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포 조씨가 동지팥죽을 마다하는 이유

어린시절 물리도록 먹었던 죽... 삶은 나아졌지만, 그때의 고향은 없다

등록 2016.12.21 14:58수정 2016.12.2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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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 12월 21일 동지를 맞아 한 그릇 ⓒ 고기복


"동지인 건 아시죠? 팥죽 드실래요?"
"아, 예전에 워낙 많이 먹어서리."
"그럼, 호박죽은 어때요?"
"호박죽도... 팥죽 말고도 오그랑죽, 기장죽, 오곡 다 다 들어간 죽을 어릴 적에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오그랑죽, 기장죽은 또 뭐래요. 그나저나 어릴 적에 죽을 너무 먹어서 안 좋아하시는군요."
"네. 허허허."
"저는 어릴 때 먹던 음식이 좋던데. 동지 때 한 번 정도는 팥죽 드시면서 겨울 왔구나 하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밥이 좋아요."


식사 자리를 달리 마다한 적이 없는 조아무개씨는 연변에서 온 중국교포다. 팥죽 말고도 호박죽, 오그랑죽, 기장죽 등 이름도 생소한 죽을 거론하는 그는 재외동포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온 지 9년이 넘는다. 그동안 중국에 몇 번 왔다 갔고, 방학을 맞은 딸아이를 한 번인가 한국에 데려왔던 적도 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먼저 온 사람들 따라서 건설 현장을 따라 다녔었다. 하지만 이곳저곳으로 매번 현장을 옮기고 일이 끝나면 좋아하지도 않는 술자리가 벌어지고 서로 다투는 꼴이 보기 싫어 공장을 찾아 나섰다.

조씨는 마흔 넘도록 농사만 짓던 사람이라 공장 일이 손에 익지 않아 힘들어했었다. 그래서 서너 번 공장을 옮길 때마다 쉼터를 이용했던 인연이 벌써 십 년을 바라보고 있다. 직장을 얻고도 쉬는 날이면 꼬박꼬박 쉼터를 찾는다. 기숙사보다 쉼터에서 쉬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다고 한다. 오늘은 지지난 주 일요일부터 2주에 걸쳐 쉬지 않고 일했던 탓에 연차를 얻었다고 한다.

조씨는 한국에 온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유명 음료 제조공장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회사에서는 조씨보다 오래 일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일 년 내내 냉동 창고 안에서 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작년부터는 기계와 품질을 책임지는 역할까지 맡아서 일도 많아졌고 책임도 커졌다. 그렇다고 월급이 더 많아진 것도 없다. 그저 이것저것 간섭하는 윗사람이 없고 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신경 쓸 일 없다는 정도가 영도(반장)가 되고 나서 좋은 점이다.

겨울인데도 무슨 일이 그렇게 많냐는 질문에 조씨는 "일이 많은 것보다 사람들이 없다"고 대답했다. 지난달 중국인들이 계약 끝나고 귀국한 이후로,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부족한 일손을 채우려고 일요일에도 연거푸 일했다는 것이다.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보면, 쉬고 싶어도 일해야 하는 법이 있다는 걸 조씨는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이제는 아득히 멀어진 고향

조씨와 이야기하다 보면 달구지 끌고 논에 가서, 손에 퉤퉤 침 뱉으며 소 쟁기질하던 이야기며, 여름이면 천렵을 하고, 겨울이면 질퍽한 논에서 삽질로 미꾸라지도 잡던 이야기가 절로 나온다. ⓒ pixabay


조씨와 이야기하다 보면 달구지 끌고 논에 가서, 손에 퉤퉤 침 뱉으며 소 쟁기질하던 이야기며, 여름이면 천렵을 하고, 겨울이면 질퍽한 논에서 삽질로 미꾸라지도 잡던 이야기가 절로 나온다. 어려서는 달구지를 탔지만 나이 들어서는 경운기에 트럭까지 몰며 농사를 지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는 큰돈이 되지 않았다. 먹고 살 정도는 됐지만, 많은 이웃들이 한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집을 짓고, 도시로 나가는 걸 보며 조씨도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 오면서 그동안 농사짓던 땅을 중국 한족들에게 소작을 줬다. 같은 값이면 같은 동포에게 소작을 주고 싶었지만, 요즘 연변에서 농사짓겠다는 중국교포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중에는 북에서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에게 몰래 소작을 주기도 하지만, 공안에 걸릴 위험이 많아서 공안과 연이 닿아 있지 않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한다.

"십 년 전에 벌써 농사 때려치우고 한국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사람 중에 소작하겠다는 사람이 종종 있었어요. 저도 한 몇 해는 욕심내서 남의 땅까지 빌려 일해 봤어요. 그때 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일 시키면 잘해요. 요즘은 한족들이 더 많아요."

한국에 와서 번 돈으로 2층짜리 집도 새로 지었고, 시내에 가게를 세 주는 건물까지 마련했다. 그런데 연변에 가서 다시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다. 쉰이 넘는 나이에 다시 농사를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힘에 부칠 일도 아니다. 다만 남들 다 떠난 곳에서 다시 농사짓는 게 무슨 낙일까 싶은 거다. 조선족 학교를 나온 조씨는 중국어가 신통치 않다. 점점 늘어나는 한족들 틈바구니에서 산다는 것도 부담스럽고, 친구들이 다 떠난 땅에서 누구와 벗하며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고 한다.

조씨에게 연변은 태어난 곳이지만 어느덧 낯선 곳이 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 죽으로 연명하며 배를 곯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다시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그렇다고 옛 추억이 남아 있고 노모가 계신 땅을 나 몰라라 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내년이면 중국에 돌아가야 하는 조 씨는 요즘 영주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노모가 계시지 않다면 벌써 마음을 굳혔을 일이지만, 선뜻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다. 

조씨가 동지팥죽을 한사코 마다한 것은 이제는 입에 대기도 싫을 정도로 물리게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 탓도 있겠지만, 거처를 정해야 하는 심란함도 한몫하는지 모르겠다.
#동지팥죽 #연변 #중국동포 #방문취업 #영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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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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