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하나에 울고 웃고... 피 말리는 영상 번역 시장

어느 영상 번역가의 하루... 번역료는 낮지만 경쟁은 치열해진 국내 영상 번역 시장

등록 2017.03.21 20:33수정 2017.03.21 20:34
6
원고료주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작업실영상 번역가의 작업실 ⓒ 손지유


아침 7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가 감는다. 7시 10분, 다시 알람이 울린다. 그렇게 10분에 한 번씩 알람과 밀당을 하다가 8시 30분에야 기상.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몇 발자국 걸어가 책상 앞에 털썩 앉는다. 출근 끝.

이럴 땐 프리랜서라 좋다. 컴퓨터 앞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커피잔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마시다가 만 커피가 남아 있는 컵도 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차갑고 시큼한 것이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컵부터 씻고 나도 씻기로. 대충 씻고 새로 커피를 한 사발 내려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컴퓨터를 켜고 가장 먼저 하는 건 메일을 확인하는 것이다. 번역본에 문제가 있어서 리젝(reject)당한, 쉽게 말해 '빠꾸'당한 파일이 없나 확인한다. '휴, 없다'

만만치 않은 더빙 번역... 욕 먹을까 걱정돼요

작업 중인 작품을 연다. 근 두 달째 미국 드라마 더빙 번역을 하고 있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 소재가 다소 무거워 번역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더빙이라 신경 쓸 일이 많다. 성우들은 내가 만든 대본에 의지해 연기해야 한다. 언제 대사가 들어가는지 시간은 물론이거니와들숨이나 날숨 같은 호흡이며 '짜증 난다는 듯' '뛰어오며'처럼 감정과 상황까지 세세하게 써줘야 한다. 대사를 배우 입 모양과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우처럼 직접 대사를 읽어본다. 일어나자마자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대사를 읽는 일은 정말 곤욕스럽다. 화면 속 인물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고 있지만 내 목소리는 도레미파솔 중에, 도에서 반음도 올라가지 않는다.

"(화내며) 당신은 애한테 관심이나 있는 거야?"
"(감정 점점 격해지며) 그걸 말이라고 해? 물론이지, 함부로 말하지 마."

아무리 걸걸한 목소리에 무표정이라 해도 절대 빼먹을 수 없다. 일반 자막 번역은 오역이 나든 오타가 나든 오롯이 번역가가 책임을 짊어지지만 더빙은 번역가의 잘못으로 성우와 엔지니어, 피디까지 고생할 수 있어 더 부담스럽다.

어떤 번역가가 이상하게 번역한 탓에 성우가 대본을 집어 던지고 피디와 멱살을 잡았다더라는 번역 괴담을 떠올리며 열심히 입을 맞춰본다. 이 작품은 애정 신도 너무 많다. 남녀가 한껏 뒤엉켜있는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작은 숨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키스 종류도 여러 가지다. '쪽'에서 끝나는 뽀뽀인지 서로의 타액이 한데 섞이는 '거친 호흡'이 오고 가는 프렌치 키스인지 초집중해서 들으며 대본에 다 써넣는다. '애절한 목소리로', '야릇하게', '만족스러운 듯' 등등 써야 할 게 너무 많다.

자막 번역 일 할 때는 애정 신은 번역할 게 없어서 좋았는데, 더빙 번역은 이런 고충이 있다. 거기다가 자꾸 내가 중얼거리니까 식구들이 걱정한다.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다. 엠마라는 여자가 사라져서 찾는 장면이었는데 '엠마!' '엠마!' 라며 열심히 부르니까 갑자기 엄마가 와서 묻는다.

"왜 불러?"
"어? 아, 엄마가 아니라 엠마…"

번역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여러 생각으로 머리도 복잡하다. '더빙이니까 오역 논란은 덜 하겠지?' '번역가 크레딧이 들어가는데 괜히 욕 먹는 거 아냐?' '다음 주부터 일이 없는데 다른 업체에 연락해봐야 하나?' '이 맞춤법이 맞았던가?'

그러다 보면 점심 먹고 한창 졸릴 시간이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못 이기고 조금만 누워야지 하며 누웠다간 몇 시간이 훌쩍 지나기 일쑤. 아무리 내가 처잔들 나를 깨울 상사가 없다. 이건 뭐 프리랜서의 장점일까 단점일까? 내가 자는 동안은 돈을 못 버는 거니까 아무래도 이득은 아닌 것 같다.

그때쯤 업체에서 메일이 들어온다. 내가 감수를 본 작품에 오타가 있어서 리젝이 들어왔단다. 메일 내용을 살펴보니 '갔다 올게'가 '갖다 올게'로 돼 있다. 왜 저게 안 보였을까. 이건 반박의 여지 없이 내 실수다. 머리를 쥐어뜯어 보지만 이미 늦었다 노트북으로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번역하는 건 꿈도 못 꾼다. 20인치가 넘는 모니터, 그것도 듀얼모니터에 페이지를 200% 확대해서 봐도 이런 오타를 놓치기도 하니까. 난 죄송하다며 '다녀올게'로 고쳐서 수정본을 보낸다.

적은 번역료, 떨어지는 번역 품질... 살벌한 번역 시장

a

장비빨장시간 키보드와 마우스 사용으로 인한 손목 터널 증후군 보호를 위해 산 인체공학 디자인 키보드와 마우스 ⓒ 손지유


요즘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기대도 높고 고객들이 번역 품질에 불만이 생기면 쉽게 항의할 수 있다. 그래서 업체에서 번역 품질에 더욱 신경 쓰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오역, 호칭, 존대 실수는 말할 것도 없고 오타나 맞춤법 실수가 단 하나라도 있으면 단순히 피드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다음 발주에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막번역은 항상 논란이 많다. 책과는 달리 영상 작품은 원어와 비교가 쉬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한국 번역시장 자체가 매우 열악한 것도 한 이유다. 나도 이제 겨우 초보라는 타이틀을 떼고 예전보다는 번역료를 더 받지만 아직도 정말 말도 안 되는 단가로 일하는 번역가가 허다하다. 번역료가 적으니 많은 물량을 단기간에 소화하려면 당연히 번역 품질은 떨어진다. 거기에다 예전에는 작품을 주로 케이블에서 방영해서 드라마라도 일주일에 두세 편을 납품하면 되니까 한 시즌을 작가 한 명이 번역했지만 요즘에는 인터넷 기반 영상 제공 서비스가 많아지면서 드라마 한시즌을 한꺼번에 푼다.

그러니 공동 번역하는 일이 많다. 마치 한 권짜리 책을 챕터 별로 찢어서 여러 명이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감수자가 보고 수정한다 한들 용어며 말투며 통일성을 갖추기가 어렵다. 그렇게 번역가들은 전체적인 내용 파악도 못 하고 작업하는 일도 다반사다. 작품에 대한 애착도 덜 간다. 당연히 품질이 또 떨어질 수밖에. 결국 빡빡한 마감 시간에 쫓기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도 있는 대로 얻어먹는다.

일반 자막은 구리다는 편견을 깨기가 영 쉽지 않다. 심지어 친동생마저지 언니가 번역으로 먹고사는 사람인데도 '인터넷 자막'을 선호하니 말 다했다. 나도 인터넷 자막을 몇 번 봤지만 오역에 기본 형식을 지키지도 않은 이 자막을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무보수로 한다는 열정을 높이 사는 것인지 맞춤법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서인지.

더 기운 빠지는건 이런 인터넷 자막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동생이 웃거나 울거나 하며 재미있게 감상한다는 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영상 번역가의 순기능에 대해 회의감까지 들기도 한다. 일단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열악한 한국 번역 시장이든, 번역가의 순기능이든 다 잊어버리지만.

오늘도 자정까지 번역본을 보내기로 했는데 시계를 보니 11시 40분, 부랴부랴 마무리해서 마감하고 나니 새벽 1시다. 다음에 번역할 에피소드 영상을 틀고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들어가 누워서 영상을 보다가 잠이 든다. 퇴근......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AD

AD

인기기사

  1. 1 추미애-윤석열 충돌? 검사장급 여섯 자리가 뭐기에
  2. 2 수능 정시 늘었으니 자퇴하겠습니다
  3. 3 아버지 '어두운 과거' 폭로하는 노소영 소송의 역설
  4. 4 "미쳤어, 미쳤어"... 손흥민, 그가 눈앞으로 달려왔다
  5. 5 정경심 재판부 "검사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 안 하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