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묘가 세비야에 '있어야 하는' 이유

[스페인에서 한 달 살이-두 번째] 콜럼버스는 21세기 세비야의 수호성인?

등록 2017.02.02 21:36수정 2017.02.0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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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랄다 탑에서 내려다본 세비야 대성당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세비야 대성당은 웬만한 광각렌즈로는 다 담을 수 없다. 사진 가운데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투우장도 언뜻 볼 수 있다. ⓒ 서부원


세비야를 다녀왔다고 했더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콜럼버스의 묘를 봤는지를 먼저 물었다. 스페인을 다녀왔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현지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조차 그랬다. 세비야의 하고많은 관광지들 중에 다들 콜럼버스를 맨 먼저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콜럼버스와 세비야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콜럼버스는 세비야 사람이 아니다. 이탈리아 서부의 작은 항구 도시인 제노아 출신으로, 요즘 국적으로 치면 스페인이 아닌 이탈리아 사람이다. 굳이 세비야와의 인연이라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어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인도를 향해 첫 항해를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뿐이다. 물론, 그도 확실치는 않지만.


미리 밝혀둔다면, 콜럼버스에 관한 한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한 게 많다. 1492년 여름, 그가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항해일지 등을 통해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으나, 그 이전의 삶은 추정이 태반이다. 이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선원 시절 다양한 항해 기술을 터득했으며, 포르투갈의 부유한 가문의 딸과 혼인했다는 정도의 내용이 전해질 뿐이다.

국적을 떠나 우뚝한 콜럼버스의 위상

과달키비르 강과 황금의 탑 과달키비르 강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첫 항해를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 원통형 건물이 신대륙의 물자들을 보관하던 황금의 탑이다. ⓒ 서부원


스페인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콜럼버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위인전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지만, 천신만고 끝에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일치된 게 별로 없다는 것. 그만큼 그의 업적 하나에 의해 나머지 대부분의 삶의 기록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마사지'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도 용어 하나를 '마사지'해야겠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구절은 근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도 '신항로를 개척'했다는 말로 대체됐다. 물론, 현지의 영어로 된 안내판에서는 여전히 'Discover the new continent'로 적혀있다. 어느 역사가는 이를 두고 '예수 탄생과 죽음을 제외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시각일 뿐이니, 굳이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마주한 원주민들을 인도인으로 착각한 나머지 인디언이라고 최초로 이름 붙였다지만, 그들이 그에 의해서 '발견당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인디언과 신대륙이라는 용어 또한 대체하는 게 타당할 듯싶지만, 적절한 대안이 없으니 그것만큼은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언어가 사고를 담는 그릇일진대, 앞으로도 꾸준한 노력이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상업혁명을 지나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선구자로서, 콜럼버스의 위상은 국적을 떠나 우뚝하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만도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전 세계에 수백 곳을 헤아린다고 하니, 그의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참고로 콜럼버스는 그의 영어식 이름이고, 언어에 따라 콜롬보, 콜론 등으로 불린다. 다만,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해 문명이 와해되고 온갖 고초를 당한 남북아메리카에 그를 기리는 이름이 더 많이 남아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다.

관광객 인솔 가이드의 안내가 각양각색인 이유

콜럼버스의 묘에서 본 대성당 내부 콜럼버스의 관을 네 명의 가톨릭 왕들이 어깨에 메고 있다. 성당 입구 구석에 자리하고 있지만, 성당의 주인이라할 만큼 앞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 서부원


콜럼버스의 묘는 세비야 대성당 안에 '들려져' 있다. 당시 스페인 땅을 할거하던 네 명의 가톨릭 왕국의 왕들이 우리네 상여마냥 그의 관을 메고 서 있다. 그러니까 묘라고 하기 보다는 관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을 성싶다. 성당 내부에 왕과 가톨릭 성인들의 시신을 안치하는 것이야 익숙한 풍경이지만, 콜럼버스의 묘에는 독특한 형식 외에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콜럼버스의 묘로 소개돼 있지만, 관 안에 콜럼버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는 것 역시 확실치 않다. 최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가 하면, 그의 유해가 세계 여러 곳에 나뉘어 안장돼 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다.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하는 가이드들의 안내가 각양각색인 이유다. 하나같이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억측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공식적으로 콜럼버스의 묘는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에 자리해 있다. 그런데도 세비야 대성당 것이 콜럼버스의 묘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의 유언과 연결된 '스토리'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의 고도 세비야의 역사적 상징성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시사철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을 세비야로 불러 모으는 데 크나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세 차례의 거듭된 항해에도 불구하고 일확천금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55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년엔 첫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환대는 사라지고 왕실의 온갖 멸시와 냉대를 감내해야 했다. 첫 항해 전 충성을 맹세하고 신대륙에 도착해 가장 먼저 왕실의 깃발을 꽂았으며, 그 땅을 왕에게 봉헌하고 왕의 이름을 붙였던 그였다.

스페인 왕실에 대한 배신감이 묻어나는 그의 유언

바르셀로나에 세워져 있는 콜럼버스 기념탑 스페인의 웬만한 도시마다 콜럼버스 관련 건축은 있다. 바르셀로나는 그가 첫 항해를 마치고 귀항한 곳으로 전하는데, 꼭대기는 전망대로 승강기를 통해 오를 수 있다. ⓒ 서부원



"죽어서도 스페인 땅은 절대 밟지 않겠다."


그의 장례식 때 왕실은커녕 단 한 명의 귀족도 조문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스페인 왕실에 대한 배신감이 그득 묻어나는 콜럼버스의 이 유언은 세월이 흐른 뒤 '글자 그대로' 세비야 대성당 안에 구현되었다. 더욱이 관을 어깨에 메고 있는 네 명의 '상여꾼'들이 스페인 왕들이라는 점은 드라마틱한 요소다. 전설에 진실을 덧입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앞의 두 사람은 길을 비키라는 듯 팔을 뻗은 채 자못 위압적인 자세이지만, 관 뒤의 두 사람은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듯 머리를 떨구고 있다. 그리 보면 네 사람 모두 '시대의 위인' 콜럼버스를 알아보지 못한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사후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과 화해하는 장면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다.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스토리' 앞에 더 이상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콜럼버스의 묘가 세비야에 있어야만 어울리는 건, 콜럼버스가 세비야의 황금시대를 열어젖힌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 대부분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고, 은을 비롯한 수많은 자원이 유입되면서 16세기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당시 신대륙의 물자가 쏟아져 들어온 창구였으니, 세비야는 당시 스페인을 넘어 유럽의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곧, 세비야는 콜럼버스에 빚진 최초의 유럽 도시다. 무려 1.5톤의 금이 사용되었다는 화려한 대성당 제대와,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 강 옆 식민지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를 보관해두었다는 황금의 탑, 그리고 당시 세계 최대의 단일 건축이었다는 세비야 대학에 이르기까지, 세비야는 명실상부 제국주의의 '수도'였다. 물론, 소개한 곳들은 세비야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필수 코스다.

21세기 세비야의 수호성인 콜럼버스

세비야의 현재를 상징하는 스페인 광장 1992년 세계 엑스포 박람회장으로 쓰였던 곳으로, 세비야와 스페인의 부흥을 상징하는 초대형 건축물이다. ⓒ 서부원


세비야 대성당의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 세비야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되는 산 이시도로 주교 형제와 산타 후스타와 루피나 자매가 그들이다. 산 이시도로 주교는 중세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기도 했다. 한편 산타 후스타와 루피나 자매는 3세기 말 신앙을 지키려다 로마인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성인으로, 현재 세비야 기차역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성당 곳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정작 그들을 찾고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콜럼버스의 묘 앞에 그들의 이름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일정이 빡빡한 단체 관광객들은 콜럼버스만 만나고 대성당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대성당과 100미터에 육박하는 히랄다 종탑의 위용도 콜럼버스라는 이름 앞에서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세비야 대성당의 진짜 주인이 콜럼버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모스크 위에 거대한 성당 건축을 덧씌울 수 없었을 테고, 황금으로 만든 제대도 가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금은보화의 무한한 공급처, 신대륙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성당 건축은 물론, 세비야의 번성 역시 애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며 세비야의 '꿈'을 상징하는 존재다.

세비야 여행의 첫 번째 코스가 대성당이라면, 대개 마지막 코스는 거대한 반원형 건물이 회랑처럼 두르고 있는 스페인 광장이다. 1992년 세비야가 세계 박람회(엑스포)를 유치하면서 만든 초대형 전시장이다. 우리에게는 배우 김태희가 어느 광고에 출연해 플라멩코 춤을 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사시사철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최고 명소가 됐다.

16세기 영화를 뒤로 하고 그저 그런 지방 도시로 전락한 세비야와, 시나브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난 스페인의 재도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콜럼버스로 인해 500년 전 번영이 시작됐듯, 이 광장에서 세비야와 '무적함대' 스페인의 부활을 이끄는 또 다른 '콜럼버스'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이다. 과거의 대성당과 미래의 스페인 광장은, 그렇듯 콜럼버스를 통해 만나고 있다.

신항로를 개척한 이탈리아의 괴짜 탐험가 콜럼버스는, 역사적으로 일면식도 없는 세비야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며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에워싼 그의 묘 앞에서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21세기 세비야의 수호성인은 콜럼버스라고.
#스페인 여행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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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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