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가 민주주의 회복?

[박근혜 퇴진 이후, 우리는 31] 진보정당운동의 역할

등록 2017.02.13 05:39수정 2017.02.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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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후,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까요? 광화문 광장의 '퇴진 캠핑촌'은 촛불 시민과 시민단체들의 대안 토론 광장을 엽니다. 이 기획은 <오마이뉴스>와 <광화문 퇴진 캠핑촌 광장토론위원회>가 공동기획했습니다. [편집자말]
글쓴이는 장흥배 노동당 정책실장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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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차 범국민행동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는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서 박근혜퇴진 이재용구속 집중집회 참석자들이 삼성본사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얻은 입헌주의 및 절차적 민주주의의 약속이 배반당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도대체 박근혜 게이트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해답은 민주 정부를 대표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민중의 삶에 일어난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이 시기에 불완전 노동이 일상이 됐고, 모든 분야에서 불평등이 심화했으며, 중산층의 몰락이 가시적 지표로 잡히기 시작했다. 요컨대 정상 궤도에 오른 절차적 민주주의와 평범한 이들의 삶의 질의 추락이 민주당 집권 10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신자유주의 국정운용 기조가 당시 민주 정부의 계급적 본질에 따른 것이냐 IMF 구제금융, 세계화 조류 등 객관적 상황이 강제한 것이냐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민주 정부 10년 동안 대중 경험과 정서의 수준에서 민중의 자기 지배 이념으로서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의 질은 무관한 말, 심지어 적대적인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보수정권의 탄생은 이러한 집단의 경험 위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과 재벌 성공 신화에 대한 숭배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압도한 상황의 반영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중의 비극적인 민주주의 경험은 박근혜 게이트라는 파국을 예비하고 있었다.

촛불 항쟁의 의미는 결국 탄핵 정국과 대선 이후 민중의 일상에서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의 변화 속에 찾을 수밖에 없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다고 하자. 차기 정권의 출범과 함께 '민주주의 회복'의 축포가 울리는 짧은 순간이 지나면 시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일자리 안정성과 노동시간, 기준임금 역할을 하는 최저임금의 수준, 의료·주거·교육·교통 등의 공공서비스 혜택, 가계부채 등이다. 민주주의는 저강도 전쟁이 되어버린 그들의 일상에 평화를 찾아줄 수 있을까?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차기 정부는 세월호 참사로 절실한 요구가 된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적절한 자원을 배분할까? 성 차별과 성 착취의 진원지인 '남성 정규직 전일제-여성 비정규직 시간제 성별 분업 구조에 변화가 찾아올까? 핵 발전 사고 위협은 감소 및 제거 절차를 밟을 수 있을까? 한반도의 전쟁 발발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까? 연중행사가 된 조류독감과 구제역 사태는 없어질까? 미세먼지는 줄어들까? GMO 식품에 제대로 된 표기가 이뤄질까? 그리하여 '회복된 민주주의'는 자살률, 산재사망률, 노인빈곤율, 청년실업률, 출산율에 세계 최악의 딱지를 떼어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자신들의 집합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자원 배분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까?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한 수구세력 내부의 갈등으로 촉발된 박근혜 게이트의 발생적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광장 민주주의에는 단지 법과 제도에 의한 지배라는 정상국가에 대한 요구를 넘어 새로운 정치사회 질서에 대한 갈망이 기저의 에너지로 응축되어 있다. 불행히도 촛불 시민들은 자신의 명확한 사회경제적 요구를 내건 단일한 '민중'으로 나아갈 정치적 리더십과 시간을 갖지 못하고 조기 대선 국면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상한 대로 촛불 항쟁의 의미는 이미 훼손당하고 있다. 문재인, 안희정, 안철수 등 자유주의 야권 대선주자들의 행보는 박근혜 정부를 떠받쳐온 한국의 보수 기득권과 미국을 향해 "나는 당신들의 이해에 크게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열띤 경쟁에 다름 아니다. 항쟁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시민들의 피와 눈물이 이들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전리품으로 전락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촛불 항쟁이 요구하는 사회개혁 과제는 결국 재벌체제와 대면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게이트 자체가 행정, 입법, 사법, 언론 등 민주주의의 핵심 영역들이 재벌들이 뿌리는 뇌물로 매수된 사태의 압축판이다. 정치권력과 관료들의 부패는 재벌 자본과의 결탁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사법의 타락과 언론의 직무유기 역시 집중된 경제력을 이용한 재벌의 사회 통제의 결과물이다.

재벌체제는 단지 총수일가가 극소수 지분으로 거대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는 전근대적 소유지배구조나,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출주도성장-부채의존소비라는 경제운용 기조,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구조화된 불안정·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와 저부담 간접세 위주 조세제도, 낮은 조세부담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낮은 복지 수준, 민영화와 규제완화 일변도 공공정책,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대한 대기업의 수탈, 임금소득과 가계소득의 하락으로 인한 내수 부족을 만회하기 위한 가계부채 확장 정책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재벌체제의 경제적 지속 가능성과 이념적 정당성의 위기가 분명해진 지금이야말로 공공성과 연대의 가치에 입각한 대안의 사회경제체제를 얘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진보정당의 구호, 정책, 정치 활동은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내용과 수위를 갖춘 재벌 정책이냐이다. 경제민주화로 표현되는 재벌에 대한 부분적인 규제는 대권에 가장 근접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도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정도로는 현재의 위기를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재벌 자본의 힘을 근원에서 제거하지 않고는 과거 김대중 정부의 재벌개혁 시도가 무력화되고 오히려 사회와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재벌체제의 완성으로 나아갔던 경험이 반복될 뿐이다.

재벌의 전근대적 경영을 세련된 전문경영인의 경영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진보정당이 대변해야 할 진보적 가치가 구현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런데 재벌체제 이후의 대안적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합의는 진보진영 안에서도 부재하다. 재벌체제의 정치적 질서인 단순다수 소선구제를 전면 또는 완전 비례대표제로 전환하는 것과 함께, 진보진영, 좁게는 진보정당 사이에서라도 재벌 정책의 기조와 개혁 방향을 좁혀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밀턴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현과 관련해 "과거에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당은 이제 진보진영 전체가 재벌 자본의 사회화를 주장해야 할 시기로 판단한다. 노동당은 경우 재벌 해체 → 금융, 조선, 자동차, 반도체, 통신, 석유화학 등 주요 재벌기업의 지분의 공공 인수 → 공공의 경영권 행사 또는 경영권 통제의 경로를 이번 대선 국면에서 핵심 정책으로 제시할 계획이다.

주요 대기업의 지배권을 재벌 총수일가로부터 공공으로 이전하는 것과 함께, 재벌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비정규 악법과 제도의 철폐, 정규직 고용 원칙, 최저임금 대폭 인상,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 등을 통해 불안정·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를 끝내는 것, 조세제도를 고부담 누진직접세 위주로 전환하고 주거, 의료, 교육, 교통 등에서 기본복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것,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 가계부채 축소 정책과 함께 생계형 가계부채를 대규모 탕감하는 것 등등.

진보정당은 박근혜 게이트 초기 머뭇거리는 야당을 분명한 퇴진 투쟁 국면으로 견인하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진보정당에게는 이제 촛불 항쟁의 의미를 급진화하고 이를 정치적 요구로 보전하고 확장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차기 정부가 광장 민주주의의 요구와 팽팽한 긴장을 형성하고 출범하느냐, 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로 출범하느냐는 촛불 항쟁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차이가 될 것이다.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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