 사재기를 불러 자오쯔양은 이 정책을 접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천윈, 보이보, 리펑, 야오이린 등도 공개적으로 자오를 비판했다.

결국 개혁파는 경제개혁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자오쯔양의 지위도 위태로워진다. 대척점에 있는 천윈과 리펑은 경제개혁을 중단하고, '치리정돈(治理整頓)'의 긴축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의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은 국민 불만과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됐다.

다시 시위가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1988년 6월부터 방송한 다큐멘터리 '하상'(河傷)은 중화문명은 우월감이 아니라 전제주의·폭압·전횡·보수·폐쇄의 상징으로 묘사하면서 중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구문명으로부터 학습하여 시장경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다큐를 지지하는 자오쯔양과 반대하는 보수파는 다시 부딪혔다. 이런 논쟁은 지식인과 학생 사이로도 확대됐고, 베이징대 등에서 이런 흐름이 생겨났다. 그런 와중인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톈안먼 등에는 그에 대한 존경과 미안함을 가진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고, 특히 대학생들이 그 불길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입장을 옹호했고, 덩샤오핑의 집에서 열린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계엄과 자오쯔양 사직 청원도 이뤄졌다. 초반기 계엄은 시민 반대 등으로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5월 20일에 열린 8대 원로(1989년 사망한 예젠잉 제외) 회의에서 자오쯔양 실각과 장쩌민 총서기 추대가 감지됐다.

상하이로 요양 온 원로들을 극진하게 대우하고, 게티즈버그 연설 에피소드가 있는 장쩌민의 부각은 자연스러웠다. 반면 톈안먼 광장에서는 단식 등 시위가 다양화됐다. 특히 5월 29일에는 '민주의 신'이라는 거대한 석고상이 만들어져 마오쩌둥과 인민혁명기념비의 사이를 차지하면서 논란도 커갔다.

6월 2일 덩샤오핑의 집에서 열린 상무위원과 원로들의 회의에서 광장 정리가 결정된다. 사상자는 주로 계엄부대가 시내로 진입하면서 무시디나 푸싱먼가 등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200명 정도가 마지막까지 인민영웅기념비를 지켰지만 이들도 물러나 여기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썼다.

200명에서 2000명까지 사망자에 대한 다양한 말이 있지만 상황은 멈췄다. 이후 89년 톈안먼 사건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나왔다. 다만 시위에 참여했던 주역들도 이 사건을 민주화 운동이라기 보다는 민중주의 운동으로 감정에 기초한 시위라는 평가들이 팽배했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견지와 장쩌민 세우기를 급속히 추진한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3세대 지도자의 핵심으로 세우고 중앙군사위 주석(1989년 11월), 국가주석(1993년 3월)을 차례로 물려준다.

장쩌민에게 권력을 물려준 후 덩샤오핑은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장 큰 것은 그가 평생을 가치로 삼아왔던 개혁개방이 더디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90년을 전후로 7년 연속 상하이에서 겨울을 보내며 주룽지와 황쥐를 통해 푸동개발을 기획하려 했지만, 중앙이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에 장쩌민의 좌경화 성향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세워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더 나서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1991년 2월부터 4월까지 상하이시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통해 개혁개방을 상기시키는 시리즈를 내보냈지만 중앙은 시큰둥했다. 1년 후인 1992년 1월 17일 전용기차로 35일간의 남순강화를 다녀왔다. 우창, 창사, 선전, 주하이, 상하이, 잉탄을 경유한 이 여정을 앞두고 덩샤오핑은 마지막 힘을 쏟아 장쩌민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는 처음부터 만나는 이에게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며 그 말이 중앙에 흘러가도록 했다. 그 여정에는 군사위 부주석 양상쿤이 대동하고 있었고,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남순강화를 보도하면서 장쩌민 역시 이상기류를 느끼기 시작했다.

중국을 거대한 싱가포르로 만들겠다는 그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면 위험을 느껴야하는 상황이었다. 장쩌민도 그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거푸 덩샤오핑의 집을 찾았고, 새로운 당의 이념에 '덩샤오핑의 이론'이라는 제목이 붙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을 말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천윈 등의 비판이 있었지만 1992년 10월 열린 14차 당대회에서는 덩샤오핑의 이론을 공식화했다.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제시하면서 덩샤오핑이 사망하는 1997년 2월까지 별 문제 없이 시간을 보냈다.

통찰력 있게 시진핑을 읽을 수 있는 기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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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톈안먼 광장 89년 6월 당시 마지막 시위대가 인민영웅기념비에 있다가 피신했다. 멀리 보이는 곳이 마오쩌둥 기념관 ⓒ 조창완


조영남 교수에 의해 정리된 중국 현대를 보면 현재 진행되는 중국 정치권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뿐만 아니라 경제나 문화의 방향도 조금씩 가늠할 수 있다. 우선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거치지 않아 정치적 위상이 불안했던 덩샤오핑에 비해 휠씬 안정적이다. 또 8대 원로처럼 막강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그룹도 상대적으로 없다. 때문에 태상황인 장쩌민을 모시고 살던 후진타오 같은 불안함도 없다.

결국 20년간 막후 권력을 행사했던 덩샤오핑(1978년~1997년)이나 태상황까지 24년간 권력을 행사한 장쩌민(1989~2012)에 버금가는 새로운 황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온전하게 시진핑의 생각만이 중국 정치를 총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단 내년 11월 예정된 19차 당대회에서 구성되는 상무위원에 어느 정도 자신의 세력을 심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세력이라고 확신할 만한 상무위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도 중국 정치이기 때문이다.

또 마오쩌둥 사후 40년 동안 진행되는 보수, 개혁 논쟁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지난 40년이 개방을 통해 진행된 발전이었다면 이미 세계적 경제강국이 된 이상 개방이 아닌 창조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 국제적 리더십을 얻지 못하고, 미국이나 일본의 협공에 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89년이 민중주의운동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했다면 다시 다가올 학생이나 시민운동은 민주화 운동으로 한층 이론화된 방향을 가질 수 있고, 거기에 시민운동이 결합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이 이전처럼 되풀이 될 경우 어떤 결과를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영남 교수의 이번 저작은 중국의 현재를 조용히 복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 한국 정치 학자가 체계적으로 중국의 현대를 일람하며, 정리한 저작을 출간한 것은 한국 정치학의 아름다운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벌어지는 중국에 대한 무방향성은 향후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국에 대한 무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가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고 싶다.

개혁과 개방 - 1976~1982년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


#덩샤오핑 #조영남 #시진핑 #자오쯔양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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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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