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니구치 지로가 미처 끝맺지 못한 '거신 판타지'

[시골에서 만화읽기] 타니구치 지로 <지구빙해사기>

등록 2017.03.13 10:37수정 2017.03.1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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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1989, 1990년 세 해에 걸쳐 드문드문 짧게 그려서 마무리를 지은 만화책 <지구빙해사기> 상·하권은 2016년에 한국말로 나옵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이 요즈막에 선보인 만화책을 돌아보면 <지구빙해사기>는 사뭇 다른 결로 이야기를 끌어내려 한다고 느낄 만합니다. 이 만화책은 지구가 대빙하를 맞이해서 무너지고 난 뒤에 꽤 오랜 나날이 흐른 어느 날을 바탕으로 삼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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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빙해사기> 상권 겉그림. 겉그림에 거신이 나온다. ⓒ 미우

어쩌면 오백 해, 어쩌면 즈믄 해, 어쩌면 만 해쯤일는지 모릅니다. 지구에 대빙하가 찾아와서 모조리 꽁꽁 얼어붙은 먼 뒷날은 말이지요. 눈부시던 문명도 얼음 밑에 갇힌다지요.

온갖 전쟁무기도 얼음 밑에 갇힌다 하고요. 바다가 모조리 얼어붙는다면 잠수함이고 구축함이고 항공모함이고 모두 부질없어요. 꽁꽁 얼어붙는 땅뙈기에서는 석유를 뽑아내지도 못할 테니 석유로 움직이는 기계는 몽땅 멈출 테고요.

"이 데이터는 지구 전체 규모로 계속되고 있던 빙하기의 끝을 경고하고 있는 거야!" (27쪽)

"이제껏 본 적도 없는 생물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하고 있지." "푸하하하하. 재미있잖아. 이렇듯 이 대지가 새롭게 거듭나려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굉장히 행복한 거야. 넌 이 지구라는 존재에 좀더 감사해야 해." (86쪽)

만화책 <지구빙해사기>를 보면 지구문명이 스러지고 어렵사리 다시 깨어난 새 문명에서도 사람들은 술과 놀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때에도 전쟁무기는 아직 있습니다. 만화책에 흐르는 이야기입니다만 사람들은 기계에 더욱 기대어 살아가요. 아무래도 '기계로 지은 기지(집이 아닌 기지입니다)' 바깥은 너무 춥기 때문에 아예 바깥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테지요. 게다가 바깥은 꽁꽁 얼어붙었으니 제대로 된 먹을거리가 있다고 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술'을 똑같이 마십니다. 먹을거리는 없어도 술은 있어야 하나 봐요.

어리석다고 해야 할는지, 바보스럽거나 멍청하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지구에 문명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고, 사람도 다 사라지지 않은 모습을 그렸으니 한 줄기 빛이라도 있는 셈일까요. 그렇지만 온통 얼어붙은 지구에 살아남아서 '석유 아닌 다른 지하자원'을 찾아 헤매며 '집 아닌 기지'에 갇힌 몸으로 풀도 꽃도 나무도 바람도 볕도 흙도 모르는 채 산다면, 이러한 삶도 삶이라 할 만한지 아리송합니다.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다. 우리는 돌아왔다. 또다시 대지의 먼지로부터 태어났다. 난, 이미 늙어버린 노목이다. 난 길고 긴, 영원처럼 여겨질 만큼 엄청나게 긴 기억을 갖고 있다. 과연, 네 눈에는 보일까?" (122∼123쪽)

"보인 것이냐, 타케루? 잊지 마라. 네게도 그 힘이 있다는 걸." (130쪽)

<지구빙해사기> 이야기는 상권을 지나 하권에 이르면 '기나긴 대빙하기'가 끝나서 '얼음이 녹는 때'를 맞이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늘 얼음만 보고 살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녹는 땅'을 보고는 놀랍니다. 더구나 '녹는 땅'에서 아주 무시무시하도록 빠르게 퍼지는 풀과 나무를 보면서 더욱 놀라요.

"굉장히 훌륭한 도시인데?" "얼마나 오래된 걸까?""빙하 밑에 쭉 파묻혀 있었겠지."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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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 겉그림. 상하 권 겉그림에 모두 거신이 나오지만, 아쉽게도 타니구치 지로 님은 이 작품을 서둘러 끝맺고 더 손질하지 못해서 '거신 문명 판타지'를 깊이 그려내지 못했습니다. ⓒ 미우

얼어붙은 땅이 녹으면서 오랫동안 얼음 밑에 갇혔던 옛날(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나날) 문명이 고개를 내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명이 곳곳에서 살몃살몃 드러나는 빠르기보다 풀과 나무가 훨씬 빠르게 자라지요.

왜 그러한가 하면, 풀과 나무는 그동안 '사람 문명한테 짓밟히면서 괴롭던 나날'을 온몸에 아로새겼거든요. 그래서 기나긴 대빙하가 끝날 즈음 풀과 나무는 '사람한테 앙갚음'을 할 뜻입니다. 아니 앙갚음이라기보다는 '지구를 지키고 풀과 나무 스스로도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에요.

나무는 뿌리부터 우듬지까지 '사람이 저지른 핵전쟁 때문에 생겨난 방사능과 잿더미로 그동안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 세포 하나하나가 되새깁니다. 아주 기운차게 자라고 뻗는 풀과 나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모두 우걱우걱 잡아먹으려 해요.

"지금 네 의식은 움직이는 숲의 뇌 조직에 들어가 있다. 숲의 신경중추로 내려가고 있어. 넌 지금 숲의 내(內) 우주를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려 들지 말고 느껴라. 너라면 할 수 있다." (209쪽)

"그렇다. (핵전쟁으로 일어난 핵폭발) 이것이 긴 빙하기의 시작이었다. 알겠느냐? 타케루. 숲들의 분노와 고뇌를. 지금 숲들에게 있어 인류는 들불처럼 무서운 존재란다. 재생한 지구 식물이 거친 과정은 혹독했다." (214쪽)

누구 잘못일까요? 누구 탓일까요? 대빙하기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지난날(그러니까 오늘날) 핵전쟁을 일으켜 지구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구를 무너뜨린 전쟁 미치광이가 남긴 씨앗'이지요. 대빙하기가 끝나고 뻗어나는 풀과 나무는 바로 '사람이라는 씨앗'이 앞으로도 또 전쟁무기이며 핵무기이며 자꾸 만들어서 서로 다투고 싸우고 윽박지르리라 여깁니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씨앗'을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고 여겨요.

제8기 무르톡 빙기의 지구 수도 어비스 메갈로폴리스는 불에 타버렸다. 지구는 지금 간빙기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지각은 크게 변동되고 온갖 생물들이 진화하고 변모하는 새 시대에 인류의 진화도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타케루의 내면에서 깨어난 의식은 대자연과 대화하며 공생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었다. '지구 빙해사기', 그것은 신인류의 역사다. (310쪽)

타니구치 지로 님이 만화가 길을 걸어가는 첫무렵에 '미완성처럼 완성한' 작품인 <지구빙해사기>입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이 새내기 만화가이던 무렵 이 작품을 서둘러 어영부영 마무리짓지 않고 더 이야기를 끌어내 보았다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대빙하기가 끝난 뒤부터 사람들이 똑같이 어리석은 짓으로 나아가려 했는지, 대빙하기가 끝난 뒤부터 사람들이 어떤 살림을 지으려 했는지, 그리고 대빙하기라고 하는 때에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문명으로 살아남으려 했는지, 앞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지을 삶은 '문명과 살림' 사이에서 어느 길이 슬기롭거나 아름다울는지를 조금 더 차분히 천천히 그려 보았다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이밖에 이 만화책에서는 '거신'을 다뤄요. 겉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지구사람'이 아닌 '우주에서 지구로 찾아온 거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화 연작을 너무 서둘러 마치는 바람에 '여러 거신'을 다루지 못하고 딱 한 거신만 살짝 보여주고 말아요. 거신 문명이나 문화나 역사와 얽힌 수수께끼를 조금 더 깊이 다루어 봄직한데, 이 대목에서도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제 더 꺼내기 어렵습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은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서 풀뿌리하고 나무뿌리 사이에서 새로운 흙이 되어 지구별 한 조각이 되었거든요.

부디 고이 쉬시기를 바랍니다. 타니구치 지로 님이 남긴 어여쁜 만화책은 고운 씨앗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리라 생각해요. 비록 이 지구에서 수많은 나라가 전쟁무기를 손에서 못 놓고, 핵무기마저 손에서 못 놓으며, 핵발전소까지 손에서 못 놓지만, 앞으로 새로 태어나서 자랄 아이들은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서 서로 어깨동무하는 슬기로운 길로 나아가리라 생각해요. 아름다운 지구가 되고, 사랑스러운 나라가 되며, 즐거운 마을이 되기를 바라며 지은 작은 만화책은 두고두고 싱그러운 씨앗 노릇을 하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지구빙해사기, 상하 권>( 타니구치 지로 글·그림 / 미우 펴냄 / 2016.8.31. / 한 권에 14000원)

지구빙해사기 - 상

다니구치 지로 지음,
미우(대원씨아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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