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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잘나면 남자가 기죽어"... 그 남자 나도 필요없네

[3.8 여성의 날 ⑧] '박사 과정 미혼 여성'이 바라보는 결혼과 육아

등록 2017.03.08 10:18수정 2017.03.0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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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가 논란이 됐습니다. 이 보고서는 '고스펙' 비혼 여성들이 자신보다 교육 수준이나 지위가 낮은 남성들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지적했고, 여성들의 스펙 쌓기를 방지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황당한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이번 논란에 대해 미국 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한 여성이 익명으로 기고문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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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국대학의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 연합뉴스


"아이고 축하드려요, 그런데 박사학위 받은 여자들은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데. 여자들이 박사만 받으면 페미니스트가 돼서."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에 드디어 전액 장학금 및 생활비와 함께 합격하게 됐다. 추천서, 학업계획서, 각종 영어시험, 학부 및 석사 성적, 연구실적 같은 것들을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겨우 완성하여 마침내 받게 된 값진 두 글자, '합격'

이 두 글자 뒤에 따라오는 건 주변의 열렬한 축하도 있었지만, 똑같이 열렬한 걱정도 있었다. 박사과정은 5년 이상 오래 걸리는데 그동안 남자를 어디서 만날 거냐, 결혼은 어떻게 할 거냐, 여자가 잘나면 남자들이 기가 죽어서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데 어쩔 거냐... 공부로도 성공하고 예쁜 가정을 이뤄 아이를 둘 낳고 사는 게 꿈이던 나는 몰려드는 위기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아무도 날 안 좋아해 주면 어떡하지. 노처녀로 늙어가게 되면 어떡하지. 그런데 어떡하리, 이미 합격한 걸. 내가 이 두 글자를 얻어내기 위해 바쳤던 노력과 눈물이 얼마인데.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서 해 주는 말이란 건 잘 알겠지만, 이 소중한 마음만 받았다. 걱정하는 말은 내버려 둔 채.

대학원으로 돌아오는 선배들,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내가 세 살 때부터 20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만 하면 너는 다 이룰 수 있어"라고 말해왔다. 엄마 말이 맞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비등하거나 더 높은 성적을 냈고 선생님과 교수님들께 총애를 받았다.

나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국제기구에 취업해서 국제공무원으로 세계의 가장 빈곤한 지역을 누비며 인도적 지원을 실천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자상한 남편과 예쁜 아이 둘과 함께 하는 가정도 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내가 열심히만 하면. 열심히만.

꿈은 꿈답게 산산이 깨졌다. 석사과정을 시작했을 때였다. 이름만 들으면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아는 기업에 입사해서 상도 여럿 탈 정도로 능력을 뽐내던 선배들이 모두 대학원에 있었다. 이 선배들이 대학원에 다시 온 이유는 하나 뿐이었다. 결혼 및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 이후 재취업을 위해.

선배들의 예전 직업은 언론부터 교육 및 사업까지 천차만별로 다양했지만, 그만둔 이유는 천편일률이었다. 남편이 그만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해서, 혹은 시가에서 남편 및 아이를 뒷바라지하길 바라서, 그것도 아니면 맞벌이로는 아이를 도저히 돌볼 수가 없어서. 아, 이 선배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했고 능력도 인정받았는데 모두 그만뒀구나. 사회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맘껏 발휘하다가도 남편과 아이가 생긴 이후에는 그만둬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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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로 인해 회사를 그만둔 선배들이 많았다 ⓒ pixabay


아무리 내 자신을 갈고 닦고 노력을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있는 거구나.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는데, 졸업 후 공부한 걸 잠깐 써먹고 난 뒤에는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삶을 사는 게 여자들에게 주어진 길인 걸까. "열심히 노력만 하면 너는 다 이룰 수 있어"라는 말은 얼마나 허무한지.

석사과정을 다니며 회사 두 군데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을 때도, 결혼한 후에 아이를 데리고 직장을 다니는 여선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20대든 30대든 40대든 회사에서 만난 선배들은 대다수가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여자로서 일과 가정을 함께 일굴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직업을 찾아야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내 커리어는 서른 중반 이후 끝나버리겠구나. 내가 지금 가진 능력과 학위로 할 수 있는 일들 중 지속 가능하지 않은 직업들을 하나하나 소거했다. 겨우 남았던 것이 박사과정 유학을 간 후 전문직을 얻는 것이었다.

자기 몫의 '가사 노동'을 할 의지가 있습니까?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로도 몇 명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고, 모든 남자친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 전부 하게 해 줄게"라고. 믿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말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던 세살박이 아이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친구들 중에 자기 손으로 양파를 까서 썰어 보거나, 쌀을 씻어 보거나, 육수를 내서 국을 끓여 본 경험이 있는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는데도 그랬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덕에 집안일에 손도 대 보지 않거나, 자취 경험이 있다 해도 모두 편의점과 학생식당에서 해결하면서 살아온 탓에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본 일이 라면과 계란후라이 외에는 없던 탓이었다. 이 남자친구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결혼하자고 했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두 내가 계속 공부하고 일하길 원했지만, 과연 아이가 생긴 이후에도 그럴 수 있을까? 이들 모두 입을 모아 가사노동도 나눠서 하자고 말했지만, 정말 그럴까? 남자들은 결혼 전에는 라면만 끓여 먹고 살다가 결혼 후에는 가사노동의 달인으로 마법처럼 변신하는 걸까?

이런 내 의심에 결정타를 날렸던 대화가 있었다.

"오빠,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어린이집에 맡긴다 해도 매일 아침에 맡기고 저녁에 찾아와야 하는데, 오빠가 8시에 아이 맡기고 출근한 뒤에 6시에 아이 찾아올 수 있어?"
"둘이 같이 나눠서 해야지."
"그럼 일주일에 이틀은 오빠가 그렇게 할 수 있어?"
"부모님 옆에 살자."

과연 이 남자친구가 말하는 '둘이 같이 나눠서'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자신은 할 수 없으니 나에게 모두 맡기려는 거였을까? 혹은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는 부모님께 맡기겠다는 뜻이었을까? 아내와 부모님을 희생시켜서 그 위에 쌓아 올리는 결혼생활이란 게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그리고 나는 이 시스템 안에서 내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 "둘이 같이 나눠서 해야지"라는 편한 말 안에 숨어있는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미 혼자서 내 삶을 온전히 꾸릴 수 있다. 장을 봐 와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요리해 즐겁게 먹을 수 있고, 내가 사는 공간을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으며, 홀로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월급을 재학 중인 학교로부터 받는다. 똑같이, 혼자서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꾸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고 바랐다. "둘이 같이 나눠서 해야지"라는 말 속에 숨어서 상대편에게 자신 몫의 노동을 떠맡기는 게 아니라, "둘이 같이 나눠서 해야지"라는 말을 하며 행동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나는 희생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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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xabay


최근 거세게 불어온 페미니즘의 바람을 맞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바라는 게 많거나 눈이 높은 게 아니라고. 인간답게 숨 쉬고 살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조건을 원하고 있는 거라고. 결혼이 어느 한쪽의 종속이나 희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 가방끈이 긴 여자에게 기가 죽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이런 걸 원하는 건 전혀 나쁜 게 아니라고.

나는 이미 '박사과정생'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다. 여기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까지 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 말에 따라오는 부정적인 함의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남자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워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저출산 대책으로 스펙 쌓기에 불이익을 주거나 고학력 여성의 결혼시장 하향선택을 유도하는 나라라면 더더욱 그러할 거다. 박사과정에 합격했을 때 선배가 했던 말, "아이고 축하드려요, 그런데 박사학위 받은 여자들은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데. 여자들이 박사만 받으면 페미니스트가 돼서"라는 말은 분명히 현실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한 사람'일 뿐이다. 오롯이 홀로 온전한 삶을 꾸릴 수 있고, 내가 하는 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좋은 동반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은, 운전도 영어도 글도 좋아하고 애교도 많은 그저 '한 사람'. 박사 및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부담을 느낀다는 건, 공부도 많이 해서 똑똑하고 여성 문제에도 밝은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거 아닐까. 그런 사람과 만난다면 내 인생에 희생이라는 족쇄를 씌워야만 하겠지.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나는 '한 사람'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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