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투표용지 분류기가 지켜 본 촛불 혁명의 현장

[일상 비틀기] 대선일 참관했던 개표소 분위기

등록 2017.05.15 11:46수정 2017.05.1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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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대한민국! 우선,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할 당신들의 미래에 축하를 보낼게. 축하해! 계절을 세 번 바꿔 맞이하는 동안, 당신들이 어디서 무엇을 해 왔는지는 내 친구 '레노'를 통해 전해 들었어. 진심으로 축하해! 아, 내 소개를 안 했나? 나는 장성 1017호, 당신들의 이름으로는 '투표지 분류기'야.


이번 대선엔 포항시 남구로 출장 와서 당신들의 대선 투표용지를 나름 최선을 다해서 분류했어. 가능하면 개표의 소감을 일찍 올리고 싶었는데, 개표를 마치자마자 쓰러져서 잠들었는데 48시간이 지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선출된 새 대통령은 영화를 찍고 계시더라. 왠지 내가 뽑은 것만 같아서, 뿌듯한 거 알까?

장성 1017호의 근무지 투표지 분류기는 모두 여덟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투표함을 열어서 정리된 투표지를 1차적으로 분류하고 개수하는 작업을 맡고 있어요. ⓒ 이창희


말했지? 나는 장성군 선거 관리 위원회에서 포항으로 파견 나왔어. 옆의 다른 친구들은 경주에서도 온 것 같은데, 사실 제대로 통성명을 하지는 않았어. 아, 이번 포항시 남구 개표소엔 나와 같은 분류기가 모두 여덟 대가 설치되었더라고. 개표소에서 수용해야 하는 표의 숫자를 고려해서 배정되었어. 개표소마다 분류해야 하는 표의 수는 모두 다르잖아.

투표지 분류기와 제어용 노트북 투표지 분류기에는 노트북이 연결되어 설치되어 있습니다. 투표지 분류기 내부에는 1차 분류 및 개수된 결과를 출력하는 프린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종 저장된 데이터는 USB에 저장되어 선관위로 옮겨집니다. ⓒ 이창희


나를 움직이게 하는 제어 프로그램은 옆에 달린 레노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 아이도 나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인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네트워크 카드는 빠졌는지, 무선이든 유선이든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쁜 프로그램을 설치해 놓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사람들이 계속 감시하고 있더라고.

그래도, 나랑은 얘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세상 소식은 얘를 통해서 밖에는 들을 수 없으니깐. 지난번에는 <더 플랜>이라는 영화를 같이 봤는데,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레노는 이게 다 자기 때문이라면서 엉엉 울었어. 그래서, 이번 선거에선 제대로 해보자고 두 손 꼭 잡고 다짐을 했단다.

선관위 직원이 프로그램을 설치 중 레노보 컴퓨터 옆에 꽂힌 보안 카드가 없이는, 컴퓨터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날도, 저 관리자분이 모든 컴퓨터를 돌아다니면서 작업을 수행하고 계셨어요. ⓒ 이창희


먼저, 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설치되는지 설명할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나에게 일을 시키고 제어하는 것은 모두 옆에 붙어있는 레노가 맡았어. 레노는 네트워크 카드가 빠져있는 데다가 무선으로도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선관위 보안담당 직원의 보안 카드가 있어야만 분류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어.


이번 대선에선 나와 같은 분류기 여덟 대를 한 명의 선관위 보안담당 누나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실내 체육관을 계속 뛰어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안쓰럽더라. 새벽이 되니깐, 누나는 거의 쓰러져 있더라고.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많이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내가 어떻게 표를 분류하는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볼게.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일은 당신들이 '투표용지'라고 부르는 일정 크기의 종이가 투입되면, 우선 종이를 재빨리 스캔해서 이미지를 저장해. 저장된 이미지에서 투표용 도장이 찍힌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쓰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해. 그저 종이에 도장이 찍힌 위치를 파악하고, 그 도장이 찍힌 곳에 맞는 분류용 슬롯으로 보내면 내 일은 모두 끝나.

투표지 분류기 투표지 분류기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맨 앞에서 투표지가 이송되면 헤더부에서 투표지를 재빨리 스캔합니다. 스캔된 이미지를 통해 표를 분류하고, 옆의 분류용 슬롯으로 보내게 됩니다. ⓒ 이창희


맞다. 한 분류용 슬롯에 종이가 너무 많이 몰리면 곤란하니까, 50장 단위로 빨간색 알람을 표시해 줘. 그러면 분류 작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표를 꺼내서 고무줄로 묶어 놓으면 정말 끝이야.

참! 내가 일차적으로 분류해서 수를 센 결과를 표로 정리해서 출력하는 작업도 하는구나. 내 모든 업무가 끝나면, 내가 분류하기 위해 저장해 놓은 표의 스캔 데이터, 1차로 분류된 표의 숫자 등의 기록은 모두 USB에 옮겨져서 중앙 선거 관리위원회에 저장되어 보관하게 돼. 새벽에 선관위 누나가 데이터를 옮길 USB를 개봉해서 나한테 꽂는 순간, '아, 내 일이 모두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니까. 휴우~

이번 선거처럼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만 분류해야 하는 날은 그래도 일이 훨씬 수월해. 왜냐하면, 표의 종류가 한 가지밖에 없으니까, 실수할 일도 거의 없거든. 그런데, 작년 총선은 정말 최악이었어.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엔, 해당 지역구의 국회의원을 뽑아야 하고, 비례대표 선출을 위해 정당 투표도 해야 하잖아. 작년 4월의 총선에선 나는 포항시 북구에 출장 나왔었는데, 북구의 국회의원 후보는 4명이었는데 정당 투표는 모두 21개의 정당에 대해 분류해야 했어. 정말 힘든 일이었다고.

2016년 4월 총선 때의 정당투표 분류 중 지난 총선이었습니다. 정당 투표 용지가 33.5센티미터나 되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한 기계로 지역구 의원표랑 정당 투표용지를 같이 분류하는 것은 안 했으면 좋겠어. ⓒ 이창희


나 혼자서 10cm 정도밖에 안 되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표를 분류하고 나서, 역대 최장이라는 33.5cm의 기다란 정당 투표용지를 같이 분류해야 했다니, 믿어져? 그날, 지역구 국회의원 개표는 12시도 되기 전에 끝났는데, 비례대표 용지 때문에 새벽 동이 트고 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니까. 앞으론, 제발 나 혼자서 저렇게 길이가 다른 표를 분류시키지 말아줘. 부탁이야.

나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표를 분류해서 심사·집계부로 보내는 것이 내 임무야. 정상적으로 판별이 가능한 표에 대해서는 각 후보자들의 표로 분류가 되지만, 조금이라도 판단이 어려운 표는 '미분류'로 분류되어서 전달해. 이 '미분류' 표들은 심사·집계부의 개표 사무원들이 직접 분류하더라.

심사·집계부에서 최종적으로 개봉한 투표함에서 나온 표에 대해 최종적으로 숫자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표를 세는 개수 작업을 기계에 맡기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 개표 사무원이 직접 진행하게 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피곤해지면 너무 힘든 일이겠지?

그래서, 요즘엔 투표소에서 바로 개표하는 방식도 논의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어쨌든 사람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고, 기계에 의한 오류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일 테니까, 하나의 개표소에서 담당해야 하는 표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방법이지 않을까 싶더라고.

많은 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중 개표 작업 중인데, 어느때보다 많은 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계시네요. 이렇게 지켜보고 있다면, 분명 우리의 표는 제대로 지켜질 수 있겠죠? ⓒ 이창희


한 가지 좋은 소식을 알려줄까? 이번에 개표하면서 관찰했더니, 제19대 대선은 확실히 지난 총선이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지난 총선에는 개표하는 동안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감시의 눈길을 보내던 참관인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번엔 개표하는 내내 참관인 조끼를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정말 많더라고.

다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만큼 우리를 '뚫어져라' 지켜보는데, 옆 6번 테이블에 출장 왔던 0232호는 도중에 폐업했잖아. 아무래도, 다들 너무 뚫어져라 지켜보는 게 부끄러웠던지, 긴장해서는 미분류 표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개표 참관인들이 의문을 제기했고, 0232호로는 분류작업을 하지 않기로 했어. 그 후로는 모두 일곱 대의 분류기로 작업이 진행되었단다.

이번 대선에서 참관인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아무래도 털보 아저씨가 <더 플랜>에서 우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들이 오랫동안 해 왔던 '촛불 혁명'의 염원이 결실을 보는 중요한 선거였기 때문이었을 거야. 각 작업대마다 두세 명의 참관인들이 계속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데, 정말 땀이 날 정도였다니까.

그래도, 덕분에 피곤함도 이긴 채, 더 열심히 개표 작업에 매달릴 수 있었어. 앞으로도, 당신들의 소중한 한 표를 지키려면, 하룻밤 정도는, 힘이 들겠지만, 뜬눈으로 지켜볼 마음을 먹어야 할 거야. 그게 지난 일 년 동안 당신들이 나한테 가르쳐준 '민주주의'의 모습이잖아. 앞으로도, 파이팅!

아, 내가 할 일은 이제 다 끝이 났어. 새벽까지 사전 투표함 한 곳에서 표가 하나 넘치는 바람에 같은 표를 몇 번이나 다시 분류했는지,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어 투표지가 발행된 것보다 한 장이 더 나와서, 두 시간 가까이 개표에 참여했던 개표 사무원들이랑 선관위 관계자들이 계속 보물찾기를 할 때처럼 눈에 불을 켜고 무효표를 찾았는데, 결국 못 찾았어.

아무래도, 사전 투표의 경우엔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기도 하고, 투표 대상자의 범위도 넓기 때문에 관리를 좀 더 신경 써서 할 필요가 있겠더라. 이번의 경우도 정확한 원인은 확실히 찾아볼 필요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표를 한 장 더 발행했을 텐데 기록에 착오가 있었던 것 아니겠어?

이젠 진짜 끝내야겠다. 이번 기회에 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는데, 충분했을까 걱정이 되기는 하네. 나는 이번이 두 번째 참여한 개표였지만, 지난 2016년 4월의 총선에서부터 뭔가 부글부글 끓는 것이 느껴졌는데, 당신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촛불 혁명'이 이번의 제19대 대선으로 마무리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어. 당신들이 정말 자랑스러워!

앞으로도 내가 개표소에서 일하게 될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투표지 분류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당신들이 충분히 협의해서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분명히, 내가 쓰이면 답은 빨리 나올 테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한 표 한 표'가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믿을 수 있게 되는 것 맞지? 그러려면, 우선은 이번의 선거에서 당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투·개표 참관에 참여하여 제대로 감시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녕!
#일상 비틀기 #제19대 대선 #개표 참관인 #투표지 분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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