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이유는 뭘까

[이란 역사문화기행 ①] 페르시아 이란과의 인연

등록 2017.03.07 11:33수정 2017.03.0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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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문학과의 첫 인연은 괴테를 통해서다

허페즈의 석관을 만지는 사람들 ⓒ 이상기


내가 페르시아 또는 이란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문학을 통해서다. 2000년 도서출판 월인에서 발행된 <문학과 진실>(오한진 편)이라는 책에 <괴테의 '서동시집'의 성립사>라는 논문을 실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괴테의 <서동시집 West-östlicher Divan>을 다루면서 페르시아의 시인 허페즈(Hafez, Hafis)와 그의 문학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때부터 페르시아 문학과 이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꼭 페르시아 이란 문명답사를 해보려고 했다. 


괴테는 <모하메드 셈세딘 허페즈의 디반 Der Divan von Mohammed Schemseddin Hafis>이라는 글에서 서양문학이 보여주는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삶의 즐거움, 종교적인 경지의 심오한 동경, 지상과 영원의 결합, 물질을 극복한 신비주의 등. 괴테가 허페즈에서 발견한 것은 자연시에 나오는 대상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그 대상과 분위기 속에 존재하는 정신이었다. 괴테는 <서동시집>을 통해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문학을 완성하려고 했다.

1819년에 발행된 괴테의 『서동시집』 ⓒ 이상기


괴테는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이다. 여기서 세계문학은 민족문학(Nationalliteratur)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괴테는 민족문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먼저 외국문학을 생각했다. 괴테가 외국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국제적인 문학교류의 가능성을 생각했고, 좀 더 확대된 영역으로 유럽문학을 생각했다. 그리고 더 나가 동양문학까지 포괄하는 세계문학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괴테의 세계문학 개념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문학이 페르시아 문학이다. 그 중 중세의 시인 허페즈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괴테는 허페즈의 시집 <디반 Divan>을 읽고 감명을 받아 동양과 서양의 시를 아우르는 <서동시집>(1819)을 낸다. 이 책을 통해 괴테는 민족문학의 차원에서 세계문학이라는 좀 더 넓은 차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허페즈 영묘를 찾은 이란의 학생들 ⓒ 이상기


괴테는 문학의 차원을 높이기 위해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 허페즈의 시를 원어로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흔적을 괴테 전집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괴테는 허페즈 시를 읽으면서 유럽문학과는 다른 차원 높은 정신성과 사상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허페즈가 종교적인 성찰에서 출발, 인간 존재에 대한 차원 높은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허페즈는 현세적인 삶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종교적인 듯 하면서도 감성적으로 삶과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향이 괴테의 취향에 맞았던 것이다. 허페즈가 즐겨 썼던 가잘(Ghazal, Ghasele)은 보통  7행 내지 14행으로 이루어진 서정시로 사랑, 삶, 종교 같은 주제를 다뤘다. 이러한 시 형식은 4행시와 3행시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유럽의 소네트 형식과 유사하다. 그런 측면에서 괴테와 허페즈 두 시인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허페즈를...

쉬라즈로 들어가는 문 꾸란 게이트 ⓒ 이상기


허페즈는 1320년 경 현재 이란의 남부 쉬라즈(Shiraz)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꾸란에 대한 지식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허페즈라는 이름도 꾸란을 잘 기억하고 암송해 보존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때문에 그는 꾸란학교의 선생으로, 수피교단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무자파르(Muzaffar) 왕조의 궁중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무자파르 왕조는 무하마드 알 무자파르에 의해 세워진 왕조로 1314년부터 1387년까지 페르시아 지역을 통치했다.

허페즈는 언어적인 면에서 감동적이면서도 우아한, 상징적이면서도 다의적인 페르시아어를 구사했다. 문학적인 면에서도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명상을 바탕으로, 기쁨과 슬픔, 정열과 용기 등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시의 구조라든지 언어 사용, 상징적인 내용 등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페르시아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고전적인 시인이다.

후대에 그려진 허페즈의 모습 ⓒ 이상기


그는 500여 편의 가잘을 썼으며, 이들 시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에 의해 <디반>이라는 시집으로 편찬되었다. 이들 가잘의 중요한 주제와 모티브는 삶의 즐거움, 사랑, 술 등이었다. 이들 시는 페르시아어에 유려함과 다양한 형식, 상징성을 부여하였으며, 이후 페르시아 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허페즈는 많은 경험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통찰한 사람이다. 그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정열, 관조와 성냄, 삶에 필요한 잠언 등을 시를 통해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페즈는 또한 감각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사랑, 이승의 것과 천국의 것, 경쾌한 것과 성스러운 것 등 대립적이고 양극적인 요소를 훌륭하게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페르시아 시문학의 지적 수준을 한 차원 높였던 것이다.

괴테는 자신의 <서동시집>속 '허페즈 책'에 나오는 시 '필명(Beiname)'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여기서 작가는 괴테 자신을 말한다.

  작가

모하메드 셈세딘, 말해 보세요,
당신네, 그 고귀한 민족이,
어째서 당신을 허페즈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허페즈

당신 물음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당신의 물음에 대답하겠소.
그것은 내가 행복한 마음으로 꾸란을 기억하면서
변함없이 그 성스러운 말씀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성스럽게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이란에 가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스파한의 이맘 마스지드 야경 ⓒ 이상기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실크로드 학교 2013년 여름답사지가 이란으로 정해진 적이 있다. 12일 일정으로 이란 페르시아 문명답사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답사신청을 했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려 가질 못했다. 그때 답사할 대표적인 도시가 테헤란, 이스파한, 야즈드, 페르세폴리스, 쉬라즈, 비샤푸르, 수사, 케르만샤였다. 수도인 테헤란과 중부 이란, 남서부 이란을 보고 오는 코스였다. 그런데 이번에 그와 비슷한 코스로 답사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2월 중하순에 11일 일정으로 이란 페르시아 문명답사를 하는 것이다. 문명답사란 인간이 만든 정신적인 유산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말한다. 그러므로 고대 페르시아 문화유산부터 중세 이슬람 문화유산, 현대 이란 문화유산까지를 아우르는 통시적 답사가 된다. 연구 목적의 답사는 통시적 연구를 기본으로 공시적 연구를 더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파사가르데에 있는 키루스 영묘 ⓒ 이상기


공시적이라고 하면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문명을 정치와 군사, 문화와 예술, 언어와 문학적으로 살펴보는 방식이다. 페르시아는 메디아제국(678-549 B.C.)의 만다네(Mandane) 공주와 캄비세스(Cambyses) 사이에서 태어난 키루스(Cyrus, Kurosh)가 기원전 550년 세운 나라다. 그는 파르스(Pars, Parseh) 지역의 파사르가데(Pasargadae)를 중심으로 왕국을 세운 다음,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박트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넓힌 왕 중의 왕, 황제였다. 그래서 그는 키루스 대제로 불린다.

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면서 유대인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하느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내용이 성경 <에즈라서>에 나온다. 그곳에 나오는 그의 이름이 고레스(Koresh)다.

키루스 실린더 ⓒ 이상기


"그 신전을 다시 세우고 거기에서 제물을 잡아 살라 바치도록 하여라. 신전은 높이도 육십 자, 너비도 육십 자로 하여라. 돌을 세 겹으로 쌓아올리고 나무를 한 겹 대는데, 그 비용은 국고에서 지불하도록 하여라. 그뿐 아니라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 신전 본관에서 바빌론으로 가져온 신전의 금은 기구들을 되돌려주어라. 모두 예루살렘 신전 본관 제자리에 가져다두도록 하여라."

그는 키루스 실린더(Cylinder)를 남겼는데, 그곳에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이 담겨 있다. 그래서 UN.은 1971년 키루스 헌장(Cyrus Charter)을 고대 인권선언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키루스 헌장은 기본적으로 바빌로니아 지역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시키려는 개혁 선언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인권존중, 종교적인 관용, 법적인 관용과 자유 등이 표현되어 있다.

키루스 궁전 ⓒ 이상기


인종, 종교, 언어로 인해 차별 받는 현 세태를 보면서 2500년 전 키루스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키루스 실린더는 고고학자 호르무즈 라쌈(Hormuzd Rassam)이 바빌로니아 고고학 유적을 발굴하다 에사길라 사원(Esagila Temple) 지역에서 발견했다. 설형문자가 새겨진 23㎝ 밖에 안 되는 작은 원통형 물건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40행의 내용이 우리에게 그렇게나 대단한 메시지를 던져준 것이다. 키루스 실린더는 현재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있다, 나는 그 복제본을 이란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다. 

키루스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파사르가데에 궁전을 지었고, 기원전 530년 박트리아 지역을 원정하다 죽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파사르가데에 남아 있다. 궁전과 무덤이 키루스 대제가 이 세상에 남긴 또 다른 흔적이다. 이곳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 남긴 문화유산을 찾아 그 시대를 파악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의 입장에서 재해석해 역사의 귀감으로 삼는다. 그것이 우리가 하는 문명답사의 목적이고 의미다.
덧붙이는 글 한국문명교류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이란 페르시아 문명답사를 다녀왔다. 2월 16일부터 26일까지 11일간이다. 답사는 북쪽 테헤란에서 시작해서 남쪽 후제스탄주로 내려간 다음 고대문화부터 현대문화까지 역사를 따라 내려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35회 정도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연재내용은 역사와 문화유산, 종교와 문학, 문화와 예술 등이 될 것이다. 그 첫 번째 기사가 ‘페르시아 이란과의 인연’이다.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괴테와 허페즈다.
#이란 #페르시아 문명답사 #괴테 #세계문학 #허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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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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