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아이 돼지저금통을 깼을까

[시골에서 시읽기] 서정연 <목련의 방식>

등록 2017.03.14 10:57수정 2017.03.1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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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저금통을 깨 본 사람은 압니다. 돼지저금통을 깨면서 아주 살짝 숨통을 틀 수 있는 듯하지만, 곧 더는 깰 돼지저금통조차 없는 줄을. 비록 오늘 마지막 돼지저금통을 깨지만, 앞으로는 더 깰 돼지저금통이 없으니 어떻게든 이 바닥을 치고 일어나자고 생각합니다.

어른인 내 돼지저금통을 깨면 그나마 나은데, 내 돼지저금통이 아니라 아이들 돼지저금통을 깬다면 겨우 숨통을 트더라도 마음이 이내 갑갑합니다. 어쩌자고 아이 돼지저금통을 깼나 싶고,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싶어 아찔하기도 해요.


그런데 말예요, 아이들 돼지저금통마저 깨 본 사람은 알아요. 아이들은 다 받아들여 주어요. 아이들은 아낌없이 마지막 10원짜리 쇠돈까지 챙겨서 내밀며 어른을 걱정해 줍니다. 어른더러 얼른 기운을 차리라고 되레 북돋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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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문학의전당

아이가 잠든 틈을 타
빨간 돼지저금통 배를 가른다

쏟아져 나온 동전으로 탑을 쌓아 헤아리고 
구겨진 종이돈은 다림질하고 
먹거리도 장난감도 아이 옷도 사야 한다 

돼지저금통 배를 갈라 
아이의 꿈을 훔친다 (돼지저금통)

서정연 님 시집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은 쉽게 읽을 만한 시집이면서 쉽게 읽기 어려울 만한 시집입니다. 아이들과 살림을 짓는 어머니로서 수수하고 쉬우며 따사로운 말씨로 시를 풀어내기에 쉽게 읽을 만합니다.


그런데 빚을 빛으로 여기는 아프면서 슬프면서 고우면서 너른 마음을 읽다가 자꾸 책을 덮어야 할 만큼 읽기가 어렵습니다. 한 줄을 함부로 넘기기 어렵고, 두 줄을 섣불리 읽어치울 수 없습니다.

새벽 꿈 사이로 길을 간다. 산길을 간다. 
아무도 없는 길. 한적한 길. 
주-욱 뻑은 길. 기다란 길. 

새 한 마리, 
나를 일으키는 새 한 마리. (새)

지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 (가정)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쓴 시를 봅니다. "지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가난하고 가난하며 또 가난하고 자꾸 가난하다가 그예 끝없이 가난한 집살림이라면, 이 집안을 지키느라 얼마나 애가 닳고 숨이 타며 목이 잠길까요. 죽는 줄 알 만큼, 목숨을 걸고서 온갖 용을 짜낼 만큼, 참으로 기나긴 나날이 흐릅니다.

그런데 그 숱한 이야기를 줄줄이 풀어놓자니 오히려 아찔해요. 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짤막하게 한 마디예요. "지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

나 
가난하지만 
많이 가난하지만 

빚을 빛으로 여길 수 있는 
눈물이 있어서 
나, 풍요롭다 (눈물의 힘)

시집 <목련의 방식>은 겨울이 저무는 길목에서 태어났습니다. 잎샘바람이나 꽃샘바람이 불면서 아직 시린 겨울 끝자락에 나온 시집입니다. 마침 때도 알맞게 나왔네 싶은 시집입니다.

새봄에 새롭게 깨어날 목련 봉우리는 우리한테 어떤 말씀을 건넬 만할까요? 새봄을 맞이하더라도 아직 가난한 굴레에서 허우적거리는 살림이라면, 이 봄날에 봄꽃이 얼마나 눈에 들어올 만할까요? 새봄에 새로운 봄꽃을 바라보는 즐거운 잔치를 못 누린다면 이 봄은 얼마나 시리거나 추울까요?

새는 걸어서 하늘을 날고

아기는 걸어서 샛길로 가고

나는 걸어서 (새야)

부디 낮은 곳에 햇살이 드리우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부디 모든 정치와 정책과 행정이 낮은 곳을 헤아리는 따스한 손길이 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어머니가 아이들 손때가 묻은 돼지저금통을 깨는 일이 없도록 이 나라가 거듭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처마 끝에는 광주리가 매달려 있다. 광주리에서는 바람이 지날 때마다 소리가 났다. 마당가를 비추던 햇살이 토방까지 와 닿았다. 아이는 광주리를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광주리에는 삶은 고구마와 열무김치, 보리밥인 새참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이의 손은 광주리에 닿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풍경 소리)

우리 힘을 내요. 오늘은 아이들 돼지저금통을 깼어도, 모레에는 아이들한테 새 돼지저금통을 건네어 주고, 앞으로는 돼지저금통을 깨지 않고 살뜰히 모아서 아이들이 찬찬히 꿈을 지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일어서요.

아이들은 모두 안다고 느껴요.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돼지저금통을 깬 줄을 알고, 앞으로는 돼지저금통이 아닌 갑갑한 사회를 깰 날을 맞이할 줄을 알지 싶어요.
덧붙이는 글 <목련의 방식>(서정연 글 / 문학의전당 펴냄 / 2016.2.12. / 9000원)

목련의 방식

서정연 지음,
문학의전당, 2016


#목련의 방식 #서정연 #시읽기 #문학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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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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