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 내놔" 명령한 '국정화 전도사' 전희경 의원님께

전국 중·고교에 4년치 사회·역사 시험지 제출 요구... 무슨 의도인가?

등록 2016.12.28 14:39수정 2016.12.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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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고등학교에서 20년째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 이태영입니다. 그동안 제작된 교과서에 필자로 참여해 왔기 때문에 역사서술의 특성, 교과서 제작과정에 대해 전 의원님보다는 조금 더 깊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27일 오후 2시께 학생생활기록부 작성, 각종 시상 준비, 결석계 정리, 봉사활동 확인서 정리, 2학기 성적통지표 작성, 11월 전국연합학력평가 결과 분석 등 온갖 학년 말 업무 때문에 화장실도 못가고 정신이 없는데 평가부장으로부터 '긴급' 메시지가 날라 왔습니다.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 자료 제출 요구! 최근 4년 동안 출제했던 한국사, 법과 정치, 사회문화 정기고사 문제지를 퇴근 전까지 제출!'
(*이태영 교사가 재직 중인 학교를 관할하는 경기도교육청은 27일 전 의원이 요구하는 자료 제출을 보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서야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0월 4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유성엽 위원장에게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하고 있다.
전희경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0월 4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유성엽 위원장에게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하고 있다. 남소연

동의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의원님은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를 날카롭게 비판해 여론의 주목을 받고 그 힘으로 여의도에 입성하셨습니다.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서 면도날 같은 논리를 펼쳐 보수진영의 '잔 다르크'가 되셨습니다. 비록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탄탄한 논리만큼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100분 토론에서 정치학자 김태일 교수가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말하자 "날개보다 머리가 살아야 있어야 한다"고 받아치는 순발력을 보고 내공이 보통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가령 1946년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서술하면서 김일성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해 그런 문제를 지적한 졸저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교과서도 사람이 쓴 책인데 왜 허점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과서 검정 권한을 쥐고 있는 교육부가 집필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면 됩니다. 집필 기준을 어겨 검정에서 탈락하면 출판사는 2억 원의 개발비를 날리고 필자들은 1년 동안 헛고생을 한 셈이 되는데 말을 듣지 않을 리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쓴 교과서가 검정 탈락의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갑니다.


검정교과서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아예 판을 갈아엎어 버리고 국정교과서 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벼룩을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것입니다. 검정교과서 제도 안에서도 전 의원님이 지적하시는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검정교과서 제도도 국가의 간섭이 너무 지나칩니다.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에 대한 한국사회의 '특수한 정서'가 있는 게 현실이니 그 정도까지는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교과서 자유발행제로 가는 것은 역사의 필연입니다.

전 의원님께 국가란 무엇입니까?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이 지난 6월15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주최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제1차 학술심포지움'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 전희경 의원이 지난 6월15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주최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제1차 학술심포지움'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권우성

본질적으로 국정교과서는 개인에게 국가란 무엇인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전 의원님께 국가란 무엇입니까?

국가가 절대적 존재이던 왕조시대에는 백성을 교화와 순치의 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가령 조선시대에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백성에게 보급해 충효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던 것이 그 사례입니다. 그래야 국가가 백성을 통치하기에 수월하기 때문이지요. 살짝 위험한 얘기이지만 민족문화의 정수인 훈민정음도 그 과정에서 창제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근대국가는 개념이 다르지 않습니까? 개인의 권리를 모아서 맡겨놓은 것이 국가이며, 그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면 맡겼던 권리를 다시 회수할 수 있는 게 근대국가입니다. 그런데 그 국가가 국정교과서를 통해 개인의 정신세계를 통제하고 관리하겠다고요? 한국이 국민국가에서 시민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국정 한국사교과서는 '독수독과(毒樹毒果)'입니다.

어린 학생들은 아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아 국가가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줘야 한다고요? 그것이 더욱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린 시절 특정 권력이 심어놓은 역사관은 그 사람을 평생 지배할 위험이 있습니다. 국가가 통제하고 강요하기보다 교육전문가들을 믿고 맡기는 게 순리입니다. 한국도 시민사회가 두터워져 있어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이 있습니다.

'애국심'은 교과서에 의해 길러지는게 아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교육부

국정교과서로 인해 국격이 추락합니다. 우리가 북한과 도긴개긴이 되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조·중·동을 비롯한 일부 보수신문들까지 국정교과서에 대해 우려했겠습니까?

저는 교사이기 전에 열 살, 일곱 살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길들여진 '국민'이기보다 사고하는 '시민'으로 자라기를, 강요된 애국심으로 무장하기보다 스스로 제 나라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높으신 분들이 군대에 제대로 가고, 세금을 제대로 내고, 온갖 특권과 반칙을 버리셔야 합니다.

전국 학교에 대해 시험문제지를 제출하라는 '명령'은 거두어주십시오. 시험문제에 무슨 '독소'가 있다면 요즘 세상에 벌써 이슈가 됐을 것입니다. 민선교육감도 하지 않는 일을 일개 국회의원이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어느 철없는 보좌관의 과잉 충성일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현재 시각 오후 11시 43분. 저는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6시간 뒤 저는 용인에서 버스를 타고 성남으로 출근해 칼바람을 견디며 학생 등굣길 교통안전지도를 해야 합니다. 전 의원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대한민국 교사들은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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