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오월, 더러운 잠... 예술의 자유는 점점 나아질까

[서평]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을 읽고

등록 2017.04.01 14:30수정 2017.04.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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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그렸던 렘브란트는 검은색으로도 빛을 그려낼 수 있는 화가였다. 빛의 대가답게 그는 빛에 감정을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종교성 짙은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무릎을 꿇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로 시작하는 돈 맥클린의 부드럽고 애잔한 '빈센트'를 들으며 파랑색과 회색 범벅인 팔레트를 들고 있는 인상파 화가 '고흐'를 떠올린다. 강한 붓질로 캔버스에 덕지덕지 바른 노란색으로 산들바람을 일으키고 마음까지 흔들어 놓는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네덜란드 화가다. 둘을 어떤 이유로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게 미술의 힘'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싶다. 그들이 그린 작품이 좋아서 마냥 책을 사고, 노래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들은 가슴을 저미게도 했고, 아련한 추억 속으로 달리게도 했다.

'인문학의 꽃'이라 불리는 미술사, 서양 미술사를 읽으면서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를 기대했다.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들이니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워낙 다채로운 사조와 많은 예술가들을 다룬 탓인지 '휙' 하는 소리가 나듯 지나가 버렸다. 건성으로 읽으면 언급됐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짧은 분량이었다. 하지만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까 실망하긴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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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식의 서양 미술사 산책> 이연식 지음, 은행나무 출판 ⓒ 은행나무

<이연식의 서양 미술사 산책>은 평소 미술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미술사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명료하고 입체적으로 미술사를 안내하고 있다. 저자 이연식은 미술과 관련된 저술, 번역, 강의를 하는 미술사가다.

그는 흔한 미술사 입문서들이 기술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선사 시대부터 이집트,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거쳐 르네상스와 인상주의, 현대미술까지 순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친숙한 르네상스에서 시작하여 다시 르네상스로 끝나는 미술사를 통해 사회와 문화의 맥락을 살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파격이라 하면 과장일지 모르지만, 일종의 고정관념 파괴다. 예술가는 파괴적 창조를 하는 사람이라 했다. 저자는 그런 범주에 드는 사람이다.

저자는 유명하다는 예술가들이 무엇 때문에 유명했는지를 따지며,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유동적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질문을 통해 과거가 고정되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는다.


미술사에서 예전에 별 볼 일 없던 작가가 재조명되고, 당대에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례들은 흔하다. 그런 예들은 창작에 매진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에겐 위로가 되고, 인기 작가에겐 겸손함을 요구한다.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도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그렇다.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예술계는 라파엘로를 가장 뛰어난 예술가로 여겼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로와 비슷한 수준으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15p.

오늘날 예술가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창조적 파괴'라는 말이 나오고, '표절'이 그토록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요구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찬란한 빛의 시대라고 말하는 '르네상스'는 '재생'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한다.

이 말은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새로움을 추구하기보다 모방하고, 표절했다는 말인 셈이다. 오늘날 문예부흥기라고 알고 있는 르네상스가 그리스 로마를 모범으로 '완벽함'을 강박에 가깝게 추구했다는 사실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르네상스의 문인과 예술인들은 자신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모범으로 삼아 되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대와 자신들의 시대 사이에 놓은 중세를 폄하했습니다. 하지만 중세는 고대 세계와 르네상스를 잇는 가교입니다. 중세의 경제적·문화적 발전 없이 르네상스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17p.

미술사를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예술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을 살필 수밖에 없다. 국가 혹은 자본이 선의로 시작했던 지원활동이 예술을 통제하는 방편이 되는 일은 역사 속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예술가들의 모임, 예술 고등교육기관을 가리키는 아카데미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그 위상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국가가 예술의 이념과 형식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죠. 이걸 본떠서 나중에 영국에서도 1768년에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습니다. 프랑스 아카데미는 뒤에 예술에 대한 심의기관과 교육기관으로 분리되었는데, 교육기관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국립 미술학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가 지망생들은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국가가 제시한 기준을 따라야만 입학하고 졸업하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99p.

대한민국은 어떤가? 영혼마저 자유로워야 할 예술이 정해진 기준과 원칙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게 현실이라는 것을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증명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 현실에서 예술은 창의성과 개성, 진취성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과 증오의 표적이 되기 쉽다.

국가가 예술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 강화될수록 시대는 암울하다. 자신들의 잣대로 예술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술은 정권의 시녀밖에 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인간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개성을 위해 투쟁한다. 낭만주의를 거쳐 사실주의에 이르면서 투쟁은 원하던 바를 쟁취한 듯 했다. 그러나 여전히 위태롭다.

"예술은 시장의 손에, 새로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시민계급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과거에는 교회, 귀족, 군주를 섬겼던 예술가는 이제는 부르주아 시민 계급을 섬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133p.

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갈구하고 비판하는 것은 예술가의 유전자다. 그런 예술가를 당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오늘날의 시각을 통해 끝없이 재발견된다"고 말하는 저자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농민을 그린 그림 등의 예를 통해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비록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후대는 알아줄 수 있다는 희망과 저항정신은 예술을 오롯이 예술답게 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박근혜 탄핵 이후 벌써 회자되고 있는 '세월오월' 같은 예술작품들이 있지 않은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가 농민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오늘날 인기를 누리며 이 나라 저 나라로 불려 다니지만, 밀레가 그 그림을 내놓을 당시에는 불온한 그림이라고 비난을 좀 받았습니다. 밀레의 <이삭줍기>는 수확이 끝난 밭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의 고달픈 처지를 그린 그림입니다." -143p.

예술과 외설, 그 애매한 이야기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예술계에서 해묵은 논쟁이다. 같은 작품을 두고 누구는 예술이라 하고, 누구는 외설이라 한다. 마광수를 보는 시선이 그랬고, 국회 전시로 논란이 됐던 '더러운 잠'이 그랬다. 그런 논란은 대한민국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더러운 잠'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그런데 마네 역시 16세기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계승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티치아노의 작품은 당대에 호평을 받은데 비해, 마네의 작품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더러운 잠'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마네는 이 그림에서 당시 사회에서 성이 매매되는 형식을 암시했습니다. 여성이 목에 단 리본 하며, 발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실내화, 게다가 흑인 하녀가 가져온 꽃다발은 오늘밤을 예약한 손님이 보내 온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마네 나름으로는 16세기의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계승하여 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지만 그림에 대한 대접은 전혀 달랐죠. " -149

저자는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에서 '시대가 흐르면 자유로워지겠지, 예술은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 되겠지' 하는 생각, '역사는 진보한다'는 관념을 깬다. 그를 위해 16세기초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 1508~1509년작>와 19세기 후반,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년작>을 예를 든다.

"16세기에는 그림 속에서 야외에서 옷 입은 남자와 옷 벗은 여자가 뒤섞여 있어도 괜찮은데, 19세기에는 이런 그림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 것. 이것은 '예술에 있어서 외설 논란'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음을 말해 준다. 오히려 작품을 보는 대상이 문제임을 지적한다. 한 마디로 작품을 즐기는 이의 수준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전원의 합주>는 행세 좀 하는 분들이 자기들끼리 보는 그림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림 속에 갑자기 알몸이 등장한대도 그게 신화와 전설 등에 근거를 둔 것임을 관례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펄펄 뛰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죠. 한데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시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마네는 신화와 전설 등에 근거한 옛 그림의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적인 인물을 그리려고 했는데, 이게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더욱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신화나 전설 속의 여인이라면 상관없지만 당대의 파리지엔이 알몸으로 등장하다니 외설적이라고 여겼던 것이죠." -147p.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에는 수많은 작가가 등장한다. 그 많은 이름 중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낯선 이름도 있다. 너무 많은 작가를 다루다 보니, 어떤 예술가가 감내한 시간의 길이와 폭을 보여주기가 어렵다며 아쉬워하는 저자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도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와 그 의미를 알 수 있어 유익하다. 더불어 예술가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는 말은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된다.

"이미지를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이해하지 못했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백남준 본인도 애초에는 이런 이미지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는 그야말로 무질서한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의 한계를 실험한 것입니다." -236p.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은 뭔가를 새롭게 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을 알려준다. 과거를 평가하고, 오늘의 평가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열어두는 자세는 예술가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소비자에게도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은 관점을 다르게 하는 기회를 준다.

이연식의 서양 미술사 산책

이연식 지음,
은행나무, 2017


#미술사 #더러운 잠 #르네상스 #이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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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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