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고객에게 열 배 청구, 마술 같은 효과 본 수의사

[서평]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살다 보면 일어나게 마련인 일들이 있지…

등록 2017.01.10 09:51수정 2017.01.1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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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요크셔 지방의 매서운 바람이 이는 날뿐 아니라 양 울음소리가 한가롭게 들리는 날도 수의사에게는 비상이 걸릴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밤이고 낮이고 24시간 호출에 응해야 한다.
책 뒷면에 '26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50여 년간 1억 부 이상 팔린 현대의 고전'이라는 소개 글에 약간의 의심을 품고 책을 펼쳤다. 저자인 제임스 헤리엇은 1916년 영국 잉글랜드의 선덜랜드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평생을 요크셔 푸른 초원의 순박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그는 50세가 된 1966년부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수의 책을 펴냈다.
 
'1억 부 이상' 팔렸다는 것은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한 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제임스 엘리엇이 쓴 모든 책을 합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백 년 넘게 꾸준히 사랑받지 않았다면 '1억 부'라는 판매부수를 자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 특유의 유머와 삶에 대한 정감어린 시선과 통찰로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출판사의 소개 글을 과장이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 그럼 제임스 엘리엇은 왜 그토록 사랑받았을까?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책 표지, 제임스 엘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아시아 출판 ⓒ 아시아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은 살다 보면 일어나게 마련인 일들을 수의사인 저자의 시선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가끔은 배꼽 잡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감당하기 힘들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마저 따뜻한 시선을 담아 담담하게 그려진다.
 
책을 읽다 보면 요크셔 지방의 매서운 바람이 이는 날뿐 아니라 양 울음소리가 한가롭게 들리는 날도 수의사에게는 비상이 걸릴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밤이고 낮이고 24시간 호출에 응해야 한다. 시골 수의사에게 흰 가운을 입고 점잔을 뺀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자신을 참 대견스러워하는 저자를 보면 그 긍정성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자연스레 미소 지을 수밖에 없다.
 
"양동이를 풀밭 위에 놓은 순간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양의 몸속에 팔을 집어넣으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 수의사가 아무리 용감한 행동을 해도 훈장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캄캄한 언덕 비탈에서 코트와 재킷을 벗고 부들부들 떨면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릴 때, 나는 마땅히 훈장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p.15



수의사라는 직업은 큰 호기심을 일으킬 수 있는 직종이 아니다. 그런데도 제임스 엘리엇의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저자는 그가 경험한 일상을 과장하려거나 미화하려 들지 않는다. 뭔가를 훈계하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익살스럽고 짓궂은 친구에게는 늘 당하기만 하는 좀 얼뜨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으로 나온다. 자신의 가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고집 세고 엉뚱한 농부들에 대해서는 인정머리 없다고 투덜댄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웃음이 나오는 건, 그래도 그가 그 삶을 사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벌렁 드러누운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내가 잠시 세상 밖으로 나가 크리스마스 기분에 탐닉하기로 마음먹은 날이다. 브라운이라는 사내가 나를 잔인하게 다시 현실로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미안해하는 말 한마디 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라든가 뭐 그런 말쯤은 해야 하지 않나? 정말이지 너무 인정머리가 없다." -p.188



막무가내 환자 의뢰인과 괴짜 동업자

제임스 엘리엇이 일상으로 만나는 농부들은 대체로 순박하다. 그러나 순박함은 신뢰를 주기도 하지만, 간혹 고집이 세다는 말과 통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저자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억척같이 살아온 노인들이 류머티즘이나 소화불량을 상담하곤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불법 의료행위이겠지만, 이 이야기는 50년 전 영국 시골에서 있었던 일임을 새겨두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수의사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건강마저 의지할 정도로 무한 신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다면 힘들지만 정직하고 멋진 직업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책에 나오는 소, 말, 양, 개와 고양이 등은 환자들이다. 그 환자들은 의뢰인들에게는 가족이요, 수의사들에게는 밥줄이다. 그래서 치료 과정을 보면 단순히 약만 처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음까지 다 쏟아 붓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의뢰인의 심기까지 살펴야 하는 게 수의사라는 직업이다. 그 직업은 참을성을 필요로 한다.
 
"선생이 왜 그렇게 동물을 잘 다루는지 알겠구려. 그건 선생이 참을성이 있기 때문이오. 선생처럼 참을성이 강한 사람은 내 평생 처음 봤소." 시그프리드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p.126.
 
제임스 엘리엇의 동업자인 시그프리드는 한때 그의 고용주였다. 둘의 관계를 보면 '갑과 을'이라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관계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몰래 챙겨주는 동지적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고용인이든 동업자든 시그프리드는 괴짜이긴 하지만 최상의 파트너다. 그는 어느 날 막무가내로 소문난 의뢰인에게 평소의 열 배를 청구한다. 무례한 의뢰인을 골탕 먹이는 장면은 큰 웃음을 선사해 준다. 알바생을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들은 시그프리드에게서 '진상 손님'을 대하는 지혜를 배웠으면 한다.
 
"그의 미소가 장난기를 띠었다. "고객이 나한테 무례하게 굴면 나는 치료비를 좀 더 많이 청구한다네. 자네처럼 흥분하는 대신,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이 사람 청구서에 10실링을 추가해야겠군. 그게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네."" -p.342.



50년 전에 쓰인 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조류독감(AI)으로 흉흉한 우리 농촌이 겪고 있는 문제를 이미 겪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저자가 페니실린 등장 이후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 치료법이 치료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항생제에 의지한 치료법이 전부가 아니라, 자연의 치유력을 평생 잊지 않았다는 저자의 고백이 울림이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으로 평생을 살았던 한 직업인의 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은 감아도 그 기괴한 얼굴과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울음소리를 기억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두려움과 당혹감에 가득 찬 눈,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이었다. 말 못하는 동물의 고통을 바라볼 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눈이다." -p.216.
 
이 책은 환자나 환자 의뢰인에게 결코 회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고단한 직업을 무한신뢰를 받는 직업으로 승화시킨 비법을 전하고 있다.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도서출판 아시아, 2016


#제임스 엘리엇 #서평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수의사 #요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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