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4년 남기고 '명퇴', 귀향을 하다

전교조 1세대 송영호, "내가 잘 살게 된 것은 누군가 희생의 대가일 수도"

등록 2017.02.23 13:46수정 2017.02.2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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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지은 흙집을 수리해서 살고 있다 ⓒ 오창균


요즘에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루세끼 밥 해먹는 것을 주제로 하거나, 연예인 신혼부부의 시골살이를 보여주는 방송이 인기가 많다. 언젠가 조용한 시골로 귀농을 할 계획이라서, 그런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방송에서는 실제로 농촌에서 터를 닦고 살아가는 원주민과 귀농인들의 현실적인 삶은 가려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난 13일. 60년전에 태어난 안성시 미양면 갈전리 집으로 귀향을 한 송영호(60)선생의 마을에 들어서자 한적하고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풍경이다. 대부분 오래된 집들이거나 원형을 살린채, 보수를 한 흔적에서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대문이 없는 집으로 들어서며 낮은 지붕과 아담한 마당을 본 순간, 귀농하면 아내가 살고 싶다던 집의 구조와 닮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웃었다.

전교조 1세대, '아니오' 와 '소통'

할아버지때 지은 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송 선생은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영어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후, 고향 인근 송탄에서 한 첫 교사생활 3년을 제외하고는 서울의 한 여고에서만 30여년을 평교사로 지내다가 정년을 4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그 이유는...

"세칭 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 '철밥통'이라는 교사 직업을 4년 반 남겨 놓고 명퇴하게 된 주요 이유는, 내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31년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고, 취업이 어려운 요즘 젊은이에게 내 자리를 양보하고, 더 나이 들기 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그는 전교조 1세대로서, 젊은 교사 시절에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탄압에 맞서 체계적으로 저항했다. 종교재단인 사립학교측과 마찰도 계속되었고, 저항의 표시로 수염과 머리를 길러 묶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교사가 지녀야 할 품위(?)를 무기로 저항했다는 것에 재치가 있고, 강골 기질이 있었다.


학교를 떠날 때까지 불합리한 일에는 항상 '아니오' 라고 손을 들어 저항하고 대화로 맞섰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명퇴를 한 후로, 아무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 교육풍토를 개탄하기도 했다. 끝없이 소통하려는 그는 학생들과의 관계도 어렵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후에도, 재학생을 비롯하여 중년의 제자들과도 만나고 페이스북으로 소통한다.

"나는 아이들 입장을 헤아려보려 노력했고, '버릇없다는 요즘 아이들'과 소통을 하면서 재미있고 보람되게 교사 생활을 했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아이들과 소통은 어렵지 않았다. 소통은 나를 내려놓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이해할 때 가능하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어려운 입장에 서 보려고 했고, 세상을 먼저 살아온 어른으로서 아이들 자존감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30여년을 교사로 지내다가 명예퇴직후 귀향했다. ⓒ 오창균



첫 농사,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집과 농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있는 형님 두 분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재산을 본인이 직접 분배하지 않고, 형제들끼리 협의해서 나누라고 했다.

형제들은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을 나눴다. 큰 형님은 소를 진료하는 수의사를 했었고, 지금은 신용협동조합의 이사장에 직선제로 선출되었다. 둘째 형님은 오랫동안 배농사를 짓고 있는데, 친환경과 관행농을 병행하고 있다. 배농사와 관련해서 일본의 자료를 찾아봤다는 송 선생이다.

"배가 맛있으려면 많이 솎아내야 한다. 내가 끝없이 형에게 말해도 농부는 못해, 아까운거야. 배나무 잎이 제한되어 있으니 탄소동화작용에는 한계가 있다. 당분이 전달되려면 배가 드물게 있어야 단맛이 생기는데, 그래도 농부는 아까워서 과감하게 못 따내는 거야."

송 선생은 형님에게 배나무 27주를 불하받아서 본인이 직접 재배해 볼 생각이다.

작년에 오래된 집을 수리하고 부인과 함께 내려와서 처음으로 600평의 농사를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으로 지었다. 경작과정에서 마을주민들의 잔소리와 병충해를 걱정하는 아내와도 마찰은 있었다. 그러나 꿋꿋하게 기다린 결과, 건강하게 자란 작물을 기대 이상으로 많이 수확했다.

수확한 작물 대부분은 인천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아들에게 일정한 가격을 받고 공급을 하며, 주말에는 식당일을 돕기도 한다. 젊은 아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될 형편으로 보이지만, 삶의 고단함과 어려움을 겪어보게 하고 동기부여를 하려는 선생의 자식교육이 아닌가 싶다. 고향에서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만으로 첫 농사를 경험한 느낌은 무엇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업으로 하셨던 농업을 경험하고, 또 농촌에서 살아갈 사람으로서 직접 농사를 지어봐야 시골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해부터 넓은 땅에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기쁨도 맛보았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도 느끼고 있다. 초보 농사꾼이 요령이 없어 힘든 때도 있지만, 그동안 교사 생활에서 느끼지 못했던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충만감을 느끼고 있다."

600평 밭에는 마늘과 양파가 자라고 있다. ⓒ 오창균


내가 잘 살게 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일수도

고향에 내려온 첫 해, 쏟아지는 햇볕과 땅을 보니 흥분이 되더라는 그는 농사에만 전념했었다. 어떤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내려온 것은 아니었지만, 편하게 쉬고 지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역량이 된다면 고향에서 할 일을 찾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늘 하고 있다.

작년의 첫 농사가 너무 힘들었다는 그는, 올해 농사는 쉬엄쉬엄 할 것이라고 한다. 20여 마리 닭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서 올 해는 알을 품는 자연란과 병아리를 육추해보려는 계획도 미뤘다. 대신에 농협과 카돌릭농민회에 가입을 하고, 시민단체나 환경단체에서도 자신의 할 일이 있을 것으로 보고 지역사회 일에 관심을 갖기로 했다. 이런 결정을 한 것에는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부정의한 것에 저항했듯이, 일년여 고향생활에서도 농촌에 쌓인 '적폐'에 대한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른척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부모를 잘 만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살았지만, 내가 잘 살게 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나머지 삶은 소외된 사회적 약자나, 건강한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부인과 직접 빚은 만두를 내 놓은 송 선생이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삶을 살아온 것은 할아버지때부터 물려받은 집안내력이다. 두 형님도 그와 '코드'가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형제간 우애가 깊다. 오랫동안 교육현장에 몸 담았다 떠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라도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본채 옆에 사랑채를 만들었다.

#귀향 #농촌 #안성 #전교조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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