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에서 벗어나려는 당신에게

[주장] 헬조선에서 '금수저' 신분 사는 것, 과연 가능할까

등록 2017.03.18 11:10수정 2017.03.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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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 ⓒ tvN


"면천(免賤, 본래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취득하는 것)시켜 주랴?"

고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 속에서 김민세가 허준에게 던진 말이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신은 물론 자신의 부인과 아들, 딸까지 아니 그 후대의 후대까지 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절망하던 허준에게는 가히 존재론적 미끼가 아닐 수 없다. 이은성 작가는 단지 여섯 글자로 구성된 단 한 문장으로 허준의 폐부를 도려냈다.

그러나 어디 허준뿐이랴. 헬조선을 사는 이 땅의 젊은이 중에서 '이 시대의 천민'이 아닌 자가 얼마나 될까? 물론 할아버지를 잘 만난 금수저들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양반들이다. 그러나 양반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이 평민 아니면 상놈에 속할 것이다.

문제는 경제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양반에 속하는 금수저의 소득은 계속 늘어나는데, 평민에 해당하는 중산층의 두께는 계속 얇아지고, 스스로를 흙수저라고 생각하는 '사실상의 허준'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타락한 신분제 하에서는 돈으로 신분을 살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돈으로 재단되고, 그 돈이 한쪽에만 몰리는 헬조선에서 금수저의 신분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많지 않다.

현실에서 구제받기 어려운 가난

흙수저는 흙수저일 뿐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런 현대적 신분제도가 "가난의 대물림" 현상을 통해 사실상 영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은 조기 영어 교육은 꿈도 못 꾸고 유아원, 유치원 못간 상태로 초등학교 가면 그 때부터 학업을 따라갈 수 없다. 부모님은 숙제를 봐 줄 시간도 없고, 능력도 많지 않다.

설사 공부를 잘해도 신분이 쉽게 상승하는 게 아니다. 도깨비 신부인 지은탁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옥탑방 신세를 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드라마 속에 나와서 지은탁을 엄청난 저택으로 인도하는 도깨비는 전래 동화 버전의 '백마 탄 왕자님'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런 도깨비가 없다.

그래서 "면천시켜 주랴?"는 말은 오늘 이 땅에서도 만만찮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대기업 면접장에 가 보라. 그야말로 면천하려는 미생들로 북새통이다. 그것이 면천의 길인지 아닌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들은 판단을 중지한 채 오늘도 자기소개서를 쓴다. 옛말에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던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면천시켜 준다면 양잿물을 기꺼이 마실" 젊은이들은 이 땅에 많다.

가난을 탈출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계급은 또 있다. '아스팔트 할배'와 '박카스 할머니'들이 그들이다. 소득 없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사고'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 사고를 당하면 돈을 주는 금융상품도 있다. 생존보험이 그것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고이고 손해니까 돈을 준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사망보험은 애교다. 죽으면 일단 한 번의 생이 끝나는데 무슨 '보험사고'란 말인가. 오히려 문제는 '살아가야 할' 유족들이다. 그래서 사망보험은 유족들에게 돈을 준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보험은 생존보험의 교묘한 변형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존보험 없이 보험사고를 당하면 아스팔트 할배와 박카스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한번 그 길로 새면 반전은 없다.

흙수저를 면천시키는 방법, 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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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 참여사회


그렇다면, 백마 탄 왕자님도 찬란하신 도깨비님도 없다면 누가 이들을 면천시켜 줄 것인가? 니들 혼자 힘으로 더 열심히 살면 스스로 용이 될 것이라고 헛소리만 할 것인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타박할 것인가?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국가다. 복지국가다. 다만 '다 같이 평등하게 흙수저가 되자'는 축소지향적 복지국가가 아니라, '다 같이 더 잘 살아보자'는 확대지향적 복지국가다. 즉, 성장하는 복지국가가 되어야 국민들을 면천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네 것을 뺏지 않는 한 내 것이 많아질 수 없는 약육강식의 정글'을 탈피할 수 없다.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이 왔다. 경제민주화는 또 다시 이런 저런 탈바꿈을 하고 대선 후보들의 공약집에 수록될 것이다. 그 메시지는 결국 하나. 흙수저와 아스팔트 할배와 박카스 할머니와 신용불량자를 상대로 "면천시켜 주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후보는 그들의 절망과 탄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투표로 환전할 수 있는지를 선거 캠프의 전문가들에게 물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맘 아프고 배고픈 사람의 절실함을 악용하여 얄팍한 목적의 이익만을 챙기는 무리를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경제 성장에 대한 진정한 성찰 없이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무리들, 오직 도깨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홍복(洪福), 큰 행복을 도깨비 방망이도 없이 떠벌리는 무리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너희들 노력이 부족하다"는 꼰대들을 밝혀내야 한다. 오직 현실성 있는 성장론과 상식적인 평등론만이 국민들을 조금이라도 면천시켜 줄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전성인님은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입니다. 화폐금융론이나 거시경제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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