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골 할머니의 삶, 보리수꽃처럼 피어나길

[포토에세이] 물골 할머니의 거친 손에서 길을 보다

등록 2017.05.03 15:08수정 2017.05.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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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물골 할머니의 뜰에는 보리수이 꽃이 한창 피어났다. 화사할 것도 없는 보리수꽃, 가을이면 요즘 아이들에게는 별 것도 아니지만 어린 시절 귀했던 붉은 열매가 다닥다닥 열릴 터이다. ⓒ 김민수


5월이 되니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다.


산소에 가서 풀이라도 뽑아드리고 오는 것이 좋겠다 싶어 집을 나섰다. 부모님의 사랑이야 내리 사랑이지만, 자식들의 사랑은 늘 후회하는 사랑이 아닌가 싶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해서는 더는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애틋하고, 아직 살아계신 아버님에 대해서는 소원하니 말이다.

나는 안다.

아버님도 돌아가신다면, 요즘처럼 일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뵙는 날을 미루고 있었음을 후회할 것이라는 것을. 그 후회할 짓을 하면서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물골, 그리고 그곳에 홀로 살고 계시는 물골 할머니.

간혹 <오마이뉴스>의 기사 소재가 되다보니 방송국에서 취재하자는 제의가 종종 들어온다. 할머니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귀찮으실 것 같아서 거절했지만, 지난해 겨울에는 어느 방송국에서 용케도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취재했다. 그 외에도 몇 번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으시니, 산골에 살지만 나름 '유명인'이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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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 할머니 한 해가 다르게 몸이 쇠해진다는 할머니, 몸만 아프지 않아도 혼자 사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 김민수


어머니 산소에 들러 이런저런 정리를 하고 물골 할머니와 부엌에 마주 앉았다.

할머니는 지난 겨울 방송국에서 촬영한 것을 보았는데, 드론을 날려서 아들 내외가 손주들과 함께 저 산 머너 돌아가는 모습까지 나온 것이 신기하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안부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 할머니는 큰 아들 이야기를 꺼내셨다.

"얘가 바쁘기도 하지만, 지난주에는 머리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하더라고요.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워낙에 바빠서..."

부모님의 심정이란 그렇겠지만, 자신은 어찌되었든 자식 이야기가 나오니 눈물부터 그렁그렁 맺히시는가보다.

거칠고도 거룩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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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 할머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문밖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신다. 아무래도 눈물을 감추시고 싶은가 보다. ⓒ 김민수


열린 부엌문 사이로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맺힌 눈물이 다 마를 때까지 말씀만 하신다.

할머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디마디 굽었고, 굳은 살에 손톱도 결이 많고 납작하다.

일에 단련된 손, 저 손은 할머니의 살아온 내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거룩한 손이요, 아름다운 손이다.

"이젠 농사일도 못하겠어요. 혼자서는 힘이 부쳐서 못하고, 아들이 와서 밭을 갈아줘도 이젠 내가 먹을 만큼만 하지 못하겠어요. 아프지나 말아야 하는데, 네 몸 건사할 정도만 되면 감사한데...."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할머니, 자신이 먹을 것만 하겠다고 하지만, 벌써 마당에는 산에 올라가 꺾어온 고사리가 마르고 있다. 그 많은 고사리를 혼자서 다 드실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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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 할머니 손가락 마디마디 휘었고, 손톱도 성하지가 않다. 평생 흙을 일구며 살아온 여력이 할머니의 손에 새겨져 있으니, 그 거룩한 손은 곧 길이다. ⓒ 김민수


저 할머니의 손은 흔한 손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보았던 손이다.

어머니의 손도 저 할머니의 손과 비슷했고, 며칠전 방송에 나왔던 거제 공곶이에서 수선화를 평생 가꿔온 할아버지의 손마디도 그랬으며, 오래전 돌아가신 미장이로 일했던 형님의 손도 저랬다.

그런 손들이 있어 지금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저런 거친 손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는가? 오히려 경멸하고, 더 착취하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은 아닌가?

할머니의 손에서 나는 길을 본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던 예수의 일침을 듣는다. 바로 저 할머니의 손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예수는 저기에 계시지 않고, 바로 여기 할머니의 손에 임한 것이니,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평생 흙을 만지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곧 예수다. 예수를 만나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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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 할머니 뜰에 나와 화단의 잡초를 뽑아 내시는 할머니, 눈에 보이면 그냥 맨손으로 일하게 된다. ⓒ 김민수


5월의 첫날, 여름이 온듯 더웠지만 아직 물골은 조석으로 쌀쌀하다고 하셨다. 그 쌀쌀함은 생각보다 심하다고 하셨고, 4월 중순에도 서리꽃이 필 정도로 추운 날도 있었다고 하셨다.

"아마, 그때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피어난 봄꽃에 서리가 내렸는데 얼마나 예쁜지. 내가 사진으로 담는 재주만 있었다면 그거 담았을 건데. 그때 생각나데요."

고마웠다.

물골 할머니도 어떤 때도 내 생각도 하시는구나 싶어 고마웠다. 잠시 밖으로 나와 무성하게 피어난 보리수 꽃과 씨름을 하자 할머니는 화단에서 잡초들을 뽑아 내신다.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냥 눈에 보이면 바로 손이 간다. 그래서 시골에 살면 손이 거칠어진다.

나도 몇시간 어머니 산소에 들러서 풀을 뽑고, 갓 올라온 나물도 하고, 흙을 좀 만졌더니만 하룻사이에 손가락이 거칠거칠하다. 그 느낌,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 겨우 손다운 손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반가운 만남 등지고 외로운 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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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보리를 찾아온 손님, 외로운 물골 할머니를 찾아오는 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 김민수


보리수꽃에 제비나비가 찾아왔다.

그 작은 꽃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정겹고, 그가 찾아옴으로 인해 그 작은 보리수꽃도 꽃임을 증명해 주니 참으로 반가운 손님이다.

물골 할머니에게 여느 때처럼 용돈을 조금 쥐어드리고 돌아온다.

늘, 물골을 등지고 서울을 향할 때면 또다시 외로워진다. 나는 또 왜 그 지독하게 외로운 서울로 가는 것일까? 자연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호흡하는 시간 '무아의 경지'에 빠져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을 다 잊고 행복해하면서도 나는 또 왜 자연을 등지고 서울로 가는 것일까?

무성한 보리수꽃, 이제 바람에 수많은 꽃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면 그토록 많이 떨어진 꽃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붉은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있을 것이다. 그 추억의 맛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따먹기에는 너무도 많은 열매가 익을 것이다. 물골 할머니의 삶, 보리수꽃처럼 피어나길 원하는 이유다.
#물골 #보리수 #거친손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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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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