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근대 문화 유적지 답사

침탈과 항쟁의 역사

등록 2017.08.01 14:15수정 2017.08.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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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1, 2학년 학생들 중 2학년 10개 반 중 2개 반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답사하러 간다 하여 함께하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오전에 도착하여 역사박물관만 30분 정도 감상하고 다른 반들이 체험하고 전주 한옥마을에 모인다 하여 급히 떠났다. 나는 학년부장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고 군산 근대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년)에 의해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한 도시이다. 군산은 조약과 동시에 개항한 부산, 인천, 원산과 달리 오직 쌀 수출을 위한 항구이다. 호남,충청의 쌀을 강제 수출을 위한 통로이자 일본인의 도시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군산 인구 중 조선인과 일본인 비율이 5 대 5정도였단다. 현재 근대 문화 역사거리가 조성 중인 내항 중심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 주거지역이었다. 중심지역으로 구분되는 지역 건물 중 약 20%정도가 일제 때 지어진 가옥이다. 그래서 일본의 가옥과 유적이 많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 채만식의 <탁류> 중에서

군산은 인구 30만 명이 사는 도시로 진포대첩의 자랑스러운 현장이며 일제강점기에는 군사적 기지로 사용된 아픔의 현장이다. 금강과만경강이 서해로 대단원을 이루며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세계 최대 최장의 방조제가 있는 새만금은 수많은 바다의 생명과 많은 어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서 탄생한 잘못된 국책사업이다.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파우스트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을 강요한 근대적 계몽의 어두운 그림자인 댐을 건설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를 결정할 때 나는 억겁의 세월에 만들어진 엄청난 규모의 갯벌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였기에 수업시간 등에서 격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군산에서 소개하고 있어서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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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박물관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공간인 해양물류역사관, 군산 사람들의 모습을 재연한 근대 생활관 등 총 5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 신민구


근대문화역사의 거리의 시작점은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다. 백년광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1920년대 근대도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공간인 해양물류역사관, 박물관의 전시물을 기증하여 만들어진 특별전시관에 있는 전국 최대의 농민항쟁이었던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 전시실, 이 전시실을 보면서 오래 전에 소설로 읽었던 암태도, 소안도 그리고 하의도 등이 겹친다.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 사람들의 모습을 재연한 근대 생활관 등 총 5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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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세관 군산세관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의 상징이다. 서울역사와 한국은행본점건물과 같은 양식으로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 신민구


박물관을 나와서 옆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의 상징인 군산세관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공사 중이라 조금 떨어져서 봐야만 했다. 1908년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건립되었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벽돌로 지어진 유럽양식의 건물로 서울역사와 한국은행본점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서양식 단층 건물로 준공 당시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건물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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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공연장 장미공연장 조선 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쌀 창고로 사용하던 근대건축물이다. ⓒ 신민구


1930년대 조선 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쌀 창고로 사용하던 근대건축물인 장미공연장은 지금은 2012년에 다목적 공연장으로 보수되어 활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용도나 기능을 확인할 수 없는 건축물인 장미갤러리는 1945년 광복 후에는 위락시설로 사용하였다. 2013년에 보수·복원하여 현재는 예술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즈상사는 일제강점기 무역회사로 사용되던 건물로 일본인이 운영하였다.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판매하던 회사로, 한때 은행건물로도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검역소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이전과 보수·복원하여 북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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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갤러리 장미갤러리 일제강점기에는 용도나 기능을 확인할 수 없는 건축물이나 현재는 예술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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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상사 일제강점기 무역회사로 사용되던 건물로 일본인이 운영하였다.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판매하던 회사로, 한 때 은행건물로도 사용되었다. ⓒ 신민구


(구)일본제18은행군산지점(-근대미술관)은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숫자 18은 은행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군산지점은 조선에서 7번째로 1907년에 설립되었으며, 2008년 보수·복원하여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여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었다.

초기에는 대부업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싼 이자로 대출을 주고 이 돈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으로 우리 농민들의 농토갈취가 많았다고 한다. 본관 뒤쪽으로 우측에는 2층 조적조의 금고와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좌측으로는 2층의 일식 목조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광복 후 대한 통운 지점 건물로 사용되었다. 은행 별관 건물인 금고동과 숙직동 건물은 각각 안중근 기념관과 근대건축자재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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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본제18은행군산지점 (-근대미술관)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숫자 18은 은행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여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었다. 초기에는 대부업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싼이자로 대출을 주고 이 돈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토지를 담보로한 고리대금업으로 우리 농민들의 농토갈취가 많았다고 한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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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선은행군산지점 (-근대건축관) (구)조선은행은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을사늑약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당시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ㄹ장악하는데 초석을 쌓아,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 신민구


(구)조선은행군산지점(-근대건축관) 1922년에 설립된 은행 건물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2층 건물로 지붕은 함석판을 이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는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소개된다.

(구)조선은행은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있으나, 을사늑약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당시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ㄹ장악하는데 초석을 쌓아,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한일 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하였다. 일제의 경제수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물로 보수·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인질로 잡혀왔던 독일인들에 의해 설계되었고 중국인에 의해 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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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잔교(뜬다리부두)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의 특성 때문에 다리의 높이가 문제가 되었는데 자동으로 조절되는 선박의 자동시설물을 제작하게 된다. 이것이 부잔교가 되었고 이후 하루 1백 50량 화차를 이용하여,엄청난 양의 호남평야의 쌀들을 일본으로 반출하게 된다. ⓒ 신민구


군산 내항은 금강하구와 중부 서해안에 자리한 지리적 특징으로 고래 때는 진성창이 자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칠읍 해창이 운영되던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해상교통로의 역할을 염두한 일본은 1899년 군산이 각국 조계지역으로 개항된 후  군산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1905년 제1차 축항공사를 시작으로 1921년까지 많은 공사를 통해 연 80만 톤에 달하는 수출입화물 하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잔교는 물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여 뜬다리부두라고도 하며 1918년~1921년, 1933년 준공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의 특성 때문에 다리의 높이가 문제가 되었는데 자동으로 조절되는 선박의 자동시설물을 제작하게 된다. 이것이 부잔교가 되었고 이후 하루 1백 50량 화차를 이용하여, 엄청난 양의 호남평야의 쌀들을 일본으로 반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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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 1380년(우왕6년) 금강 하구의 진포(군산)에 침입해 온 왜구들을 고려의 ㅇ성들의 시체가 산과들을 덮었다.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신민구


진포해양테마공원은 군산내항에 위치하여 고려시대 진포대첩의 치열한 전투현장이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진포대첩은 1380년(우왕6년) 금강 하구의 진포(군산)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벌어졌다. 고려 사람들의 시체가 산과들을 덮었으며, 약탈한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흘린 쌀이 한 자 두께가 넘게 땅에 수북이 흘렸을 만큼 그 피해가 매우 컸다고 전한다.

이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진포대전은 세계해전사에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으며, 화력기동전술과 해상 포격전의 시초를 열어놓은 역사적인 해전이었다. 주위에 전시된 육해공군의 고물장비의 전시는 반공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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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당 1945년에 이성당이란 이름으로 개업하였다. 답사지도에도 표시가 될 정도였다. 손님들이 단팥빵을 사기 위해서 줄을 길게 서 있는 모습이다. ⓒ 신민구


군산에 오면 이성당의 단팥빵이 유명하다 하여 후배샘이 부탁하여 가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기다리는 줄이 빵집 문에서부터 길에 늘어져 있었다. 1945년에 이성당이란 이름으로 개업하였다. 답사지도에도 표시가 될 정도였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이 지역사람들은 그리 이 빵집을 그리 찾지 않는다고 한다.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팥앙금빵과 야채빵이 줄을 서야 한단다. 그래서 인근 식당에서 점심하고 나서 빵집을 보니 줄이 없는 듯하여 가보니 안에 몇십 명이 서 있었다. 기다려서 두 가지 종류의 빵을 사와서 후배샘들과 함께 맛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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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사진관 한석규,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로 군산의 대표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 신민구


초원사진관은 1998년 개봉한 영화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로 군산의 대표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이 세트장을 허물었다가 다시 지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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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일본식가옥(구.히로스가옥) 당시 일본인 지주생활과 수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타짜와 장군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 신민구


신흥동일본식가옥(구.히로스가옥)은 일제강점기 포목상과 농장을 경영하며 부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히로스 게이샤브로가 지은 2층 목조주택이다. 당시 일본인 지주생활과 수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최동원 감독이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유해진 등을 출연시켜 만든 영화 <타짜> 촬영지가 이대가 아닌 군산 이 가옥에서이다. 장군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 가옥은 우리나라에 자리한 일본식 가옥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보존되어 있다. 이 가옥 내부로 들어가면 유난히 삐그덕 거리는 바닥이 귀를 거슬리게 하는 데, 자객의 침입을 확인하는 도구로 활용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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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당 일제강점기시대 건축양식을 복원하여 일본식 가옥을 체험할 수 있다. ⓒ 신민구


고우당은 일제강점기시대 건축양식을 복원하여 일본식 가옥을 체험할 수 있다. 옛 가옥을 고쳐 다듬은 일본식 건물이 모여 있다. 게스트하우스로 알려진 고우당의 핵심은 숙박공간이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겨울에는 코타츠(일본식 탁자형 난방기구)가 놓이는 일본식 공간인데, 그 이국적인 모습이 선하다.

건물 가운데 놓여 있는 정원은 정원을 둘러싼 건물과 연못, 징검다리와 나무가 어우려져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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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쟁관 군산이 전북지역 최초 3.5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민족항쟁의식이 있는 중요한 곳이다. ⓒ 신민구


고우당을 답사하고 군산항쟁관을 찾는데 유독 잘 보이지 않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잘 몰랐다. 군산항쟁관은 군산이 전북지역 최초 3.5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임을 알리는 민족항쟁의식이 있는 중요한 곳이다. 그러던 중 한 시민이 일러주어서 찾았다. 그런데 몹시 실망스러운 일은 답사객은 말할 것도 없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아 불렀더니 그제서야 나왔다. 왜 사람이 없냐고 물어보니 오전에는 학생들이 단체로 왔다고 한다. 그 말을 믿으면서도 씁쓸하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수탈하기 위한 유적지에는 여행객들이 붐비는데 이 항쟁관에는 한 명도 없다니? 이러하니 우리 남쪽이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일제의 수탈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항쟁관에 민중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다니 무엇에서 교훈을 얻고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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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 신민구


마지막으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로 발길을 돌렸다. 동국사 모체는 1909년 일본 조동종 계열 승려 우치다가 세운 금강선사라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 세워진 것은 1913년이다. 건축 당시 일본인 승려가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지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를 가지고 지은 일본식 사찰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범종각 근처, 대분에서는 곧바로 정면에 위치한 참사비와 소녀상이다. 지난 2012년 일본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 주관해 이 비석을 세웠다. 제막식이 열린 날이 9월 16일이었는데, 그날이 동국사 창건 기념일이었다.

참사비에는 그보다 20년 전인 1992년에 발표한 참사문의 일부가 적혔다. 참사문이란 참회와 사죄의 글이라는 뜻이다.

"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이름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중략)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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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뒤에 참사비가 보인다. 이 소녀상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은 대웅전 옆 요사채가 가 닿는다. 대웅전과 연결돼 있는,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로 지은 일본식 건물이다. ⓒ 신민구


참사비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강제로 동원한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소녀상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은 대웅전 옆 요사채가 가 닿는다. 대웅전과 연결돼 있는, 일본인이 일본산 자재로 지은 일본식 건물이다.

군산3.1운동기념관, 채만식문학관, 이영춘가옥, 임피역사 등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왔다.
#근대역사박물관 #군산세관 #(구)조선은행군산지점 #군산항쟁관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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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몸담으면서 교사.교육활동은 현장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도 변혁이 되어야만 참교육에 이른다고 봅니다.그래서 짧은 소견을 대중적인 전자공간을 담보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전달하고 합니다. 저서로 [자본론노트],[청소년을위한백두선생경제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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